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대장경
goforest (2012.04.22)
넉넉한 봄비에
몸집 불리고
포만의 함성 지르는 물살
우람한 소나무 굽어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눅들게 하는 거대권력
벼랑은 억센 뿌리로 틀어쥐고
바람은 근육질 몸통으로 휘감고
봄 오는 계곡 장악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우주의 먼지로 사라진다는
허망한 생각 허물어 버리는 견고한 성
물과 흙 바람 긁어모아
추락을 거부하고
영원으로 상승하는 도도한 불길
승천하는 용 비늘같은 몸통
조각 조각 누벼진 역사
만질 수 없는 세월
포획해 놓은 시간의 가두리
누가 이 장엄한 생명을
그저 소나무라 하는가
핏기 없는 보통명사로
어떻게 저 풍요로움 담아내는가
내가 이름 붙여주리라
중력의 사슬도 끊어버리고
슬픈 엔트로피의 법칙도 부서버린
그대 이름은 푸른 대장경
@@@
세상은 천연색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삶은 무채색입니다.
시간표대로 궤도를 도는 전철같은 지루한 일상에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불현듯 배낭을 꾸려 떠나고 싶어집니다.
살벌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건, 폭우 쏟아지는 여름이건 계절에 아랑곳없이,
제 몸의 외연을 무한까지 늘여놓은 바다이건 중력을 거부하고 우뚝 솟은 산이던
어디라도 좋습니다.
오랜 세월, 가혹한 추위의 담금질을 견뎌내고 온갖 색깔로 눈물겨웠던 겨우살이를
토해놓는 꽃들의 향연이 벌어지는 봄에는 더욱 떠나고 싶어집니다.
하여 김용택 시인은
'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 손잡고 섬진강 봄 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라고 노래했습니다.
무작정 꽃 향기 번져오는 곳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은 봄, 남쪽 고을 함양으로 갔습니다.
덕유산과 지리산, 가야산, 반도의 남쪽에 자리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산들에 둘러쌓인
선비의 고장 함양 땅의 봄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볕을 긁어모았다는 함양에도 예외없이 꽃 소식이 질펀했습니다.
고속열차처럼 질주하지 않아도 젯트기의 속도로 살아내지 않아도 꽃은 그렇게
느릿느릿 제 속도로 야무지게 피어났습니다.
끝물에 다다른 벚꽃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고 막 벌어진 철쭉과 연산홍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도 주눅들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핏빛 몸통을 허공으로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몸피가 줄어들었던 화림계곡의 물살은 하루 종일 퍼붓는 봄비로 몸집을 불리더니
한 여름 장마철의 기세로 우렁우렁 거대한 바위의 몸통을 야무지게 훑으며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거칠 것 없는 물길이 수수만년 흘러내리면서 만들어 놓은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계곡 전체를 거대한 조각 전시장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세상 가장 정교하고 섬세한 물살의 조각칼들은 거칠었던 바위들을 이리 깎고 저리 다듬어
유순한 머슴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면서 사유능력이 없는 물살들이 과연 이런 멋진 피조물을 만들어놓을 수
있으리라 상상했을까요?
그 물살과 바위가 어우러진 계곡에는 온갖 기화요초들이 일제히 피어났고 뒤질세라
연두빛 새싹들이 이 나무 저나무에서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빨강, 노랑, 하양, 분홍, 연두....
이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무언가 쉴새없이 재잘대는 것 같았습니다.
권대웅 시인은 자연의 색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 때로 살다보면 우리들에게 색깔로 말을 거는 것들이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길에 선홍빛 색채로 번지며 말을 하는 노을, 비 개인 뒤 하늘 한 구석에
걸려 있는 일곱 빛깔 무지개, 흰색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주는 눈,
화랑에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 색채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는 것과는 달리,
자연이 표현하는 색깔들은
그 색깔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영혼에 위로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울긋불긋 꽃이 피고 초록 새싹이 돋는 숲에 들어가면 허둥대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탁했던 영혼이 시나브로 깨끗해지는 느낌이 드는 이유도 바로 이 죄없는 생명체들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영혼을 위로해주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바위도 벼랑도 계곡도 봉우리도 그리고 봄이 오는 숲 속에 든 나도 이 초록의 그물망을
빠져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상하 좌우 어디를 돌아봐도 초록 새싹 군단은 늠름하게 진군했고
화림(花林) 계곡은 글자 그대로 꽃과 나무로 둘러쌓여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계곡이었습니다.
이 계곡을 따라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담스런 정자를 짓고 음풍 농월하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기쁨을 맛보았겠지요
유홍준 선생도 최근 펴낸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함양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지어진 정자를
유려한 필치로 노래했습니다.
행하지 않음으로 행하는 자연과, 행하므로 행하지 않는 인간이 어우러지는 풍광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삶의 이데아가 아닐까요?
구불구불 이어지는 화림계곡을 따라, 거연정과 농월정, 동화정 같은 정자를 기웃거리며
봄의 숲속을 걷고 있을 때 거대한 소나무가 두 눈 가득 들어왔습니다.
수백년 세월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 화림계곡 벼랑에 우뚝 선 소나무의 장쾌한 자태에
나는 넋을 빼앗겨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몸은 주눅들었고 두 손으로 어루만져보니 그 몸통에서 전해져오는
투박하면서도 매끄러운 질감에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울진 소광리와 삼척 준경묘, 대관령과 하동의 소나무 군락.....
도처에 빼어난 소나무 숲이 많지만 단연 화림계곡의 소나무가 으뜸이었습니다.
