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섯째날(중도객잔 → 샹그릴라)
트레킹 둘째 날이다. 오늘도 차마고도의 길은 별로 큰 오르막 없이 산허리를 따라 가거나, 절벽에 난 길을 따라간다. 협곡 밑에서 금사강이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절벽으로 난 길로 들어선다. 그 옛날 마방들은 길을 내기 위하여 순전히 곡괭이와 망치 등만 사용하여 이 길을 냈을 것 아닌가?
길을 내다가 아차 미끄러져 저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은 이들도 많지 않았을까? 아까 길을 지나오면서 무덤들을 보았는데, 마방들이 이렇게 길을 만들다가, 또 길을 가다가 죽으면 그렇게 길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겨우 길을 낸 거라 바닥이 평평할 리가 없다. 미끄러지지 않게 발밑에 신경을 쓰면서 산허리를 돌아가니 저 산 높은 데서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관음폭포(觀音瀑布)다. 단순히 소리를 볼 수 있는 폭포라는 얘기인가, 아니면 여기서 관음보살의 현신을 보았다는 얘기인가? 폭포를 조금 지난 곳에는 현관사라는 조그만 사당이 절벽 위쪽에 겨우 터를 잡고 있다. 올라가보나 문은 꼭 닫혀있어 안을 볼 수가 없다. 틀림없이 이 관음폭포에 관련된 무슨 얘기가 있을 텐데...
길을 가면서도 헨릭은 빨간 콘을 세우고 또 사진을 찍고, 이번에 부부가 같이 온 프레디와 수잔은 서로의 눈에 바짝 카메라를 들이대고 눈만 가득 사진을 찍고, 페더슨(Pedersen Alex)은 안대를 하고 팔을 벌리고 이 호도협을 자기 가슴에 안으려 한다. 나에게는 프레디와 수잔의 작업이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이 호도협을 담아가려는 것으로, 페더슨은 눈을 감고 온 감각을 집중하여 이 호도협을 자기 가슴에 담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저 작가들이 무슨 의도로 퍼포먼스를 하던 간에, 감상자들 또한 자기가 느끼는 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산허리를 도니 오늘의 목적지인 티나객잔이 보인다. 이제 우리는 티나객잔을 향하여 내려가기 시작한다. 티나객잔에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 저기 벽에 많이도 붙여놓았다. 호도협에 와서 위에서 금사강을 쳐다보기만 하였는데, 직접 물가로 내려가 금사강의 그 울부짖는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어봄직도 하지 아니한가? 나는 금사강가의 중호도협으로 가고자 하는데, 대부분 일행은 그대로 티나객잔에서 쉬겠다고 한다. 박선생님은 이번 행사의 기획자로서 일행들을 돌보아야 하기에 남으시고 총 7명이 가이드를 따라 중호도협으로 내려간다.
나는 잠깐이면 내려가겠거니 하였는데, 길은 나의 이러한 예상에 ‘픽!’ 웃으며 계속 우리보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라고 한다. 드디어 물가에 도착하여 위를 보니 티나객잔 앞으로 난 도로가 지나가는 다리는 저 멀리 하늘 위에 걸려있는 듯하고, 그 밑으로 폭포물이 힘차게 쏟아져 내려온다. 내 입에서는 멋있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저 다리가 저렇게 높은 곳에 걸려 있다는 것은 우리가 또 그만큼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 아닌가? 후유~~
가까이에서 본 금사강은 위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무섭게 요동치며 울부짖는다. 아까 하이패스를 지나면서 저 금사강에서 래프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래프팅을 하여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도 여기서는 도저히 살아서 이 금사강을 내려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강가에는 큰 바위 하나가 금사강을 노려보면서 서 있다. 이게 바로 이 호도협의 금사강을 뛰어 넘으려고 호랑이가 도약하던 바위란다.
저 요란스러운 굉음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도 더하여 이렇게 협곡을 진동하는 것인가? 그 때 호랑이는 저 바위에서 이 호도협을 뛰어 건너는데 성공하였겠지? 잠시 호랑이 바위 위에서 임솔내 시인이 어제 오늘 호도협을 걸으며 작시하였다는 ‘호도협’ 시를 읊조려본다.
천만년 고도 위에
네발 달린 신의 잔등 노새 위에 올랐었네
조로소도 협곡길은 우리네 인생길
호랑이의 울부짖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품에 누울지니
그 품안에 노닐지니
이제 여정을 계속 하면서 이병욱 선생이 임시인이 작시한 ‘호도협’에 곡을 붙이겠지. 그럼 우리가 티베트에서 네팔로 내려가는 협곡에서는 이 호도협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으려나? 계속 포효하는 강물을 바라본다. 우리는 호랑이와 금사강이 어울려 외쳐대는 소리에 넋을 잃고 떠날 줄을 모르는데, 가이드는 위에서 너무 기다리겠다고 빨리 올라가잔다. 그래! 이제는 올라가 또 다른 세계로 가야겠지.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샹그릴라다. 제임스 힐튼이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이상향으로 묘사하였다던 그 샹그릴라. 가자! 샹그릴라로!
