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안식처, 키나발루산
I. 첫날
2012. 2. 15. 오후 3시. 비행기 유리창으로 동지나해를 끼고 있는 코타키나발루 시가지의 올망졸망한 건물들이 들어온다. ‘덜컹’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는 소리. 이제 곧 비행기 문을 열고 나가면 불과 5시간 20분 전의 추운 겨울에서 열대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캡 동기3명과 어울사랑의 이교수님, 이소장과 함께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는 보르네오섬, 그 섬에서도 동북쪽 끄트머리에서 솟아오른 해발 4,095.2m의 키나발루산을 오르기 위해 이 열대의 나라에 불쑥 발을 들이미는 것이다.
비행기 트랩 밖으로 나선다. ‘어? 생각보다 덥지 않네?’ 코타키나발루가 북위 7°의 열대지방인데다 아직은 우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들었기에, 문을 나서는 순간 열대의 뜨겁고 칙칙한 기운이 나를 감싸 안을 줄 알았는데... 이동하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시내 풍경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나 말레이시아 전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2차 대전 때 격전지가 되면서 연합군의 공습으로 시가지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더니, 폐허 속에서 과거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나보구나. 거리에 보이는 대부분의 간판은 영어와 한자가 나란히 하고 있다. 한자가 많다는 것은 화교가 많다는 것인데, 실제로 코타키나발루의 주민중 화교가 4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와 한자는 보이는데 말레이시아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말레이시아는 고유 문자가 없어 영어를 빌려 쓰고 있는 것인가?
시내를 벗어난 차가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키나발루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오늘밤 우리가 머무를 메실라우 리조트는 해발 2,000m에 자리하고 있으니, 키나발루의 그 깊은 품속까지 어찌 한걸음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오르던 도중 차가 잠시 멈춰 선다. 키나발루의 품속으로 더 빠져들기 전에 키나발루의 멋진 얼굴을 보고자 함이다.
전망대 위로 올라서니, 키나발루는 하얀 구레나룻을 휘날리듯 턱밑에 흰 구름을 두르고 멀리 한국에서 온, 아직은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 낯선 손님들을 빙긋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키나발루란 말이 영혼의 안식처란 뜻이라는데, 과연 저렇게 구름 위로 솟은 곳에서는 영혼도 쉼을 얻을 수 있겠다. 저런 모습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소중히 등재된 것일 테고... 이제 내일 아침이면 나는 저 구름 위 영혼의 안식처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겠지? 전망대를 떠난 차는 여전히 오르다가, 저녁 어스름해서야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2,000m까지 올라왔지만 리조트 주위로는 여전히 짙은 숲이 둘러싸고 있다.
II. 둘째 날
아침 8시 메실라우 게이트 앞에 섰다. 구태호 가이드가 게이트 앞의 등산 안내도 앞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등산로와 우리들 앞에 나타날 쉼터와 산장에 대해 설명한다. 이제 드디어 오르는가? 우리는 약간 긴장된 몸짓으로 게이트를 통과한다. 가이드가 우리보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든다. 우리 힘만으로 키나발루를 오를까? 키나발루가 그런 무례함을 허락하진 않겠지. 여기서부턴 현지 가이드 알렉스 고하민이 우리를 안내한다.
우기에 듬뿍 빗물과 영양분을 섭취한 숲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고, 꽃들도 바야흐로 생명의 아름다움이 한껏 올라와 있다. 짙은 숲의 잎새들을 헤치고 들어오면서 조각난 햇빛이 하얀 꽃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니 꽃은 이슬을 머금고 배시시 웃는다. 무릇 생명의 경이와 아름다움이 키나발루의 따스한 가슴 속에서부터 품어 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 숲속을 걸어 들어간다.