어른 두 사람이 두 팔을 벌려 잇대어도 닿지 않을 만큼 우람한 몸통에는 수많은 세월의
조각들이 용의 비늘처럼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 비늘 하나 하나에 얼마나 많은 추위와 더위와 가뭄과 홍수가 농축돼 있을지요?
마치 라이프니츠가 사유한 '모나드의 창'같은 저 소나무 몸통의 창 하나 하나에는
얼마나 많은 물과 바람과 햇볕과 구름이 스며들어있을지요?
억센 뿌리로 벼랑의 바위를 틀어쥐고 굵은 몸통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친 줄기로
바람을 휘감은 소나무가 내게는 통치권을 거머 쥔 거대한 권력같았습니다.
봄이 오는 화림계곡을 완벽하게 장악한 황제말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의 역사를 제 몸에 아로새겨놓은 소나무에게 우리는 개체로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통명사인 '소나무'가 고작입니다.
세상 광활한 산에 들에 물가에 자라고 있는 수십억 그루의 소나무 하나 하나가,
사람이 그렇듯이 모두 대체 불가능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단 한번의 생애를 살고 있는
고유한 개체들인데 우리는 이 차이와 주체성을 무시하고 모두 소나무라고 싸잡아 부릅니다.
이 얼마나 무례하고 무책임한 언어 폭력입니까?
세상 모든 것을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서양 철학의 주류에 맞서 니체와 베르그송
화이트 헤드와 같은 일련의 철학자들은 이성적 사고에 질식된 생명, 그 생명의 끊임없는
운동과 생성, 그리고 질적 풍요로움과 개체의 다양성을 역설합니다.
핏기없는 사고와 메마른 언어의 틀에 갇혀 있는 인간은 이 찬란한 생명의 꿈틀대는 역동성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이들을 호명하는 단어는 판에 박힌 보통명사일 뿐입니다
탁월한 시인이자 사상가이신 고은 선생님도 현대 문명의 맹점을 이렇게 질타합니다.
" 근대 이래 추구해 온 인간학이라는 인문정신이나 저 르네상스로 싹튼 휴머니즘의 사상 따위에
어떤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의 존엄성을
타자화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언젠가 죽어 우주의 먼지로 돌아갑니다.
아니 살아있는 것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산도 바위도 결국에는 먼지로 돌아가고
지구도 태양도 무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존재도 거부할 수 없는 이 엔트로피의 법칙에 저항하는
용기있는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바로 진화하는 생명체들입니다.
수백년 중력의 하강을 뚫고 우람하게 자란 소나무는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존재입니다.
비록 육신은 백년을 버티지 못하지만 자손을 퍼뜨리고 그 자손에게 생존의 본능과 문화적
지혜를 유전자 속에 물려주는 인간도 유한하지만 무한한 존재입니다.
베르그송은 우주의 창조적 진화의 원동력을 바로 이같은 '생명의 약동' 이라고 했고
이 생명의 약동은 바로 '사랑의 약동'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거대한 소나무에서 우주의 창조적 진화를 보았고 생명의 약동을 보았습니다.
소나무에서 생명의 약동을 보는 것은 나만은 아닌 듯 합니다.
야만적인 왜구의 침탈에서 조선을 구한 사명대사는 청송사(靑松辭)라는 시에서
이렇게 소나무를 노래합니다.
" 오랜 겨울과 오랜 여름에도
그대는 푸르고 푸르구나
푸르름이여 소나무여
달빛이 그대에게 닿으면
그댄 그 금빛을 쪼개는구나
바람이 그대에게 오면
그댄 거문고로 새소리를 내는구나"
현대시의 거목 미당 서정주 선생도 곁에 두고 보던 소나무를
이렇게 예찬합니다.
" 그래 나는 이 소나무에 맞추어 자기를 조절하고 있다가 내 왼갖 약삭빠른 도피와 타협과 비겁을
자책하게 되고, 모든 비극과 절망과 막다른 사경에서도 넌지시 서서 견딜 성의와 용기를 배운다.
나도 잘 견디어, 역경을 살다 가신 우리들의 선인 선비들의 정신의 행렬에 넌지시 끼리란
마음이 겨우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화림 계곡에 당당하게 서 있는 소나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핏기없는 인간의 언어로 만든 보통명사 '소나무'가 아니라
이 장엄한 우주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소나무의 기상과 존엄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여 떠올린 것이 '대장경'이었습니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연기와 중도의 진리를 깨달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대장경,
이 소나무는 '푸른 대장경'이었습니다.
봄이 가고 녹음 무성한 여름이 오면 다시 화림 계곡의 대장경을
찾아가야겠습니다.
그때는 하루 종일 이 대장경 앞에 가부좌를 틀고 이 소나무가 들려주는
법문을 들어야겠습니다.
아니 그동안 묵언수행을 하느라 입이 근질근질해졌을 소나무의 연인이 되어
귀를 쫑긋 세우고 지난 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습니다.
험상궂게 내린 비,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 가지에 날아왔다 날아갔던 새들,
더러 둥지를 틀었던 새들,
푸른 솔잎에 걸쳤던 구름과 하늘, 숲 속을 지나며 한 마디씩 던지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몸통을 쓰다듬어주고 어깨도 다독거려주어야겠습니다.
이 험악한 세상 잘 살아주어 고맙다고!
@@@
(* 지난 주말 경남 함양의다볕자연학교에 머물면서 거닐었던 화림계곡의 봄 소식입니다.
어울 사랑 가족여러분! 새 봄 더욱 활기차게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