티나객잔을 출발한 버스가 호도협의 낮은 길(low pass)을 따라 호도협을 빠져나간다.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바로 옆에선 금사강이 울부짖으면서 자꾸 버스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만 같다. 군데군데 굴러 떨어진 돌을 만나면 버스는 조심조심 돌을 피해가고, 터널을 만나면 용감하게 어둠 속을 뚫고 나가고... 이틀 동안 걸어서 지나온 호도협을 차는 금방 거슬러 호도협 입구로 우리를 데려온다. 한국에서 처음 호도협 트레킹을 꿈꿀 때에는 이렇게 차로 금방 휙 협곡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호도협 입구의 호랑이 석상은 우리보고 조심히 남은 여정을 밟아나가라며 앞발을 들어 우리를 전송한다.
이제 차는 샹그릴라에서부터 내려오는 금사강의 상류 계곡을 따라 깊숙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옆에서 금사강은 뭐가 급한지 우리에게는 눈길 하나 안 주고 급히 내려간다. 여강에서 호도협을 향해 가는 금사강은 그렇게 천천히 여유를 가지며 흘러가는데, 이곳의 금사강은 샹그릴라에서 급하게 내려오면서 관성이 붙었나?
그리고 길은 계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것 같더니, 어느 수력발전소를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예전 티베트로 향하던 마방들이 오르던 길을 지금은 차로 올라가는 것. 수 년 전에 샹그릴라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길이 제대로 닦이지 않은 샹그릴라 가는 길을 힘겹게 오르던 짚차는 바퀴가 빠져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서야 겨우 빼내던데, 지금은 비록 길은 28 밴드처럼 굽이굽이 올라가지만, 이 정도면 편안하지 아니한가?
이리저리 한참을 헤매고 올라가던 버스가 드디어 고개 위에 섰다. 예전에 힘들게 차마고도를 올라온 마방들도 여기서 담배 한 대 피며 한숨을 돌리지 않았을까? 프레디가 갖고 다니는 휴대용 GPS를 보니 해발 높이는 3,220m를 넘어서고 있다. 후유~ 옛날 같았으면... 이런 감상에 빠지면서 앞을 바라보니 저편에 어떤 산이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옥룡설산 - 한 마리의 은빛 용이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옥룡설산! 아니 우리가 저 옥룡설산 밑에서 이틀을 헤매며 트레킹을 하면서는 도대체 옥룡설산의 머리를 볼 수 없더니만, 저것이 옥룡설산의 머리 선자두(扇子陡)란 말인가? 옥룡설산의 연봉 중에 혼자 흰 눈을 이고 살짝 고개를 들고 있는 옥룡의 머리. 옥룡의 주위로는 구름이 감아 돌고 있는데, 문득 옥룡이 고개를 들고 떨쳐 일어날 것만 같다. 손오공이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까불다가 부처님에게 벌을 받아 갇혔던 산이 옥룡설산이라고 하던데, 저 산 어디에 손오공은 갇혀 있었을까?
고개를 살짝 내려가니 평원이 펼쳐진다. 이 높은 고원 위에 이런 평원이 펼쳐지고, 평원에는 푸른 목초지와 농작물이 자란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 높은 고원 위에 풍요로운 땅이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니, 제임스 힐튼이 1933년에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이를 두고 이상향 샹그리라라고 한 것이 아닐까? 원래 이곳의 이름은 ‘중전’이나 세계인들이 소설에 나오는 샹그릴라가 어디냐며 관심을 갖자, 중국은 이 일대를 조사하고 이곳이 소설에 나오는 샹그릴라에 가장 가깝다며 지명 자체를 아예 샹그릴라로 바꿔버렸다.
어쨌거나 ‘샹그릴라’가 불리는 그곳에 왔다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시내로 들어서니 이곳은 회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리의 간판들은 한자 외에도 아랍 글자 비슷한 회족 글자도 같이 쓰여 있다. 마치 연변에 가면 간판에 한자 외에 한글이 쓰여 있듯이 말이다.
저녁을 먹고 시내로 나가본다. 그런데 스쳐 지나가는 간판 중에 어느 간판은 '어머니 사랑'. 이 깊고 높은 중국 내륙의 도시 샹그릴라에서 한글 간판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간판에는 태극기까지 그려져 있다. 이제 한국 사람이 안 가는 데가 없군. 한국 식당이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한국 관광객이 오고 있다는 얘기.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관광객이 부쩍 늘었단다.
또 하나의 한국 식당에는 대장금의 이영애 사진도 있다. 대장금이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더니, 그럼 이곳의 한국 식당 고객에는 중국 사람도 많을 것 같네. 시장의 풍경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활기가 넘치고, 사람의 냄새가 나고, 장사꾼과 손님 사이에 열심히 흥정이 오가고... 어둠이 깔린 거리를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오니 호텔에는 전기 장판이 준비되어 있다. 여강에서는 에어컨을 켰었는데, 높은 데 올라왔다고 여기 호텔에서는 전기 장판을 주는구나. 전기 장판의 따스함을 느끼며 중국에서의 닷샛날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