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듬산을 오르다
추부에서 통영-대전간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가 1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보니 대둔산의 바위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만인가? 내가 대둔산을 다시 찾은 것이? 대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법무관 생활을 할 때 몇 번 대둔산을 찾은 이후 처음 찾아오는 것이니 25년? 26년? 주차장에 차를 대니 정읍에서 올라온 류선생님이 벌써 와 기다리고 있다. 나와 박회장님, 김대표, 한대표 그리고 류선생님 이렇게 지난 6월 지리산 종주를 같이 하였던 팀이 다시 뭉쳐서 대둔산을 오른다.
대둔산 입구의 상가가 그 동안 더 많아지고 잘 정비되었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눈앞에 케이블카가 나타난다. 그렇지. 그 사이에 대둔산엔 케이블카가 들어섰지. 글쎄다... 케이블카로 인해 사람들이 산을 더 쉽게 오를 수는 있겠지만, 산은 자기 땀을 흘려가며 헉헉대며 올라야지 굳이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게 올라야하나? 하긴 케이블카 아니면 산에 오르는 것을 엄두도 못 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케이블카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오르는 길목에 소문난 전주식당에서 식당 앞에 대둔산의 유래에 대해 써놓았다. 대둔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산인데, 이를 굳이 한자로 표기한다며 ‘한’은 크다는 뜻이므로 ‘大’로 바꾸고, ‘듬’은 발음이 비슷한 한자 ‘芚’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렇게 하여 사라진 순수 우리말 산이름은 얼마나 될까? 강화 마니산(摩尼山)도 머리, 으뜸을 뜻하는 마리산이 한자로 변한 것 아닌가? 한듬산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일부 논산 사람들은 그쪽에서 보이는 한듬산의 모습이 계룡산과 비슷한데, 산태극, 수태극의 대명당 자리를 계룡산에 빼앗겨 한이 든 산이라 하여 한듬산이라고 한다나? 그렇게 된다면 ‘한’은 ‘恨’이 되어 ‘大’와는 또 상관이 없게 되지 않는가? 그렇지만, 또 다른 이는 한듬산이 큰 덩이의 산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대둔산이 산세에 비해 큰 바위 봉우리들이 많으므로 이런 뜻에서 한듬산이라고 한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이제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는데, 앞에 나타나는 커다란 바위 비석에는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라고 되어 있고, 받침돌에는 ‘척양척왜 보국안민’이라고 새겨져 있다. 아하! 호남을 다니다보면 동학혁명군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한듬산에서도 동학혁명군의 피와 한을 만나게 되는구나.
이곳에 어떠한 피와 한이 서려있는지 만나보자. 1894. 11.초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중에 최공우가 이끄는 농민군은 11월 중순 한듬산으로 퇴각하여, 석두골 위쪽 형제바위 옆 150m 높이의 암반을 근거지로 삼아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3개월 동안 필사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1895. 2. 18. 새벽 안개를 틈탄 일본군의 기습으로 그만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사자 중에는 20대 후반의 임산부도 있었고, 특히 김석순 접주는 일본군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한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150m 절벽으로 투신하였단다.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자니 그들 혁명군의 피와 한에 내 몸도 저려온다. 그런데 겨우 한 살 밖에 안 된 아들의 생명도 같이 끊었어야 했을까? 어차피 아들 혼자 남겨두더라도 왜놈들이 그냥 살려두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일까? 이제 겨우 세상을 본 아기의 생명까지 끊었어야 한 당시의 상황이 너무 처절하기만 하다.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 이들은 2001. 2. 18. 기념비를 세우면서 이들이 이렇게 간 지 100년이 넘었건만 그동안 이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그 장렬한 희생을 잊고 살아왔음을 통탄하면서 이 비를 세우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동안 해방은 되었어도 독재정권하에서 농민들의 혁명은 예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내 기억에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동학혁명도 아니고 동학란으로 배우지 않았던가?
10시 50분. 이제 본격적으로 등산로를 오른다. 시작부터 숨을 헐떡이게 한다. 역시 바위산이라 부드러운 흙을 계속 밟고 올라갈 호사는 누릴 수가 없다. 가다보니 나무들 너머로 꼭 사람 얼굴 같은 바위가 눈길을 끈다. 동심(童心) 바위라는데, 원효대사도 한듬산에 왔다가 동심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3일을 이 바위 아래 있었다고 하네. 목 부분에 금이 가 그냥 얼굴이 밑의 바위 위에 얹혀 있는 것만 같은데, 약간 기울어 있는 것이 언제 미끄러질지 위태롭게만 보인다. 원효대사가 왔을 때에도 저 모습이었다면 저런 위태로운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버티는 것일 게다. 그런데 왜 바위 이름이 아이 마음(童心)인가? 얼굴은 오랜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인데 무엇을 보고 동심바위라고 한 것이지?