옆으로 횡보하던 숲길이 내려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가다가 멈출 줄 알았던 숲길은 계속 내려간다. ‘어? 아직 올라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한데 이렇게 계속 내려가면 어쩌란 말이냐?’ 내 입이 더 삐죽 나오려는 찰나 길은 그 바닥점에서 키나발루의 생명수를 흘려보내며 다시 오른다. 꽃들은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유혹의 눈빛을 던지고 있다. 나는 녀석들을 아까보단 한결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며 또 다른 녀석을 찾고 있다.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한 녀석. 너? 그래 바로 너였구나. 꽃을 주머니 모양으로 피우고 있는 녀석은 주머니 가장자리를 치명적인 빨간색의 나선으로 두르고, 그 위에 모자를 들어 올리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식충식물 네펜데스다! 식물도감에서나 보던 식충이, 너를 드디어 눈앞에서 만나는구나! 조심스레 꽃 안을 들여다보니 맑은 물속에 작은 곤충들이 빠져있다. 저 작은 곤충 녀석들은 치명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저 맑은 물(소화액) 속으로 빠져들었나? 그 물에 자기 몸이 서서히 녹아드는 것도 모른 채? 순간 나도 저 치명적인 유혹에 못이긴 체하고 내 손가락을 저 물에 담가볼까 하다 멈칫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키나발루에는 이외에도 직경이 3m이고 무게가 2kg이나 나가는 세계에서 제일 큰 꽃인 라플레시아도 있단다. 라플레시아? 맞다. 세계에서 제일 큰 꽃이라 사진에서 많이 보았지. 꽃향기를 맡으려고 접근하면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는 그 꽃, 파리를 유혹하기 위해 악취를 풍긴다는 녀석이었지. 그러나 그 덩치 큰 녀석은 낯선 인간들을 피하여 공원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 있단다.
오후 2시경 라양라양에 도착하니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왼쪽 길에선 여러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 팀포혼 게이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다. 팀포혼 게이트가 메실라우 게이트보다 2km 짧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팀포혼 게이트에서 키나발루를 찾는다. 이제 오늘밤 머무를 라반라타 산장까지는 2km 남았다. 거리는 많이 단축되었으나 여기서부터 키나발루는 한층 고개를 쳐들고 있고, 그 동안의 메실라우 길의 한적함도 사라지고 우리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른다. 서양인들은 그 외모에서 금방 눈에 띄고, 중국인들은 그 시끄러움에서 금방 눈에 띄고, 우리네 동포들은 반가운 우리말소리에 금방 눈에 띄고... 어딜 가나 한국 사람들은 많군.
같이 오르는 사람들 중에는 산장까지 짐을 나르는 짐꾼들도 있다. 그런데 앞에 걷고 있던, 짐으로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덮고 오르는 짐꾼을 추월하면서 보니 여자다. ‘아니? 이렇게 크고 무거운 짐을 여자가?’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런 가냘픈 여자도 강인하게 만드는 것인가?
힘든 길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목적지는 나타나고야 마는 법. 4시에 드디어 해발 3,273m의 라반라타 산장에 도착하였다. 네팔의 롯지보다는 훨씬 시설이 좋은, 설악산 중청산장 정도는 되어 보이는 라반라타 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라운지에서는 각 나라의 산꾼들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는 느긋함으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박회장님과 함께 커피향을 맡는다. 커피가 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의자에 깊숙이 누인 내 몸 아래로 피곤함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이소장이 가이드에게 짐을 맡긴 채로 산장의 문을 힘겹게 밀며 등장한다. 아까 점심 먹을 때부터 고산병 증세를 보이더니... 의외다. 젊었을 때 스턴트맨으로도 활약을 하였던 강골의 사나이 이소장이 3,200m의 고도에 맥없이 주저앉을 줄이야. 역시 고산병은 체력하고는 상관이 없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구나. 고산병과 인연이 없을 이소장이 제일 먼저 고산병으로 고생을 하니...
