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곱째날(여강 → 운삼평 → 곤명)
이왕 다시 여강까지 왔으니, 오늘은 떠나기 전에 호도협 트레킹에서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던 옥룡설산의 품에 안겨보기로 한다. 차가 여강 시내를 지나는데 전면에는 옥룡설산의 웅대한 자태가 드러난다. 서울에서도 시내를 지나다보면 앞에서 북한산이 마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에서 전면의 옥룡설산을 바라보노라니 눈은 북한산 볼 때보다도 위로 동공을 확장해야 하누나. 이제 눈앞에 옥룡설산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우리가 타고 온 차는 여기서 멈추고, 관광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제공하는 버스로 옮겨 타야 한다. 옥룡설산을 조금이라도 보호하려는 조치라는군.
차창 밖으로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른다. 한 곳에는 관광객들이 몰려 있는데, 그 앞으로 설산에서 내려오던 물이 계단식 돌들을 타고 내려와 못을 이른다. 백수하(白水河)다. 옥룡설산에서 내려온 물이니 물은 옥빛으로 반짝이겠지? 물이 타고 흐르는 계단식 돌은 물속에 녹아있던 광물질이 계단식으로 침전되며 생기는 것인데, 사실 저 계단식 돌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는군. 얕은 물속에서는 야크가 놀고 있다.
차에서 내렸다. 높이 3,240m의 운삼평으로 오르기 위해선 삭도(索道)를 이용해야한다. 이곳에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니 한글로 ‘삭도대합실’이라고 써놓았다. 검표대를 지나 삭도로 향한다. 그런데 근무하는 직원의 이 태도는 무언가? 한가한 때도 아니고 대합실 내에는 삭도의 곤돌라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담배를 피면서 근무를 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과거 우리나라도 그랬을까?
곤돌라에서 내려 어느 정도 올라가니 눈앞에 산속 평전(平田)인 운삼평(雲杉坪)이 펼쳐진다. 삼나무 사이로 구름이 노니는 평전이라 운삼평이라 하였나? 안내문을 보니 이곳 나시족의 ‘동파경’에 따르면 이곳에선 호랑이를 말 대신 타고 다니고, 사슴을 소 대신 경작하는데 사용하였다네. 원래 이곳은 나시족의 말로 ‘우무게’라 하였는데, 그 뜻은 사랑을 위하여 죽는 거룩한 곳이라는 뜻이라나?
무슨 말인가? 옛날 아롱판이라는 남자와 구명금이라는 여자가 자기들의 사랑의 도피처를 찾아 이곳으로 숨어들어왔다. 이들이 이곳에서 사랑으로 살다가 죽은 후, 청춘남녀들은 해마다 6월 화파절 때마다 남자는 사랑의 신상을 들고, 여자는 연인의 옷을 안고 이곳에 찾아와 자기들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단다. 이렇게 운삼평이 사랑을 위하여 죽을만한 곳이라 그런지 미국의 지리인문학자 조세프 락크는 여강에 27년이나 칩거하면서 운삼평을 ‘영혼을 정화하는 에덴동산’이라 하며 자기는 이곳에서 죽고 싶다고 하였다는군. 대만의 전 고궁박물관장 이림찬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가 길을 잃어 도화원에 들어섰네!’라고 찬탄하였고, 그 역시 죽은 후 여기에 묻혔다고 한다.
하긴 지금이야 케이블카로 훌쩍 올라와서 그렇지 그 옛날에 밑에서부터 고생고생 하며 밀림을 뚫고 올라왔을 때 여기에 이런 아름다운 평전이 펼쳐진다면 에덴동산이니 도화원이니 할 만 할 것이다. 그런데 한글 안내문이 번역이 영 엉망이어서 어떤 곳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그 앞의 영문 번역과 맞추어보고서야 정확한 뜻을 알겠다. 이런 데서, 또 아까 담배 피우는 직원의 모습에서 아직 관광 후진국의 중국을 본다.
