4. 넷째날(여강 → 호도협 중도객잔)
차가 금사강(金沙江)을 따라서 합파설산(哈巴雪山)으로 접근하면서 금사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옥룡설산(玉龍雪山)도 점점 일어서고 있다. 이제 곧 합파설산과 옥룡설산이 가파르게 일어서면서 만든 깊고 좁은 협곡, 호랑이가 사냥꾼에 쫒기다가 훌쩍 뛰어 건넜다는 호도협(虎跳峽)이다. 금사강은 이제 곧 맞닥뜨릴 그 좁고 사나운 협곡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은 유유히 호도협을 향해 흐르고 있다.
호도협 입구인 교두진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트레킹 출발지인 나씨야거에는 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작은 차로 갈아타기 위함이다. 보통 많은 트레커들은 여기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하나, 우리는 시간 관계상 나씨야거까지는 차로 이동한다. 교두진에는 건축물이 들어서고 길이 닦이고 있는 것이 예전에는 새나 쥐나 다닐 수 있는 길이라고 하여 조로서도(鳥路鼠道)라고도 불리었다는 차마고도에도 개발의 광풍이 몰아닥치고 있음을 실감하겠다. 이러다가 우리가 머리에 떠올리는 그 차마고도는 사진과 영상에서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차가 나씨야거를 향하여 올라간다. 길은 예전 마방들이 다니던 길을 작은 차가 다닐 수 있게 조금 확장하고 콘크리트 포장을 해놓았다. 이렇게 차 하나 겨우 갈 수 있는 길에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어떻게 교행하려고 하나? 나씨야거 객잔으로 들어서니 화단의 턱에 ‘환영 한국분’이라고 써놓았다. 최근에 한국인들이 이 호도협에 부쩍 찾아들어오고 있다던데, 이 나씨야거 객잔 주인도 발 빠르게 한국인 환영한다고 써놓았구나.
나씨야거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객잔을 둘러보니 객잔의 벽면이나 창문에는 이곳을 다녀간 트레커들이 붙여놓은 스티커나 작은 깃발, 이곳의 감상을 써놓은 글 등으로 가득한데, 한글도 많이 보인다. 지난번 안나푸르나 트레킹 할 때 지나는 롯지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붙여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의 극성스러움이 이곳도 예외는 아니구나. 자세히 보니 나도 알만한 서울의 어느 변호사도 자기 명함을 여기에 끼어놓고 갔네.
이제 점심을 마치고 드디어 그 옛날 마방들처럼 우리도 차마고도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단순히 일반 트레커들처럼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 옛날 마방들처럼 말의 행렬을 재현해보고자 함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마방들처럼 말을 직접 끌어볼 생각도 하였으나, 지금부터 펼쳐지는 길은 28번 굽이굽이 꺾이며 올라간다고 하여 ‘28 밴드’라고 불리는 험한 길이다. 하여 일행중 일부는 차로 다시 차마고도 아랫길로 내려가 차마객잔까지 차로 이동하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도 말을 끈다는 생각을 단념하고 각자 배정된 말에 올라탄다. 자, 이제 출발이다!
길은 역시 28밴드라는 별명처럼 급히 꺾이며 올라가는데, 어떤 길은 마부가 같이 옆에 서서 가지 못할 만큼 좁고, 바닥은 울퉁불퉁한 돌길이다. 이 험한 길을 말은 자기 등위에 사람까지 태우고 가는데, 아마 예전에 실었던 보이차보다 무겁지 않을까? 말의 입장에서는 보이차보다 무거운 짐 때문에 고생께나 한다고 생각하겠지.
녀석들은 정말 힘든 모양이다. 힘이 드니 방귀를 끼다 못해 똥을 질질 싸고, 콧방귀를 연신 낀다. 나를 태운 녀석은 자기 편한 쪽으로 오른다고 나를 옆의 나뭇가지에 사정없이 부딪치게도 하는데, 결국 녀석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지면서 잠시 무릎을 꿇기까지 하였다. 녀석에게 미안하군. 배낭까지 무겁게 지고 있으니... 이렇게 힘이 드니 녀석은 가파른 길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속으로 숫자를 세는지 잠시 준비동작을 하다가 한꺼번에 몇 발자국을 오르기도 한다.