저녁을 먹고 각자 배정된 침대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박회장님이 빨리 카메라를 가지고 아래층 라운지로 내려오란다. 박회장님이 이럴 때에는 틀림없이 뭐가 있다는 것. 1층으로 내려가 베란다로 나가니 노을이 지고 있다. 우리가 올라온 저 아래 세상을 보고자 하였으나 짙은 구름이 우리와 저 아래 세상을 갈라놓고 있다. 노을은 구름 위로 지고 있었다. 가끔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저렇게 구름을 적시는 노을을 내려다본 적은 있지만, 지상에서도 저런 노을을 내려다보기는 처음이다. 살다 보면 이런 경험도 하는 것이다. 내일은 새벽 2:30에 산행을 시작하여야 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저녁형 인간인 내가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잠이 올 리가 없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2층 침대에서 몸을 굴리면서 새벽을 맞이한다.
III. 셋째날
잠을 자는둥마는둥 하다가 새벽 1:50경에 일어난다. 밥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으나, 오늘의 고된 산행을 위해선 억지로라도 먹어야한다. 그런데 어제 산행을 단념하겠다던 이소장이 주섬주섬 짐을 싼다. 잠을 자고 나니 몸이 좀 괜찮아졌다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산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단다. 글쎄 괜찮을까? 여기 저기 준비된 팀부터 산장을 나선다. 우리는 2:40경에서야 산장을 나섰다. 정상을 향하여 긴 헤드랜턴 줄이 이어지고 있다.
3시에 키나발루의 목을 두르고 있는 철책문을 통과한다. 영혼의 안식처라 이렇게 철책문을 달아놓은 것인가? 영혼의 안식처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몸가짐을 다시 하게 된다. 눈앞에 나타나는 바위길. 바윗길에는 하얀 로프가 길게 위로 오르고 있다. 이 로프를 따라가면 정상이란다. 로프 옆을 따라 걷다가 암벽이 가팔라지면 로프를 잡고 오르고, 또 가파른 암벽을 옆으로 횡단할 때도 로프를 잡는다. 점점 숨이 차올 때 사얏트 체크포인트를 통과한다. 힘들더라도 정상 정복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도장은 받아야지.
앞서 걷다보니 일행들과의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어둠 속에서 4,000m를 통과할 때 안내표지판은 여기가 바로 4,000m 지점이니 힘내라며 정상을 향하여 어둠 속을 가리키고 있다. 혼자 오르다보니 자연 걸음은 빨라지려 하나 산소가 모자라는 이 높이에서 한국의 산처럼 걸음을 계속 빨리 놓을 수가 없다. 결국 벌러덩 나자빠지며 하늘을 바라본다. 열대의 별을 바라보고 싶으나 키나발루의 머리를 잔뜩 덮고 있는 구름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 그러나 아까보다 더 짧은 거리에서 다시 주저앉고 만다. 처음 키나발루에 올 때에는 히말라야에서 이보다 높은 곳의 베이스캠프도 가지 않았냐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같은 4,000m라고 다 같은 4,000m가 아니었다. 기울기를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었다. 베이스캠프까지 여러 날 완만하게 오르는 것과 이틀 동안 그보다 기울기를 높게 한 산 정상을 오르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헉헉, 헉헉... 킬리만자로는 여기보다 1,800m가 높다는데, 이거~ 킬리만자로는 포기해야겠군.”
눈 위로 마냥 암벽만 보이더니만 이윽고 키나발루의 정상인 로우봉(Low's Peak)이 바로 머리 위로 보이면서 날은 밝아온다. 날이 밝아오면서 줄을 지어 오르는 헤드랜턴의 불빛도 하나, 둘 꺼지고... 정상이 보이는 여기서 그냥 앉아 정상을 눈으로만 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잠깐 나를 유혹하나, 예서 돌아갈 수는 없는 법. 힘겹게 한 발, 두 발 위를 향하여 내딛으니 드디어 6:30경 로우봉에 올라서다! 로우봉이라... 이곳을 처음 오른 영국인 로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란다.
