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상당산성’ 하면 원래 ‘산성’이 주는 이미지에 더하여 그 말의 느낌에서도 묘한 끌림이 있다. 예전에 어울사랑 회원인 송봉화 선생이 운영하는 ‘산들바람’에서 열렸던 어울사랑 송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산성로의 고갯길을 급하게 꼬불꼬불 올랐던 적이 있다. 그 때 길이 갑자기 평탄하게 앞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급하게 꼬불꼬불 올라온 이 위에 이런 평탄한 대지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었지.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왼쪽으로 상당산성 이정표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이런 곳에 있는 산성은 또 어떤 멋이 있을까 생각하며, 언제 한 번 상당산성의 성벽을 따라 걷고 싶었다.
그러던 것을 2011. 9. 16. 청주 재판을 하러 가는 길에 짬을 내어 상당산성으로 향한다. 안내문을 보니 상당산성은 청주시민이 뽑은 청주의 자랑거리 10개중에 하나이네. 그래서인지 ‘대조영’, ‘태왕사신기’, ‘카인과 아벨’ 등 여러 드라마 팀들이 촬영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차에서 내려 남문으로 접근하는데, 한 돌거북이 입에 여의주를 앙 문 채 등에 무신창의사적비(戊申倡義事蹟碑)를 들고 나를 째려보고 있다. 무얼까? 이인좌, 박필현 등이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며 난을 일으켰을 때 이에 맞서 싸운 청주 유생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8년에 세운 사적비란다. 그러니까 무신년(1728)에 유생들이 의를 위해 들고 일어난(倡義) 것을 기리는 사적비로구나.
역사에서는 이를 이인좌의 난이라고 부른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정권에서 밀려났던 소론의 일파가 전국적으로 거사 계획을 세우는데, 다른 곳은 쉽게 제거되고 이인좌만이 청주성과 상당산성을 점령하고 북진하다 안성전투에서 패배하여 난은 실패로 돌아갔기에 대표적으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인좌는 안성전투에서 잡혀 사형 당하였고, 상당산성에 남아있던 신천영과 이인좌의 셋째 동생 이기좌 등은 성내로 잠입한 의병들에 잡혀 죽임을 당함으로 난은 평정되었었지.
밀풍군 탄은 어찌 되었을까? 본인은 아무 관련이 없어도 왕으로 추대되었기에 당연히 영조는 자결을 명한다. 왕조 시대에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자신은 조용히 지내려고 하여도 언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이 날아갈지 모를 일이다. 역모를 꾀하는 자들로서는 명분이 있어야 하기에 종실의 왕자중 누군가를 끼어 넣으려 하는데, 실제 사전에 추대하려는 왕자와 아무런 내통이 없이 이름만 들고 나와도, 그 역모가 실패하면 그 왕자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가 너무 똑똑하고 주위에 따르는 자가 많으면 똑똑치 못하고 시기심 많은 왕은 무슨 꼬투리만 있어도 그 왕자를 제거하려드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세종의 형)이나 월산대군(성종의 형) 같은 경우는 일체 정치권과는 발길을 끊고 오직 풍류만 즐기며 세월을 낚은 것이지.
