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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9곡 안에 솟아오른 도명산

작성자양승국|작성시간12.02.05|조회수130 목록 댓글 3

화양9곡 안에 솟아오른 도명산

 

2012년 흑룡의 해의 첫 산행! 우린 화양9곡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화양계곡에서 바로 솟아올라 화양9곡의 아름다움과 늘 함께 하는 도명산을 어울사랑의 회원들과 함께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화양9곡 하면 이곳에 은거한 우암 송시열 선생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그런데 화양계곡의 수많은 절경 중에 유독 9군데에만 이름을 붙여 화양9곡이라 하는가? 우암을 비롯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제일 존경하는 학자가 송나라 주희 선생 아닌가? 주희가 무이산에 은거하면서 무이계곡의 아홉 군데 절경을 무이구곡이라 하였기에, 화양계곡에도 이를 따라 화양9곡이 생겨난 것이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가는데 먼저 맞이하는 것은 성황당이다. 성황당이라 하여 조그만 당집이 세워져 있는 것은 아니고, 나뭇잎 하나 없이 그대로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 오래된 나무 앞에 둥그런 돌탑이 쌓여있다. 이곳 주민들이 이곳에서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지라, 돌탑을 두르고 있는 새끼줄에는 군데군데 울긋불긋 헝겊이 끼어져있다. 안내판의 사진에는 이런 헝겊들이 돌탑을 돌아가며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저 사진을 보자니 작년 여름 티베트를 누비면서 숱하게 보았던 룽다와 타르초가 생각난다. 룽다에는 불경이 깨알 같이 적혀있는 것이 여기 성황당의 헝겊과는 다른 점이지만 기원을 담아 헝겊을 매단다는 것은 똑같이 경건한 믿음의 발로이리라.

안내판을 보니 화양9곡중 제1곡 경천벽(擎天壁)은 계곡 초입에 있어 이미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와버렸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타고 들어올 때 유심히 밖을 쳐다볼 걸. 경천벽이라면 하늘을 떠받드는 벽이라는 얘기이니 아마 물가에 우암의 눈길을 확 끄는 절벽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영하 10도 아래까지 내려가는 날이라고 하더니 계곡을 따라가는 길에 내렸던 눈은 길 위에 바짝 얼어 붙어있다. 영하 10도라지만 바람이 없으니 오히려 피부에 와 닿는 공기는 잠에 눌려있던 내 흐릿한 정신을 각성케 할 정도로만 나를 어루만지니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한파가 올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 계곡에 사람의 그림자를 덜 비치게 하니 발길은 가볍기만 하구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이곳저곳에 안내문은 많이 걸려있다. 여유롭게 안내문도 쳐다보며 가다보니, ‘화양동’ 이름 유래에 대해 쓴 안내문도 얼른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화양계곡에는 황양나무(회양목)가 많아 황양동이라 불렀는데, 우암이 중국을 뜻하는 화(華)와 일양래복(一陽來腹)의 양을 따서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뼛속까지 중화주의에 물든 우암답다고나 할까?

 

다리를 건너 계곡 건너편으로 넘어가 걷자니 이번에는 왼편으로 나타나는 계곡은 2곡인 운영담이다. 운영담(雲影潭)이라... 이곳 소(沼)에 구름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며 운영담이라 이름 지었나? 그런데 지금의 운영담은 우암 때의 운영담보다 훨씬 커져버렸다. 보(洑)를 만들어 물을 가둔 것이다. 그만큼 한 번에 이곳에 얼굴을 비치는 구름 친구들이 더 많아진 것인데, 지금은 하얀 눈 양탄자가 얼어붙은 운영담을 덮고 있으니, 운영담 가까이의 나무들만 자기 그림자를 눈 위에 비추고 있을 뿐.

운영담을 지나니 3곡인 읍궁암 또한 눈이불을 덮고 조용히 누워있다. 읍궁암(泣弓岩) - 우는 활의 바위라... 효종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함에, 우암이 새벽마다 이 바위에서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읍궁암이라고 한단다. 가만있자... 아무래도 읍궁암은 우암이 이름 짓지는 않았겠지? 고매하신 유학자가 자기가 여기 와서 그렇게 울었노라 사람들에게 광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우암은 효종을 도와 북벌을 계획하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과연 우암은 북벌을 실행에 옮길 생각을 하였을까? 혹시 ‘북벌’이라는 것은 하나의 집권 명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암은 현실적으로 북벌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임금의 나라 명을 멸망시킨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로 상종할 가치도 없는 나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명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이상, 이제 그 중화(中華)를 유지해나가야 할 책임은 우리나라에 있다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우암은 효종과 같은 ‘북벌’을 외쳤지만, 우암은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의리로서 섬길 수 있는 군사력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제한적 북벌론자였을 뿐이다.

