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열 번째 날(라싸 → 시가체)
라싸를 떠나 시가체(Xigaze)로 간다. 가이드가 2대의 지프를 더 마련하여, 나는 얼른 그중의 한 지프를 찜했다. 차창 밖을 스쳐지나가는 주위의 산들은 약간의 풀만 있을 뿐 황량하기만 하다. 왜 이리 나무가 없을까? 나무가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 차가 지나가고 있는 이곳은 보통 4,000m를 넘나드는 곳이니, 이보다 높은 저 보이는 산들은 이미 수목 성장한계선을 넘어선 곳이 아닌가? 길은 나무가 없는 황량한 산들 사이로 계곡을 따라 가다가, 계곡을 나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흐르는 얄룽창포 강을 따라 가며 이따금 마을을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황량한 길에 묘한 매력이 있다. 지금 나는 뭔가 을씨년스러운 어느 다른 행성을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가다보니 조금 더 웃자란 산들은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다. 4,000m 길을 달리면서 바라보는 하늘의 구름도 뭔가 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 구름의 표정도 다양하다. 길을 달리다보면 지평선과 만나는 곳에 시꺼먼 구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비를 뿌리는데, 어느 순간 시꺼먼 구름은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푸른 하늘을 내준다. 고개를 넘을 때에는 어느 순간 비는 미처 얼어붙은 몸을 풀지 못하고 차창에 부딪치기도 하고...
그런데 이 묘한 경치를 보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깜빡 졸다가 꿈을 꾼다. 이렇게 잠깐씩 꿈을 꾸다 깨다 하는데, 그 꿈도 참 묘하다. 보통 때 꾸는 꿈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가 하였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아! 이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는 것이었다. 산소가 부족하면서 정신이 몽롱해지며 약간의 환상을 보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환각 상태에 빠지기 위하여 부탄가스를 마시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1 때 생각이 난다. 우리 학교에 정신이 약간 이상한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 친구가 내 목을 졸랐다. 처음에는 숨이 막혀 캑캑거렸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황홀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데서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환각상태를 즐기려고 부탄가스를 즐겨 마시다가 숨지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그 때 목이 더 졸렸으면 영원히 환각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겠지?
차가 다시 고개를 올라간다. 그런데 이번에 올라가는 고개는 지금까지 넘어온 그렇고 그런 고개가 아니다. 차는 계속 지그재그로 올라가는데, 급커브를 돌다가 하마터면 내려오는 차와 정면 충돌할 뻔하였다. 다행히 서로 속도를 내지 않아 서로 마주 보며 멈추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티베트의 병원 구경을 할 뻔하였다. 문득 위를 보니 우리가 앞으로 올라가야 할 길이 파란 풀밭에 지그재그로 자국을 내어놓았는데, 길옆에 안전석(安全石)을 점점이 규칙적으로 배열해놓은 것이 이렇게 밑에서 올려다보니 마치 지퍼를 연상시킨다. 힘이 좋은 지프는 버스를 진작에 따돌려 다른 일행이 타고 오는 버스는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지프가 계속 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가는데, 어느 정도 올라가니 길 앞에 안개가 보인다. 아니다. 그건 안개가 아니었다. 구름이었다. 우리는 지금 해발 4,800m의 깜발라 고개 위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깜발라 고개 위에 올라왔다. 구름이 지나가는 사이로 티베트의 3대 성호(聖湖)중 하나인 얌드록쵸 호수가 보인다. 별명이 푸른 보석이라고 하더니, 여기서 보니 정말 전갈 모양을 한 파란 보석을 보는 것 같다. 호수에 사진기를 들이대어보나 그 사이 또 옅은 구름이 지나가며 파란 보석을 흐릿하게 감춘다.
고개 위에는 수많은 타르초와 룽다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이후 티베트의 높은 고개를 지나다보면 이러한 타르초와 룽다는 어김없이 보게 된다. 오래된 타르초와 룽다는 헤어져서 너덜거린다. 우리 같은 외지인들이 보면 좀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으나, 타르초와 룽다가 조금씩 사멸해갈 수록 타르초와 룽다에 새겨진 부처님 말씀은 바람을 타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이제 저 푸른 보석으로 다가가보자. 다시 차를 타고 꼬불꼬불 고개를 내려간다. 해발 4,442m의 얌드록초 호수의 푸른 빛 너머로 호수 건너편에는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산들이 멀리서 낯선 이방인들을 쳐다보고 있다. 해발 4,442m의 호수라면 우리나라로 친다면, 하늘 저 높은 곳에 호수가 떠있는 것이라고 할까? 나는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기 위해 곧장 호수가로 다가가는데, 옆에서 현지인이 나를 잡는다. 나는 틀림없이 물건을 사달라는 잡상인으로 생각하고 뿌리치고 계속 가는데, 이 여자도 계속 나를 붙잡으며 따라오네. 내가 불쾌한 안색으로 돌아보니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라는 것이다. ‘아니? 자기들을 찍는 것도 아닌데, 무슨 돈을 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이들도 돈에 오염이 되어가는구나. 일견 화가 나면서도 또 한편으론 이렇게 해서라도 생계를 유지하려는 그들이 측은하기도 하다.