몇 년 전부터 키나발루 정상에 선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지. 그리고 마침내 머릿속에 그리던 그 정상에 섰도다! 벅찬 마음속에 사방을 둘러보나 온통 안개뿐. 아쉽다. 어제 올려다보던 전망대를 향하여 눈길을 보내고 싶고, 우리가 내렸던 코타키나발루 비행장으로도 눈길로 달려가고 싶은데... 혹시 잠시라도 하늘이 살짝 열릴 것을 기대해보나, 이젠 오히려 비까지 뿌리기 시작하네! 일행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나 아직도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까 언뜻 올라오는 것을 본 것 같은데?’ 빗발은 더 세지고, 계속 있을 수가 없겠다. 내려가면서 주위 사람들을 유심히 둘러보나 일행들은 여전히 보이지가 않는다. ‘이상하다. 먼저 내려갔나?’
비가 계속 뿌리니 단단한 바위에 어디 스며들데 없는 빗물은 기울기를 따라 흐르다가 서로 합쳐지며 조그만 도랑이 되어 내려간다. 마음속으로 조심해야겠다는 경보가 울리니, 자연 내 발걸음도 신중하게 조심조심. 비가 이보다 더 많이 계속 내린다면 작은 도랑은 중간에 건너기 힘든 개울이 되고, 폭포가 되는 것 아닌가? 계속 내리는 비로 산장까지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 점점 불어날 것만 같은 저 빗물을 보려니 그 말을 실감하겠다.
그런데 아까부터 바윗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도대체 흙을 밟아보지 못했다. 키나발루의 700m가 넘는 머리 부분은 커다란 바위 덩어리란다.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 망경대도 한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다고 하던데, 키나발루에 비하면 어린 아기 정도라 해야 하나? 키나발루의 이 거대한 바위 덩어리는 여기저기 양파가 벗겨지다 말듯이 판석(板石)들이 덮여 있다. 아마도 키나발루산 정상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마그마가 통째로 식어 화강암이 되었다가 오랜 세월 자기 머리 위의 퇴적암을 치워내고 지상으로 나왔을 것이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던 녀석이 지상으로 나오니 머리를 짓누르던 압력이 줄어들면서 표면은 부풀어 오르고, 비바람과 스며드는 빗물에 껍질의 돌들은 여기저기서 깨진 판석으로 남아있는 것이겠지. 그럼 지금 지나가는 옆에 길게 하얀 페인트 칠을 해놓은 것 같이 주위 바위 색깔과 전혀 다른 기다란 암석체는 무엇일까? 마그마가 식을 때에 또 다른 마그마가 긴 막대처럼 관입하면서 함께 식어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내려가면서 문득 뒤를 돌아본다. 올라올 때는 깜깜한 김에 멋모르고 올라왔지만, 올라 올 때 이 거대한 바위를 보면서 올라왔다면 그 위용에 지레 겁먹고 포기했겠다. 다시 체크포인트를 통과하면서 확인 도장을 받는다. 이제 키나발루산 정상에 섰음을 공인받았도다. 뿌듯함을 가슴 속에 담아 내려가는데, 저 앞에 일행이 보인다. 그런데 이소장은? 이소장은 결국 올라올 때 체크포인트를 통과하고 얼마 안 되어 포기하고 내려갔단다. 역시... 그런데 이교수님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내려오다 미끄러져 발을 다쳤단다. 큰일이다. 이 상태로 내려갈 수 있을까? 결국 이교수님은 산장까지는 김대표의 도움에 의지하여 어찌어찌 왔지만 산장에서는 포터의 등에 업혀 내려갔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다리가 접질렸겠거니 생각하였는데, 한국에 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이런! 골절이란다. 의사는 어떻게 이런 다리로 산을 내려왔냐고 한마디 하였다고... 10:30경 다시 라반라타 산장에 도착하였다. 후유~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하여 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아직 저 아래 세상은 구름 밑에 잠겨 있다. 11:57경 팀포혼 게이트와 메실라우 게이트가 갈리는 삼거리에 다시 왔다. 