 

우암이 그런 사대주의자이었기에 우암의 제자들은 우암의 유지를 받들어 1704년에 이 화양동 계곡에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모시는 만동묘도 세웠다. 마침 만동묘와 우암을 모시는 화양서원 앞을 지난다. 그러나 내려올 때 차분히 보기로 하고 그대로 지나치니 나타나는 것은 금사담과 계곡 건너편 바위 위의 암서재. 4곡인 금사담(金沙潭)은 금빛 모래가 빛나는 못이라 하겠는데, 지금은 하얀 눈 속에 묻혀 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가만있자... 내가 대전 공군교육사령부에 근무할 때 인택이 아저씨네랑 이곳에 놀러왔었으니, 그때가 26년 전 여름이었던가? 오래 전에 생각 없이 여길 왔으니 과연 이곳 모래가 금빛으로 반짝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암서재(巖棲齎)는 바위 위에 있는 서재라는 뜻일 테니, 우암이 저 서재에서 독서와 학문을 하였으리렸다? 저곳에서 제자들도 가르쳤을 것이고... 암서재를 보다보니 그 옛날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고시공부 한다고 봉영사에 들어갔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한 여름의 더위에 나는 책상을 들고 계곡 물가로 내려가 법서(法書)를 펴들었었지.

머리를 위로 드니 도명산 품으로 좀 더 들어간 숲속 절벽 위에 바위가 4층으로 쌓여있다. 5곡인 첨성대(瞻星臺)다. 저 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라고 하였단다. 경주 첨성대를 생각하고 이름 지은 것이군. 그런데 과연 누가 저 위에 올라가 천체를 관측한 사람이 있을까? 첩첩이 쌓인 바위와 밤이면 그 위로 쏟아질 것은 별들을 보며 첨성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도명산 올라가는 등산로가 시작된다. 그런데 선두가 이쪽 첨성대 계곡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리를 건너 능운대 쪽으로 가고 있다. 내가 뛰어가 첨성대 쪽으로 가자고 하니 ‘산들바람’의 송봉화 선생은 길이 미끄러우니 가파른 첨성대쪽 길보다는 학소대 쪽으로 오르잔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송선생은 사진을 찍기 위해 화양동 계곡과 도명산을 수십 번 들락날락 하였을 테니, 내가 달리 이견을 달 수 있겠나? 하산로가 등산로로 바뀌어버렸네.

6곡 능운대는 한 쌍의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凌雲臺)라고 한다는데, 뭐~ 기세가 늠름하긴 하지만 겨우 요 정도 키로 구름을 찌를 듯 할 것까지야... 또한 7곡 와룡암은 용이 누워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하여 와룡암(臥龍岩)이라는데, 와룡암 위로 눈들이 덮여 있으니 그 꿈틀거리는 모습은 느낄 수가 없다.

이제 다리를 건너 도명산으로 오르기 위해 학소대쪽으로 접근하는데, 다리 앞에는 한 시가 바위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고심(搞心)? 교심(橋心)? 橋心이라고 해야 말이 될 것 같은데,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꼭 搞자 같다. 그러나 여기에 생뚱맞게 ‘옆으로 치다, 서로 다르다, 하다’ 등의 뜻을 가진 ‘搞’자를 새겨 넣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하여튼 시를 음미해보자.

 

太古의 神秘를 안고

季節따라 몸단장하며

님 기다리는 道明山

나는 그녀가 뿜어주는

山 香氣 개울바람 마시며

수정알 같은 냇물에 발 담고 서서

그의 님 기다린다.

아 그러나 내 마음 두렵구나

누가 이 길을 건너갈까

저 청순한 女人의 품 같은 계곡 속으로

행인아 고이 다녀오소

흰 구름 산허리 스쳐가듯

봄 향기 여인의 옷자락 스쳐가듯

 

 

계절 따라 몸단장하며 님 기다리는 도명산이라... 시 말미에는 경오년 여름에 衿熙의 글을 未山이 썼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누구일까? 예 시인의 당부대로 고이 다녀오리다. 흰 구름 산허리 스쳐가듯, 봄 향기 여인의 옷자락 스쳐가듯... 그러고보니 이런 당부의 詩語를 보더라도 아무래도 제목은 橋心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다리를 건너면서 왼쪽으로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절벽은 굳이 안내판이 없더라도 근처에 그 아름다움을 견줄 다른 臺가 없는 것으로 보아 8곡 학소대(鶴巢臺)가 틀림없으리렸다. 학소대 위에는 소나무들이 바위 절벽치고는 제법 많이 모여 생활하고 있다. 저 소나무들 위에 학이 둥지를 틀었기에 학소대라고 하는 모양이지? 11:34 이제 본격적으로 도명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첨성대 쪽으로 오르면 시작부터 가파른 등산로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이쪽은 송작가 말마따나 등산로가 순하다.