나는 옆으로 가파른 경사면이 나타날 때면 녀석이 제발 실수하지 말기를 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녀석을 어루만지며 격려라도 하고 싶으나, 내 코가 석자이니 어떻게 하누? ‘말아 미안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단다.’ 선두에서 가던 한 작가가 이러한 말이 애처로운지 28밴드가 끝나기도 전에 말에서 내리매, 나도 따라 내린다. 어떻게나 다리에 힘을 주었던지 말에서 내리니 다리가 후들후들하여 금방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
28밴드가 끝나는 해발 2,670m의 차마고도에서 잠시 쉰다. 저 한참 밑으로 금사강이 호도협을 요동치며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후후! 호도협 입구까지 평온하게 오던 금사강이 갑자기 이 거치른 호도협을 만나 고생하는군. 그 위의 벼랑으로는 금사강을 따라가는 포장된 호도협 아랫길(low pass)이 보인다. 저 아랫길은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깨끗이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으나,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윗길(high pass)만은 그대로 남겨두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합파설산의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으나, 이제 길은 내려가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길을 가고 있는 합파설산은 높이가 5,396m나 되는 높은 산인데 어찌 언감생심 꼭대기에 오를 생각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차마고도는 마방들이 티베트로 가기 위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개척한 길인데 정상까지 갈 리가 없겠지. 급하게 내려가던 길이 어느 정도 평탄해지자 마부들은 우리보고 다시 말에 올라타라 한다. 나는 계속 걸어갈까 생각하다가 오늘의 중간 목적지인 차마객잔이 얼마 안 남았는데, 처음 28밴드의 시작처럼 마방으로 끝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싶어 다시 말에 오른다.
오르막이 아니니 말도 아까보다는 한층 편해 보이누나. 그런데 내려가면서 말을 타는 것도 여전히 힘들고, 게다가 말을 따라 몸이 앞으로 쏠렸다간 그대로 추락할 것 같아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에게 신경을 쓰면서 가다보니 수풀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이더니, 숲을 벗어나니 바로 눈앞 건물에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우리 일행들이 보인다. 차마객잔에 도착한 것이다. 차마객잔이니 차 한잔은 필수이겠지? 잠시 차 한잔으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인 중도객잔을 향하여 나머지 발걸음을 옮긴다. 중도객잔을 향해 가는 길도 28밴드처럼 꼬불꼬불 올라가는 길은 아니나, 그래도 가파른 산의 경사면이나 절벽을 따라 가는 길이다.
드디어 중도객잔에 도착하여 배정된 방에 짐을 내려놓고 먼저 화장실부터 찾았다. 유리가 없는 창문 밖으로 옥룡설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들어온다. 여기 오기 전에 인터넷 검색에서 이곳 화장실이 천하 제일의 화장실이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과연 화장실에서 보는 경치 하나만은 천하제일이라고 할 만 하겠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작가들은 트레킹의 피곤함도 잊은 채 작업에 들어간다.
옥룡설산의 전경이 다 들어오는 식당 옥상에서는 미국에서 온 가브리엘(Gabriel Edward)과 수잔이 열심히 바로 앞의 옥룡설산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고, 호주에서 온 일본인 여작가 요코는 가져온 소품들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또 마당에서는 덴마크에서 온 헨릭(Broch-lips Henrik)이 빨간색의 원뿔 모양의 콘을 두 줄로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그런가 하면 스위스 작가 다니엘라(Daniela Johanna)는 일부러 만들어 갖고 온 조그만 텐트를 머리 위에 올려놓거나 물구나무를 서는 등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고, 덴마크 작가 스틴(Rasmussen Steen)은 준비해온 직사각형의 넓은 플라스틱 빨간 판에 물을 붓고 사람들에게 각자의 희망을 종이에 적어 띄우라고 한다.
오늘날 현대예술은 너무 작가들의 개인적인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과의 소통을 등한시 한다는 얘기가 있지. 그렇기에 나도 이러한 행위예술(퍼포먼스)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영역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었지. 그런데 이렇게 작가들과 같이 여행을 하면서 작가들이 자기들이 접하고 느끼는 자연을 진지하게 무언가 자기 몸짓으로 표현하려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뭔가 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그 느낌이 나에게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남은 여정에 있어서도 작가들의 작품에서 더욱 더 뭔가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트레킹 첫날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