올라올 때는 메실라우 게이트에서 왔지만 내려가는 것은 팀포혼 게이트 쪽으로 향한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빗길이라 더욱 발 디디는 곳을 신경 쓰며 내려가는데, 키나발루에서는 등산로로 뻗어있는 굵은 나무뿌리에는 격자 무늬를 새겨 넣었다. 미끄러지지 말라는 배려이다. 호오~~ 이런 데까지 신경 쓰는 것은 처음 보는데? 가끔 국내산을 오르내리다 나무뿌리를 잘못 디뎌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팀포혼 게이트로 다가가니 아까 이교수님을 호위하며 따라 내려간 알렉스 가이드가 우리를 마중 나온다. 아니? 아무리 4명의 포터가 교대로 이교수님을 업고 내려갔다지만 우리보다도 훨씬 빨리 내려갔단 말인가? 이 사람들이야 익숙한 일이라 그렇다지만, 나중에 이교수님 얘기를 들으니 업혀서 내려가는 것도 고역이었단다. 더군다나 포터들이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는데, 빗길에 미끄러지면 이교수님까지 다치는 것이라 걱정이 많이 되더란다. 우린 이교수님이 다리 다쳐 편하게 업혀 내려간다 했더니, 업혀 내려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군.
그런데 팀포혼 게이트에 이르는 길은 그냥 쉽게 끝낼 수 있느냐며 막판에 오르막이다. 이거~ 마지막까지 편히 가라고 하지 않는구먼. 2:30경 드디어 팀포혼 게이트에 도착하였다. 후~유~~ 이틀간 키나발루의 빡센 산행을 마쳤도다. 감사합니다! 대기한 차에 몸을 실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은 그대로 철퍼덕 의자로 떨어진다. 키나발루의 품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니 내려가는 것 역시 한참 걸린다. 저녁을 먹고 산행의 피로를 풀기위해 발마사지를 받고, 바닷가의 마젤란 수트라 리조트의 객실 침대에 몸을 던지며 오늘의 일정을 접는다.
IV. 넷째 날
이틀간 산속에서 고생을 했으니, 오늘은 바닷가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자. 배를 타고 마누깐 섬으로 이동한다. 오늘은 편안하게 해양스포츠를 즐기라고 날씨도 좋다. 섬으로 가는 동안 어제 오른 키나발루산이 자기 몸 전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키나발루는 바닷물을 닮아 푸르른 색으로 물 위에 떠있다. 내가 저길 올라갔다 왔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해오는 가슴. 섬에 상륙하여 걸어가는데, 눈앞에 고철 덩어리를 의자에 올려놓았다. 2차 대전의 포탄 잔해였다. 전에 사이판에 갔을 때에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전투기를 보았었는데, 지금 저 바다 속 어딘 가에도 전투기나 군함이 가라앉아 있지 않을까?
나는 처음에는 여기까지 왔으니 스쿠버 다이빙을 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동지들이 응해주지 않아 혼자라도 하나 어쩌나 하며 망설이는 사이에 오전 스쿠버 다이빙은 예약이 다 차버렸다. 그렇다고 오후 다이빙을 할 수는 없다. 밤 11시 35에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잠수를 하고 나면 12시간이 지나야 핏속에 녹아있던 질소가 완전히 빠져나간다. 그런데 질소가 빠져나가기 전에 비행기를 탔다가 갑자기 낮아진 기압에 혹시라도 질소가 핏줄 안에서 기화하며 색전증이라도 걸리면... 사이다를 따면 갑자기 낮아진 압력에 공기방울이 생기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럼 무얼 할까? 나는 전에 몇 번 시도하다 바람 때문에 단념해야 했던 파라세일링을 해보기로 한다. 달리는 보트에 나와 박회장님을 실은 낙하산이 바람을 안고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늘에 둥둥 떠서 바람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이 상쾌한 맛. 그러나 전에 괌에서 스카이 다이빙을 해보았는지라 파라세일링은 좀 밋밋하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보트를 운전하던 녀석은 보트의 속도를 줄이면서 나를 바다에 빠뜨렸다 떠올렸다 한다. 녀석이 나를 갖고 노는구먼. 바닷물을 뒤집어썼지만 오히려 기분은 더 상쾌하다.