12:40경 마애 삼존불상 앞까지 왔다. 우리나라 산을 다니다보면 반반한 큰 바위면에 부처님을 새겨놓은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다가가며 부처님을 새겨넣을만한 바위로구나 생각했더니 어김없이 이곳에서도 부처님을 만난다. 충북 유형문화재 140호로 지정된 불상인데, 바위 속에 새겨진 불상중 키다리 부처님은 키가 14m나 된단다. 설명에는 고려 초기에 유행한 선각(線刻) 마애불상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텨와서인가 어느 부위에서는 새겨진 선이 희미해져가고 있다.

1:15경 드디어 해발 642m의 도명산 (道明山)정상에 섰다. 겨울 산 정상에서는 칼바람을 맞기 십상인데 오늘은 여기에서도 바람은 잔잔하다. 도명산은 우리가 오는 날에 좋은 날씨를 준비해주었구나. 도명산은 정상석(頂上石) 위로도 조그만 바위 봉우리 하나를 더 얹고 있어, 나는 스턴트맨 이소장을 따라서 그 위까지 올라보았다. 이거 뱁새가 황새 따라 가다간 큰 코 다친다던데, 객기를 좀 부려보았다. 역시 그 위에 올라가니 사방이 탁 트인다.

 남쪽으로 낙영산과 조봉산이, 그 너머로 덕가산과 금단산이, 다시 그 너머로 속리산의 묘봉과 상학봉이 보이고, 몸을 뒤로 하니 우리가 올라온 화양동 계곡이 가로로 길게 지나가고 있다. 낙영산 왼쪽 너머로는 백두대간이 달려가는 대야산과 조항산도 보인다. 4년 전에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저 대야산에 올라 이쪽을 바라보았는데, 오늘은 반대편에서 그쪽을 바라보는구나.

계속 정상에 서 있으니 슬슬 차가운 기운이 옷 속을 뚫고 들어온다. 이제 내려가야지. 그런데 송작가가 첨성대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른데다 눈까지 덮였다고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왕이면 새로운 길에 도전하고픈 사람이 있는 법. 하여 올라올 때는 한 팀이 되어 올라왔지만 내려갈 때는 두 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순간 갈등을 하다가 역시 새 길이 주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첨성대 쪽으로 붙었다. 역시 예상대로 길은 가파르다. 그러나 그만큼 가파르기에 계단과 난간이 잘 되어 있어, 오히려 내려가는 것은 편하다.

내려가면서 바위 하나를 도니 계곡 건너편으로 암서재 오른쪽 위로 채운사가 보인다. 옛날에는 규모가 작은 암자였는데, 여기서 보아도 최근에 확장한 절임을 알 수 있겠다. 도명산이란 이름도 저 암자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 도를 밝히 깨달았다는데서 생겼다고 한다. 어떤 스님이었을까? 그런데 원래 저 자리에는 환장암(煥章庵)이라는 암자가 있다가 사라졌고, 1948년 그 환장암 터에 채운사가 이사왔다고 한다. 환장사 하면 ‘환장하겠네’가 연상되는데, 이런 이름보다는 구름에 물든 절이라는 채운사(彩雲寺)가 훨씬 시적으로 좋다.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채운사가 구름에 물든 모습을 보고 싶으나, 지금은 지나가는 구름 한 점 없다.

2:47경에 아까 첨성대 입구에서 계곡 건너가던 다리까지 와 한 바퀴 도는 원점을 찍는다. 다리 건너편으로 학소대 쪽에서 오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나 학소대 쪽으로 내려간 우리 일행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직도 산속에서 내려오고 있음이 틀림없어 우리는 먼저 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한다. 2:58경에 화양서원 앞에 도착하였다. 자! 이제 아까 미뤄두었던 화양서원과 만동묘로 들어가보자.

화양서원 하면 나는 먼저 화양묵패(華陽墨牌)가 떠오른다. 화양묵패란 묵패에 화양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언제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고 써서 보내는 일종의 고지서. 사적인 서원에서 보내는 것이니 도움을 바라는 요망서가 되어야겠지만, 이 묵패를 받은 이가 이를 거절하면 사원으로 끌려가서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기도 하였다. 화양서원이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祭享)한 서원이고, 더군다나 여기에 명나라 황제를 모신 만동묘가 있기에 이곳 유생들이 설쳐댄 것이다.