이제 슬슬 대둔산의 명물 구름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한다. 구름다리가 지나가는 바위 협곡 밑까지 왔다. 이곳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고 하여 금강계곡이라고도 하고, 양 바위 사이로 지나는 것이 문을 지나는 것 같아 금강문이라고도 한다. 그 동안 이 금강문을 지나간 사람이 무릇 얼마인지 셀 수도 없겠지만은, 안내문에는 620년 전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간 사람 이름을 적어놓고 있다. 영규대사가 의병들을 데리고 연곤평으로 진군할 당시 이 금강문을 지났단다.
영규대사 하면 조헌 의병장과 함께 700 의총(義塚)이 먼저 떠오른다. 바로 한듬산 동쪽 아랫동네인 금산군 금성면에 가면 호남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왜군들을 막아 장렬하게 전사한 700인 의병을 합장한 700의총이 있다. 사실 700의총은 1300의총이라고 해야 한다. 당시 장렬하게 전사한 이들은 700인이 아니라 1300인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700의총인가? 700의총에 대해 기록한 양반들이 그 때 같이 죽은 승병(僧兵)들은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스님들은 천민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나라 살리려는데 양반은 무엇이고, 천민은 무엇인가? 다 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면 다 소중한 전사자들이 아닌가? 양반들의 이런 독선과 아집이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국난(國難)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그 후 조선은 영,정조 시대에 잠깐 반짝이다가 골골하며 결국에는 일본에게 먹히고 말았다.
금강문의 바위를 돌아올라 구름다리 앞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다리를 건너간다. 나도 다리로 발을 내딛는다. 생각보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 동안 더 튼튼한 철제다리로 보강하였기에 예전보다 흔들림이 없나보다. 김대표가 그냥 지나가기엔 재미가 없는지 다리를 흔들어본다. ‘어허! 옆에 가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지지도 않나?’ 다리를 지나면서 머리를 위로 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듬산 정상의 하얀 개척탑. 이제 한듬산 정상도 가시권 내에 들어왔다.
다리를 건너니 어떤 남자 한 분이 한듬산을 열심히 화폭에 담고 있다. 산에서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드문 일인데, 이렇게 한듬산에서 보게 되는구나.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이젤을 펼쳐놓고 있어야 하나? 하긴 이곳에서 봐야 한듬산 모습이 제대로 들어오니 제대로 된 한듬산 모습을 담으려면 어쩔 순 없겠다. 한듬산의 또 다른 명물인 가파른 철제 사다리가 놓인 삼선바위로 접근하면서 나타나는 안내판은 이곳이 동학군 최후의 항전지임을 알리고 있다. 아하! 동학군 최후의 25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구나. 김석순 접주가 바로 여기에서 저 밑으로 몸을 던졌나?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움찔한다.
삼선바위는 고려말 한 재상이 딸 셋을 거느리고 나라가 망하였음을 한탄하며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는데, 재상의 딸들이 선인으로 돌변하여 바위가 된 것이 삼선바위라고. 재상은 누구이며 딸들은 누구지?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하여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글쎄... 이왕 전설을 붙이려면 좀 더 그럴 듯한 것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철계단 앞에 오니 위험하니 우회 등산로를 이용하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경고판을 대놓고 무시하고 철계단 앞에 줄을 선다.
나또한 경사가 45도는 넘어보이는 철계단이 바로 앞에 있는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그러나 철계단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위를 보니 사람들이 앞뒤 붙어서 계단을 오르는 것이 저러다가 계단이 저 하중을 지탱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살짝 들기도 하다. ‘예이! 그런 정도로 위험할 것 같으면 아예 철계단 앞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놓았겠지.’
정상이 가까워 오니 그래도 높은 곳에 올라왔다고 눈이 좀 쌓였다. 올겨울 들어와 처음 눈을 밟아본다. 12시 42분. 정상인 한듬산 마천대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1970. 11. 완주군민들이 직접 자재를 날라 세운 개척탑이 서있다. 무슨 의미로 이런 개척탑을 여기에 세운 것일까? 뭘 개척하였다는 것이지? 글쎄~~ 뭘 개척하겠다는 그런 정신은 좋지만, 주위 산세와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런 탑을 한듬산 정상에 세웠어야 할 피치 못할 사연이라도 있나? 있다면 그런 사연도 개척탑에 새겨 여기 올라오는 산꾼들에게도 공감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밑으로 우리가 건너온 구름다리가 조그맣게 보인다. 앞은 전라북도 완주군, 뒤는 충청남도 논산시. 나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다. 진안의 주화산에서 호남정맥과 갈라져 나온 금남정맥도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을 거쳐 부여 부소산까지 향해간다. 가만있자... 이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저번에 갔던 불명산 화암사가 나오지 않을까? 직선거리로는 여기서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을 텐데... 속인들의 접근을 거부하던 꽃바위절 화암사(花巖寺), 꽃비가 내린다는 화암사 우화루(雨花樓). 그곳을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이제 내려가자. 내려가는 길은 능선을 조금 더 타고 가다가 용문계곡 쪽으로 내려가려 한다. 능선길은 의외로 흙이 많이 있다. 그러다보니 날씨가 좀 풀렸다고 길은 질척질척. 김대표는 꼭 봄 해빙기의 산길을 걷는 것만 같다고 한다. 바위에 시원하게 달린 고드름에서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고드름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 본다. 산에 다니면서 자꾸 사진을 찍다보니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전체만 사진에 담다가, 이제는 이렇게 미시적인 세계에도 눈길이 가는구나.