이 호숫가에서도 작가들은 퍼포먼스를 펼친다. 박병욱 선생이 그동안 숨겨두었던 기다란 빨간 천을 꺼내어 바람에 휘날린다. 우리나라 1세대 행위예술가인 이승택 선생의 작품이라는데, 선생은 올해는 건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후배들을 위하여 격려금만 보내셨단다. 그래서 박선생이 이승택 선생을 위하여 이선생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연세에 행위예술을 하셨다면 우리나라에선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라고 하겠는데, 어떤 분인지 만나보고 싶구나.
이제 다시 차를 타고 출발. 가는 길은 내려온 고개를 다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얌드록초를 따라간다. 계속 이어질 것 같던 얌드록초도 어느 새 그 푸른 보석의 빛을 멈추고, 질척질척한 땅을 드러낸다. 물이 빠진 것일까? 지프가 방향을 틀어 이 질척한 땅을 끼고 도는 비포장길로 옮겨간다. 조금 가니 트럭이 왼쪽 바퀴를 진창에 빠뜨리고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런 곳에서는 벗어나려고 더 발버둥을 치면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법. 저 트럭을 보니 예전에 태안반도의 어느 해수욕장에 갔던 일이 생각나누나.
모래밭에 차를 세워두었다가 차를 빼려는데 바퀴가 헛돌았다. 당황하여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니 바퀴는 더욱 모래로 빠져버렸었지. 이리저리 용을 써봐도 안 되어 결국 마을에 들어가 널빤지를 구해와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덕분에 웃통을 벗고 한참 동안 용을 썼던 나는 며칠간 벗겨진 등가죽에 고생해야 했었다. 지프가 힘이 좋아서인가, 트럭을 보고 학습을 하여서인가, 우리 지프는 가볍게 진창을 통과한다.
시가체 가는 도중에 쟝즈를 지나는데, 언덕 위에 산자락을 빙 둘러쌓은 갼체 종 고성이 보인다. 1904년 영국군이 쳐들어왔을 때 쟝즈를 지키던 사람들은 저 고성에서 8개월을 버티며 싸우다가 최후에는 저 종산에서 뛰어내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단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저곳에 투신열사 기념비를 세우고, 이를 소재로 홍하곡(紅河谷)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고 하고...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갈 무렵 시가체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는 시가체를 네팔, 인도와 국경을 맞댄 서부 지역을 한 벨트로 묶는 ‘서부 공정’의 중심도시로 키우고 있다는데, 예전에도 동부 티베트의 중심도시가 라싸라면, 서부의 중심도시는 시가체였다. 차가 시내로 들어가는데 교통안내판에 ‘길림 중로’ 표시가 있다. ‘아니? 길림이라면 만주의 길림성을 말하는 것 아닐까?’ 박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길림에서 예산을 지원하여 닦은 길이기에 ‘길림 중로’라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어느 건물에는 아예 길림성에서 지원하여 지었다고 크게 표시해놓고 있다. 조금 여유 있는 성(省)이 가난한 시가체 시를 지원해주는 모습이 흐뭇하다.
박가이드가 경찰서에 들어가 신고를 하는 동안 앞에서 기다린다. 변방 지역으로 오니 출입절차가 까다롭구나. 경찰서에는 붉은 현수막에 상해시 공안국을 열렬하게 환영한다고 써놓았다. 가이드를 따라 호텔로 들어간다. 체크인을 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게시판의 글자가 재미있다. 우리는 게시판이라 하는 것을 여기서는 유언판이라 한다. 우리야 당장 죽을 때 유언(遺言)을 떠올리게 되는데, 한자로는 할 말이 있으면 여기에 남기라는 류언판(留言板)이다. 이번 여행 동안 계속 한방에서 동침하고 있는 이교수님과 함께 배정된 숙소로 들어가며 오늘의 기나긴 여정을 놓는다. 이제 우리의 여정도 꽤나 멀리까지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