 

화양서원 뿐만 아니라 전국의 서원에서 크던 작던 이런 행패가 심하였는데, 오죽하면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이런 서원의 행패를 "서원을 책임지는 자들은 묵패를 이용, 평민을 잡아다가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빼내니, 남방의 좀이라 불렀다."고 표현하였을까? 흥선 대원군도 한량으로 전국을 떠돌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묘지기에게 봉변을 당했었지. 그러니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겨두고 모조리 없애버렸고, 화양서원에 대해서는 노론이 강력하게 반대함에도 기어이 철폐하였지.

 

이렇게 밉상이 든 화양서원이기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반란군은 청주로 진격하는 도중에 화양서원으로 쳐들어가 우암의 영정을 훼손하려고 하였는데, 사전에 이를 눈치 챈 제자들이 우암의 영정을 도명산 미륵암으로 옮겨 화를 면할 수 있었다나?

 

서원 제일 위에 모셔진 만동묘로 오른다. 만동묘(萬東廟)라는 이름은 물이 만 번을 꺾여도 필히 동쪽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럼 만절필동이라는 4자성어는 또 어디서 왔을까?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가 물을 보고서 느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는 ‘其萬折也必東 似志’라고 답했다. 중국의 지형상 중국의 강은 이리저리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만절필동이란 충신의 절개를 뜻하는 것이라, 중국 황제를 모시는 이 묘에도 만동묘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만동묘로 오르는 계단은 좁고 가팔라 몸을 옆으로 하여 조심조심 오른다. 계단을 왜 이리 만들었을까?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운 명나라 신종과 휘종을 모신 곳이니 조심조심 올라오라는 것인가? 황제묘를 향하여 오르는데 정면으로 묘를 보며 오르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만들었나보다. 그런데 만동묘로 들어가는 성공문은 잠겨있어 밖에서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 황제를 굳이 이곳에서 모실 필요가 있었나? 필요가 있었다면 소중화 사상으로 무장한 노론의 양반들이 자기들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겠지.

그런데 만동묘 앞의 묘정비(廟廷碑)는 비문의 글씨를 통 알아볼 수가 없다. 일제 시대 때 일제가 이곳에서의 제사를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림에서 몰래 제사를 지내자 1937년 이들을 체포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의 글씨는 징으로 쪼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일제는 심지어 1942년에 만동묘를 철거하여 괴산 경찰서 등을 짓는데 사용하고, 묘정비는 땅에 묻어버렸었다. 으~음~~ 만동묘가 모화사상의 달갑지 않은 유적이긴 하지만, 남의 문화재는 안중에도 없는 일제의 만행은 입술을 지그시 물게 하는군. 일제는 여기서 가까운 청주읍성도 4대문 하나 남겨두지 않고 철저히 파괴하지 않았나.

만동묘의 가파른 계단을 다시 조심조심 내려오니 송시열을 모시는 사당은 내려오면서 오른편에 있다. 아무리 송시열이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거두로 ‘송자(宋子’라는 별명까지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발 아래 있어야겠지.

화양서원을 나왔으나 학소대로 내려간 우리 일행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일행을 기다리느라고 화양서원 옆의 식당에서 막걸리에 목을 축인다. 식당주인이 같이 술 한 잔 나누고 있는 이영하씨를 알아보더니, 당장에 안주가 나오며 서비스가 달라진다. 작년 6월에 탈랜트 정한용씨와 같이 운길산을 오를 때에도 식당 주인의 서비스가 남달랐는데, 연예인이랑 다니면 이런 점이 좋다.

 

이윽고 기다리던 일행들이 연락을 받고 식당 안으로 들어온다. 모두들 한자리에 둘러 앉아 가득 부은 막걸리 잔을 들고 새해 첫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에 건배! 시원한 한 잔 술에 배를 깨우고 우리는 ‘산들바람’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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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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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황경애 | 작성시간 12.02.05 임진년 어울사랑 첯산행 화양계곡의 절경과 도명산의 정기 받아 우리모두는 양변호사님의 해박하신 해설과 함께 즐겁고 상쾌한 산행 이였자요 이기행문을 대하게되니 감회가 새롭워 지는군요 함께 동행하신 분들 폼나게, 함께 못하신분 부럽게 단체기념사진도 첨부해 주시면.............이병욱
  • 작성자6473 | 작성시간 12.02.05 도명산 화양계곡에 푹 빠지셔서 - - - 자정을 넘기시면서 ~ ~ ~ 넘 멋집니다.
    아자아자 파이팅!
    충남 서산에서
  • 작성자양승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06 제 사진기로는 단체 사진을 찍지 않았기에 저는 단체 사진을 갖고 있지 않아 첨부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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