보트에서 내리니 맛있는 바비큐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 점심 후에는 꿩 대신 닭이라고 스노쿨링이다. 그런데 물 위에 떠서 물속의 고기 녀석들을 보는데, 이상하게 몸이 따끔따끔하다. ‘왜 이러지? 어제 너무 무리했나?’ 갑자기 이소장이 물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몸이 따끔따끔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이소장도 이상하게 몸이 따끔따끔하여 물속을 자세히 보니 콩알만 한 투명 해파리들이 자기 몸을 쏘고 있더란다. 이런! 몸통 큰 녀석들만 신경 썼더니 이놈들이 ‘나도 해파리’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구나.
해파리들의 방해로 더 이상 바다에 있을 이유가 없어 우린 다시 코타키나발루로 돌아와 시내 관광에 나선다. 첫 번째 들른 곳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는 30층 주청사 건물. 과연 건물 디자인은 독특하였다. 꼭 하늘로 발사하려고 세워놓은 로켓 - 다만 머리는 뭉툭한 - 같다고나 할까? 보기에는 좋지만 밑둥의 좁아진 받침 위에 다시 기다란 빌딩이 오르고 있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불안하기도 하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언뜻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주청사라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시립회교 사원으로 이동하였다. 말레이시아가 회교 국가이니 당연히 사람들에게 보일만한 회교 사원이 있겠지. 푸른색의 돔과 첨탑이 물 위에 내려와 흔들흔들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터키에선가 다른 회교 국가에도 유명한 푸른 모스크가 있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푸른색에 무슨 의미가 있나?
회교사원을 떠난 차는 오르막길로 오른다. 코타키나발루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시그널 언덕의 전망대로 향하는 것. 그리 높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망대에선 바다를 향하여 늘어선 건물들과 그 너머의 푸른 바다를 가슴에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전망대 기둥을 보니,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낙서가 빼곡하다. 낙서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는 어느 나라를 가나 비슷하군. 나는 혹시나 한국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있을까 살펴보나 한글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은 어디? 이게 전부란다. 코타키나발루는 그렇게 보여줄 것이 없나? 할 수 없이 우리는 한국교포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물건 좀 사주고 저녁 장소로 이동하였다. 작은 호수 위에 떠있는 수상가옥에 문을 연 캄팡 넬라얀 식당에선 공연도 한다. 우리가 먼저 도착하여 이곳저곳 사진을 찍는데 관광객들이 우르르 들어오고, 왁자지껄하는 관광객들의 말소리에선 어김없이 우리말도 섞여 나온다.
말레이시아까지 왔는데 말레이시아 전통의 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들의 민속공연으로 달랜다. 푸른색의 키나발루산이 공연장 뒤의 벽을 꽉 채우고 있다. 화교들이 많이 사는 곳이니 중국 춤도 있다. 공연 도중에 무희들이 갑자기 객석으로 내려오더니 관객들더러 같이 무대에 오르잔다. 이소장과 임상무도 이들을 따라서 무대에 올랐다. 간단한 시범 뒤에 관객들과 같이 도는 무희들. 마지막에 전 출연자들이 무대에 나와 춤을 추고 인사하면서 공연은 막을 내린다.
우리도 일어선다. 그리고 공항 도착. 이젠 정말 코타키나발루를 떠나는구나. 밤 11:35.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코타키나발루의 어두운 밤하늘을 박차고 떠오른다. 잠시 코타키나발루의 밤거리를 둘러보던 비행기는 이내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일로일로 북상한다. 어두움 저편 어딘가에서 키나발루는 우리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겠지? 고맙소이다. 영혼의 안식처에 우리들을 받아주어서... 살아가는 동안 당신의 품속에 머물렀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아가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