사랑을 위하여 죽을만한 곳이라 그런지 주위 나무 가지에는 갖가지 사연을 담은 주걱 같은 나무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 일행중에서도 이런 사랑의 기운에 젖어들어서인지 나무판을 사서 무언가를 적고 있다. 운삼평을 보호하기 위하여 길은 목재 데크만 따라가도록 되어 있다. 목제 데크는 운삼평을 한 바퀴 돌아오기에, 나도 이를 따라가는 대열에 합류한다. 옥룡설산의 옥 같은 머리가 바로 위로 보인다. 저 바위 봉우리가 바로 보이는 이 높은 산 위에 어떻게 이런 넓은 평전이 형성되었을까?
이런 사랑의 운삼평에 왔는데 작가들이 그냥 곱게 갈 리 있겠는가? 다니엘라와 페더슨은 투명한 비닐 테이프를 길게 길게 펼치며 퍼포먼스를 하고, 헨릭도 데크를 넘어가 빨간 고깔콘을 펼치고 사진을 찍는다. 그런가 하면 요코도 자기 사진에 집어넣는 투명 집게 같은 상징물을 풀밭위에 올려놓고 설산의 머리를 함께 카메라에 잡으려는 듯 아예 바닥에 누워 투명 집게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그런데 가이드가 정해준 시간은 다가오는데, 이 외국작가들은 아직 작품이 다 되지 않았다며 일어설 생각을 안 하네.
이들을 재촉하여 데리고 내려와 다음에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옥수채(玉水寨).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옥처럼 맑은 물이 이곳 흑룡담(黑龍潭)을 거쳐 여강 시내로 흘러들어가며 이곳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한다. 그래서 장족과 나시족, 바이족은 이곳을 자기들의 성소(聖所)라고 한다는군.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옥 같이 맑고 투명한 물속에 금빛 송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녀석들은 아니고 일부러 이곳에 풀어놓은 것인데, 성지(聖池)에 사는 물고기라면 금빛 송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일까?
옥수가 솟아나는 흑룡담의 근원 샘에는 금빛 찬란한 신상을 세워놓았는데 다리가 이상하다. 뱀신이었다. 주위로도 여러 동물신상들이 이 뱀신을 둘러싸고 있다. 옆에는 전설이 쓰여있다. 옛날 옛적에 사람과 자연은 이복형제간이었는데, 부모가 죽고난 후 서로 싸움을 벌였다. 그리하여 싸움에서 진 사람은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하늘의 신이 이를 보고 동바센류오(동파족의 신)를 내려 보내 중재를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사이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고 동물을 죽이고 희생제물의 피로 강물을 더럽히는 등 자연을 파괴하여 중재는 난항을 겪었는데, 결국 앞으로 사람이 자연을 보호하고 이 거룩한 샘에서 자연에 경배드리는 조건으로 중재가 성립하였단다.
그 후로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자연에 경배 제물을 올리고, 비가 안 올 때에도 여기 와서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단다. 자연을 신성시하고 자연을 보호하려는 동파족의 자연신관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옆에는 이러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연 파괴의 범죄를 회개하는 기도문도 새겨져있다.
거룩한 샘물에서 물러나와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오른편으로 화합원이란 사원이 있다. 사람과 자연의 화합을 위한 사원인가? 시간이 없어 문간에서 안을 들여다만 보니,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돌탑에 여러 색의 천이 묶여져 있다. 남자의 생식기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역시 내 추측이 맞다. 돌탑의 이름은 천향로(天香爐)로 안에다 향불을 피우면 저 커다란 남근 위로 연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럼 남근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정자가 가득 담긴 정액이련가? 인간에게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기 때문일까? 아마 세계 여러 민족치고 남근 숭배 사상이 없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물은 흐르다 연못을 만나 고이고, 다시 내려가다 고이고 또 흘러간다. 이 물이 며칠 전 들렀던 여강고성으로도 흘러가리라.