밀풍군 탄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이다. 본인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지만 증조할아버지 소현세자도 소현세자를 시기한 인조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인조로서는 언제 청나라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할지 몰라 불안해했었지.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손자 3명 모두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 첫째와 둘째는 풍토병으로 죽고, 셋째 경안군 석견만 겨우 살아남지. 그러나 석견도 겨우 22살에 죽고, 석견의 두 아들 임창군 혼과 임성군 엽도 1679년 역모에 휘말리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고 5년간 제주도 귀양살이를 한다. 이중 임창군 혼의 아들이 밀풍군 탄인데, 결국 탄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32살에 목숨을 잃는 것이다. 쯧! 쯧! 이들이 그냥 평범한 필부(匹夫)의 삶만 살았더라도...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영조를 제거하려고 한 것일까? 이들은 세제(世弟)로 있던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것이다. 실제로 영조는 어의(御醫)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리게 했고, 이를 먹은 경종이 고통을 호소하자 이번에도 어의들의 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삼과 부자를 올리게 하였다. 결국 경종은 다음날 새벽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승하하였지. 그렇기에 반군들은 경종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흰색 군복을 입고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곡(哭)까지 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그 후에도 경종의 독살설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나돌았고, 이로 인해 영조의 의심증은 깊어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
이인좌의 난 이후 이인좌에 가담하였던 청주지역의 남인과 소론들은 몰락하고, 의병을 일으킨 노론의 가문들은 이후 ‘낭성팔현’으로 지칭되며 청주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이 되었다.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기록된다던가? 그러므로 저기에 서있는 무신창의사적비도 이들 입장에서는 의를 일으킨(倡義) 것이지만, 반대의 입장에서는 달리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조선은 점차로 노론의 장기집권으로 나아가면서 주자학에 조금만 이의를 달아도 사문난적으로 처단하고, 오로지 망해버린 명나라만을 생각하며 자신이 소중화라는 아집에 사로잡혀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결국은 일본에게 나라를 내주고 말았지.
사적비를 지나니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詩碑)도 있다. 김시습이 상당산성을 찾아왔다가 ‘산성에서 놀며(遊山城)’이란 시를 남긴 것이다.
꽃다운 풀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방초습망구, 芳草襲芒屨)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신청풍경량, 新晴風景凉)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물었고 (야화봉삽예, 野花蜂唼蘂)
살진 고사리 비 갠 뒤라 더욱 향긋해 (비궐우첨향, 肥蕨雨添香)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망원산하장, 望遠山河壯)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등고의기앙, 登高意氣昻)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막사종석조, 莫辭終夕眺)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이니 (명일시남방, 明日是南方)
김시습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분노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전국을 떠돌던 중이라 시의 마지막에서는 내일이면 또 남방으로 떠난다고 하고 있구나. 아까운 천재 김시습, 그는 이 시를 쓰고 난 후 이곳을 떠나 남방 어디로 갔던 것일까? 이제 성벽을 따라 돌기 위해 남문으로 접근한다. 유치원 꼬마들이 남자 아이, 여자 아이 사이좋게 짝을 지어 손을 꼭 잡고 나를 지나쳐 내려간다. ‘어휴! 녀석들!’ 나도 모르게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손이 움찔한다. 가만있자. 주위 친구들 중에 벌써 손자 본 녀석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제 나도 손자 본다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으~음~~
상당산성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의 패장(敗將)인 원균이 이 상당산성에서도 근무하였다는군. 원균은 이곳에 근무할 때에 산성을 보수하면서 부역자들의 원성이 자자할 정도로 강도 높게 보수 작업을 하였단다. 선조는 그런 원균을 눈여겨보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라 한다. 지금이야 육군과 해군이 나눠져 있지만, 당시는 육군과 해군을 왔다 갔다 하였지. 원균과 대비되는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이순신 장군도 함경도 만호를 거치지 않았는가? 일하는 사람이야 어찌되건 말건 그냥 자기가 목표삼은 것은 밀어붙이는 데서 원균의 우직함을 본다. 무릇 장수는 전체를 크게 보고 앞을 내다봐야 하는데, 원균의 이런 우직함이 칠천량 해전에서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군을 모두 수장시키는 참패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남문으로 향하는 앞은 상당산성을 복원, 정비하면서 넓은 풀밭으로 깨끗하게 조성하여놓았다. 원래부터 풀밭은 아니었을 것이고, 원래 이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아무튼 휴일이면 이 풀밭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걷거나 뛰어다니며 산성의 기운을 느끼리라.
공남문(控南門) 앞에 섰다. 안내문을 보니 상당산성은 그 명칭이 백제시대 상당현과 역사적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레가 4.1Km, 내부면적이 726,000평방미터에 달하는 전형적으로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백제 때부터 토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청주읍성에 병마절도사가 있지만, 그 배후인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兵馬虞候)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는군.