용문골 삼거리에서 계곡길은 급하게 내려간다. 그런데 내려가다보니 옆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용문굴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래도 안내문이 좀 보고 가라는데 힘들더라도 그냥 갈 수 있나? 박회장님께 얘기하려는데 벌써 저만큼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할 수 없다. 우리끼리라도 빨리 보고 가자.
용문골은 당 태종 정관 12년 선도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용이 이 바위문을 열고 승천했다고 하여 용문굴이라고 한다는데, 왜 선도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은 것인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다. 용문굴은 굴이라기보다는 바위가 묘하게 겹쳐 좁은 틈 사이로 한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다. 용문굴을 통과하니 칠성봉 전망대다. 전망대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니 바위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느 것이 칠성봉이지?
계곡 건너편에 우뚝 선 바위는 망부석인가? 아니지 망부석이라면 저 아래 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오실 님을 찾아야 하는데, 이 망부석은 돌아서있다. 님이 오시지 않는다고 토라져서 돌아섰나?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돌아서있나? 이렇게 돌아서 있는 바위에 망부석이란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없으니까 뭐라 이름 붙여볼까? 발기된 거시기 같으니 발기석? X대석? ㅎㅎㅎ 뒤를 돌아보니 한 조그만 바위 봉우리 위에 소나무가 바위를 깨고 솟아 올라있다. 저 바위 틈새에서 싹을 틔운 소나무가 오랜 세월 조금씩 몸을 불리면서 저렇게 단단한 돌을 둘로 갈라놓았나? 갈라진 왼쪽 바위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게 봉우리 위에 걸려있는 것이 동심바위보다 더 위태하게 보인다.
용문굴을 다시 나와 내려가는데 계곡에는 낙석으로 위험하므로 등산로를 폐쇄한다는 펼침막이 걸려있다. 아니?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등산로를 폐쇄한다면 우린 어디로 가란 말이냐? 경고문을 붙이려면 용문계곡으로 내려서기 전에 붙여야 할 것 아닌가? 이미 다시 올라가기에는 늦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내려가는데 한 곳에선 낙석이 내려와 등산로를 살짝 덮고 있다. 한듬산 바위들이 노쇠하여 낙석이 많이 발생하는 것인가? 2:28경 용문골을 벗어나와 17번 국도로 내려서려는데 이곳에는 아예 제대로 된 입간판이 등산로를 막아서서 낙석 발생으로 등산로를 폐쇄한다고 하고 있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 했더니, 등산로 입구를 이런 경고판이 막아서고 있어서 볼 수 없었던 것이구나.
17번 국도는 배티재를 향하여 올라간다. 우리가 저 배티재를 넘어왔었지. 그런데 이 배티재에도 전쟁 이야기가 있다. 아까 동학혁명군이나 영규대사 이야기를 하면서는 우리가 왜놈들에게 패배한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승리의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보고 어떻게 하든 호남의 곡창지대를 점령하려 하였다. 처음 일본이 쳐들어 올 때는 바다를 통하여 호남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 의해 계획이 무너진 후 육군으로 호남에 진입하려고 한 것. 그 하나의 공격루트가 호남과 충청의 경계에 선 배티재(梨峙)였는데 여기서 권율 장군은 1592. 7. 8. 겨우 1,5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왜군 2만여 명을 맞이하여 승리하였단다.
고개 아래 골짜기의 이름은 지지미골이다. 권율 장군이 왜군을 이 계곡으로 유인하여 화공(火攻)으로 섬멸하였는데, 그래서 불로 지졌다 하여 지지미골이라고 한단다. 이때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배티재에는 대첩비가 서 있다. 이치대첩 때 권율 장군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에 황희 정승의 5대손인 황진(黃進)이 있다. 황진은 1590년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갈 때 삼촌 황윤길의 무관이 되어 같이 일본에 갔었단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왜놈들은 통신사 일행 앞에서 자기들 실력을 과시하려고 과녁을 세워놓고 활을 쏘았다나? 그러자 황진은 그 옆에 그보다 작은 과녁을 세워놓고 화살을 쏴서 명중시켰단다. 또한 하늘을 향해 두발의 화살을 연달아 쏘아 새 두 마리를 한꺼번에 떨어뜨렸다고 하고... 권율 장군 밑에 이런 훌륭한 장수가 있었으니 이치전투를 대첩으로 이끌었으리라.
이제 대둔산, 아니 한듬산을 떠난다. 그 동안 대둔산으로만 알고 있던 저 산에 25,6년 만에 오니 한듬산이란 산의 본래 이름도 알게 되고, 농학혁명군의 피와 한도 깨닫게 되고 또한 권율 장군하면 행주대첩만 생각하였는데, 행주대첩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이치대첩까지 알고 대둔산을 떠난다. 한듬산아! 너는 역시 듬직하고 믿음직한 녀석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