옥수채를 나와 마지막으로 속하고진(束河古鎭)을 들렀다. 여강고성처럼 오래된 옛 도심지를 보전해놓은 것으로 이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가 있는 곳이다. 속하고진을 어슬렁거리는데, 어느 건물 지붕 밑에 매단 문양에 눈길이 간다. 바로 쌍어(雙魚)로 된 신어문(神魚紋). 우리나라 김수로왕의 능에도 이 신어문이 있지 않은가?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 왕비와 함께 들어왔다는 쌍어문. 김병모 교수는 김수로 왕릉 쌍어문의 출발지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였었지. 바로 허황옥이 출발하였다는 아유타국을 찾아서... 그래서 찾아낸 곳이 인도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아이다. 아요디아에서는 지금도 경찰 계급장이나 택시 번호판에도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항해술도 변변치 않던 그 고대에 허황옥 왕비가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가기 위하여 이 머나먼 인도에서 출발하였을까? 김교수가 생각하는 가설은 이렇다.
아요디아 왕국에서 왕족 간에 정권 다툼이 일어나 일부 왕족이 아요디아를 떠났다. 그들이 먼저 도착한 곳은 미얀마. 여기에 정착하여 살던 일부 사람들이 다시 북쪽으로 산을 넘어와 이곳 운남과 사천에 정착한 것이다. 허황옥 왕비는 자신을 보주태후라고 한다. 그런데 사천성 안악현의 옛 이름이 보주라 하고, 이곳 보주에 가면 역시 신어문이 많고 놀랍게도 허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허씨 집성촌에 가면 그들 기록에 허황옥이라는 여자 이름도 나온다고 한다. 후한서에 보면 기원 후 47년에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약 7,000명의 사람들을 양자강을 따라 하류로 내쫒았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김교수는 바로 이렇게 양자강을 따라 하류로 내쫒긴 이들 중에 허황옥 집단이 가락국으로 와 김수로왕과 혼인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서울대 의대에서 가야시대 귀족들 무덤의 뼈의 DNA를 분석한 결과 인도계의 유전인자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김교수님의 책에서 이런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차에 이곳에 와서 쌍어문을 보게 되니 반갑다. 여기서만 본 것이 아니다. 이번에 운남을 여행하면서 이 쌍어문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되었다.
여강 시내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 화장실을 찾는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다.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오른쪽의 큰 것 보는 쪽을 무심코 쳐다보니 한 사람이 문도 닫지 않고 큰 것을 보고 있다. 순간 나는 ‘아니? 중국인들이 아무리 무신경하다지만, 공중화장실에서 문도 안 닫고 볼 일을 보나?’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예 문짝이 없다. 아니 이런 큰 식당의 화장실에 문짝이 없다니? 자세히 보니 원래 문짝이 달려 있었는데, 떼어 논 것으로 보인다. 이동 중에 중국 시골 화장실에 문짝이 없는 것은 이제 자주 보니 그런가보다 하며 익숙해지는데, 이런 도시의 큰 식당 화장실에 문짝이 없다니! 그런데 그 중국인은 자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데도 태연히 볼 일을 보고 있다. ‘허참! 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는 나올 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저녁을 먹고 여강역으로 나갔다. 대합실로 들어가니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대합실은 만원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기차 대합실에선 이런 풍경은 명절 때나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10시45분에 기차에 올라탔다. 침대칸으로 간다. 침대에 누워 기차여행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샹그릴라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 바람에 이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구나. 밤새 기차의 가벼운 진동과 소리에 잠이 들었다 깼다 하다 보니 아침 6시에 기차는 곤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분명 안내방송은 곧 곤명에 도착한다고 하는데, 밖은 아직도 겨우 새벽 미명만 드리우고 있다. 아니 이 계절에 6시면 어느 정도 밖이 밝아야 하는데? 아하! 그렇지! 중국은 공산주의 획일성으로 전국이 상해의 표준시에 맞추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곳은 상해에서도 서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이니 실제의 지리학적 시간은 아직 새벽 5시 정도 된다고나 해야 할까? 이후 계속 서쪽으로 라싸, 시가체, 장무로 이동하면서 이 시간대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반대로 밤은 더욱 늦게 찾아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