그런데 상당산성을 돌 때에는 모르고 지나쳤지만, 이곳 공남문 오른쪽 성벽에는 양덕부(梁德溥)라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숙종 46년(1720) 당시 산성 개축공사 책임자였다는데, 공사 실명제로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인가? 양덕부는 또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 기생 월례와 함께 성문을 열어 반란군이 손쉽게 성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성벽을 따라 오른다. 나타나는 안내문은 야생동물의 먹잇감이 부족하니 도토리 및 야생열매를 채취하지 말라는 것. 이런 안내문이야 산에 가면 많이 보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하나 더하여 먹잇감이 부족하면 멧돼지 및 야생동물이 도심에 출현하는 원인이 되니 채취하지 말란다. 그렇겠다. 가끔 도심에 멧돼지가 출현하여 소동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애네들이 먹잇감이 풍족하면 굳이 사람들 사는 도심까지 나오려고 하지 않겠지.
남암문 앞에 오니 것대산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것대산? 이름 한 번 특이하네. ‘것대’라는 것은 순수 우리말 같은데 무슨 뜻일까? 것대산이라는 이름을 보면 다들 이런 의문을 가질 텐데, 청주시에서 친절하게 그 유래까지 안내해주면 더 좋지 않을까?
것대산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이 봉수대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 있다. 것대봉수의 봉수지기 목씨 노인은 선이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봉화대를 돌보고 있었다. 선이는 자라면서 백룡 총각과 정혼을 하였으나, 홀로 남을 아버지 생각에 시집갈 날을 이리저리 미루고 있었다. 이 무렵에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성을 점령하러 오면서 우선 봉화를 올리지 못하도록 것대봉수를 습격하여 목노인을 죽인다. 이때 선이는 청주장에 나간 백룡을 기다리느라 고개마루에 나가 있었는데, 병사들이 집으로 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돌아가다가 병사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다.
선이는 곧바로 봉수대로 달려가 불을 지펴 연기를 올리는데 병사들은 선이마저 죽인다. 이 때 장에서 돌아오던 백룡은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고 달려왔다 선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눈이 돌아 반군 병사에 달려가 격투 끝에 이들을 죽이고 봉수대에 불을 활짝 지펴 청주에 반란이 일어난 것을 알릴 수 있었단다. 이인좌의 난 때문에 이런 슬픈 전설이 생겨났구나.
성벽 위로 걷자니 눈앞을 방해하는 것들 없이 청주시가지와 시가지 너머 무심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미호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여기에 산성을 쌓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능선이 뻗어 내려간 앞에 솟은 산은 우암산이다. 저 우암산 건너편 기슭에 수암골이 있지. 공공미술가들이 통영 동피랑 마을처럼 수암골 골목 골목마다 벽화를 그려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수암골을 보러 오고, 그러다보니 ‘제빵왕 김탁구’의 제과점 세트도 수암골에 섰다가 드라마 끝나고도 빵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군.
가다보니 성벽 밖으로 돌출한 치성(雉城)도 보인다.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지은 수원 화성은 평상시 경계를 설 때에는 사각(死角)이 생기지 않도록, 또 전투시에는 적을 조총이나 화살의 유효 사거리 내에 두도록 계산을 하여 치성을 두었다는데, 이곳은 암만 보아도 군데군데 적당한 곳에 그냥 치성만 돌출시킨 것처럼 보인다.
높이 491.2m의 상당산에 섰다. 491.2m이면 제법 높이가 있는 산이지만, 출발 지점이 이미 꽤나 높이 올라온 곳이라 그냥 성벽 따라 야산 올라온 기분이다. 계속 성벽을 따라 가는데, 나타나는 팻말에는 이리 가면 동문(鎭東門), 저리 가면 서문(弭虎門)이라고 하면서, 지금 팻말이 서 있는 곳이 한남금북정맥임을 밝힌다.
뭣이라? 이것이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한남금북정맥의 줄기란 말인가? 속리산을 출발한 한남금북정맥은 보은에 구봉산, 상당산성 바로 앞에 선도산 등을 내려놓고, 상당산성을 거쳐서는 괴산에 좌구산, 음성에 보현산 등을 내려놓고 안성으로 향해간다. 그리고 안성의 칠장산에서 갈라져 금남정맥은 남서쪽을 향해, 한남정맥은 북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지. 5년 전에 칠장산에 오르면서 금남정맥과 한남정맥이 갈라지는 지점에 서서 감회에 잠겨 3군데 정맥 줄기를 바라보았었는데... 지금 여기서 계속 정맥을 따라가면 언제 칠장산에 도달할까?
내려가다 잠시 쉬는데 앞에 떨어져 있는 밤송이 위로 햇빛이 숲속 나뭇잎들을 뚫고 들어와 밤송이만 환히 비춰준다. 마치 밤송이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밤송이가 익을 대로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를 ‘아람’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무언가 충만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운동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새벌 손동진 선생님으로부터 아람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당장 ‘아람’을 내 호로 정했었지. 요즈음은 누리집에 회원 등록하려고 ‘aram'이라고 치면 이미 등록되어 있는 아이디라고 할 정도로 아람이 너무 흔해져버렸지만...
‘아름답다’와 ‘아람’도 같은 말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은 이렇게 무르익어 충만한 상태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지. 아름다움은 한자로는 ‘美’다. 美라는 것은 羊이 크다는(大) 것 아닌가?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음식이 먹음직스러운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니, 미적 감각은 우리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가위(추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곡식이 무르익은 가을밤에 보름달이 밤하늘 한가운데에 높이 떠 온누리를 비추는 것을 보며 추수 감사 축제의 용어를 생각하였는데, 한자의 ‘秋夕’은 단지 ‘가을 저녁’이란 얘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이 또한 ‘한가위’가 ‘秋夕’에 비하면 비할 데 없이 생각의 깊이가 있는 철학적인 말이라 할 것이다.
땅에 떨어진 밤송이를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다시 일어섰다. 미호문을 지나고, 동암문을 지난다. 미호문은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겨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나? 그래서 성문 이름도 호랑이를 그치게 한다고 미호문(弭虎門)이라 지은 것인가? 성벽 일주의 마지막은 동장대이다. 장대(將臺)이니 전쟁이 나면 병마우후는 여기에 서서 지휘를 하려나? 그런데 동장대의 현판은 보화정(輔龢亭)이라고 되어 있다. 화합되도록 도와주는 정자라... 전투 지휘를 하는 장대의 현판이 보화정이라고 하니까, 어째 서로 잘 맞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나, 그만큼 우리 선인들은 전투에 임해서도 화합을 생각하였다는 것이 아닐까?
옆에 돌에 새긴 보화정 재건기를 보니 보화정은 영조 19년(1743)에 지어졌다가 세월이 지나며 무너져 내린 것을 1992. 12.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輔和亭’ - 현판에는 龢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에는 和라고 되어있네? 뜻이 같아 통용하나보다 - 이라고 이름 짓게 된 것은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 하늘의 때도 지리적 이점만 못하고, 지리적 이점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 아무리 하늘의 때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과의 화목에 실패하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보화정을 지나니 곧이어 남문까지 계속 이어져야 할 성벽은 여기서 그만 멈춰 선다. 아직 완전히 복원이 안 되었다는 얘기인데, 나중에 성벽을 완전히 이을 계획이 있는 것인가?
성벽에서 물러나오니 앞에는 저수지와 산성 마을이 평화스러운 정경을 펼치고 있다. 그 너머로 내가 돌아내려온 성벽들이 멀리서 산성 마을을 감싸고 있다. 저수지 쪽에는 원래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1943년 홍수로 유실되고 난 후 저수지를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산성 안의 땅이 친일파 민영휘 일가의 땅으로 등기되어 있었단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많은 땅을 환수하였지만 아직도 분쟁중인 모양이다.
하여튼 청주 재판 온 김에 짬을 내어 벼르던 상당산성을 일주하고 나니 미뤘던 숙제를 해치운 듯 가슴은 흐뭇하다. 이 흐뭇한 기분으로 걸어가는데, 상당산성은 아직 하나의 구경거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언덕 위의 달’이다. 일본 작가 요시니타가 2009년 청주국제 공예비엔날레 때 출품한 작품이라는데, 계속 이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요시니타의 달을 쳐다보며 나의 발걸음은 계속 상당산성을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