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떠오르는 산, 월출산
예전에 목포지원에 근무할 때였다. 보름달이 뜨는 어느 날 밤 차를 몰고 영암 월출산 옆의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문득 차창 옆으로 쳐다 본 월출산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물끄러미 월출산을 바라다보았다. 달 떠오르는 산, 月出山 - 그 이전에도 월출산 옆을 지나다니고 또 월출산 품속으로 들어가 월출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았지만, 이때처럼 ‘월출산’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하여 이번에 고교동기들이 달마산과 월출산을 1박2일(2012. 3. 24.-25.)로 간다고 할 때에 나도 달 떠오르는 산을 다시금 보고자 따라나섰다. 아침 8시 도갑사 바로 앞의 월출산장가든을 나선다. 어제 달마산을 오를 때에도 평년보다 낮아진 기온에 바람까지 더하여 고생했는데, 세월은 거꾸로 가려는지 어제보다 더 차가워진 공기가 우리의 피부 속으로 파고든다. 산장가든을 나서니 바로 앞에서 일주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아무리 숙박업소가 절 가까이에 절과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만, 이렇게 바로 산장을 나서자마자 일주문을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통일신라말 헌강왕 6년(880)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도갑사는 1457년부터 1464년(세조 3~10)까지 수미왕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당시 건물 규모가 966칸에 수행하는 승려가 78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로서는 이만하면 꽤나 큰 절이었겠다. 일주문을 지나 또다시 만나는 문은 국보 제50호의 해탈문. 이제 이 문을 들어서면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품안으로 들어서는 것이구나. 그런데 좌우에서 도갑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사천왕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천왕들이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사천왕들이 이렇게 근무지 이탈을 해도 되는 것인가? 유홍준 교수가 이 정도 건물에 국보라는 가치를 부여한 것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문외한인 내 눈에도 국보로 부를 만큼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는 않는다.
절 마당으로 들어가니 먼저 큼지막한 석조(石槽)가 눈에 띈다. 숙종 8년(1682)에 만든 석조라는데, 이런 석조가 이것 하나만은 아니었겠지? 이렇게 큼지막한 석조를 보자니 과연 도갑사가 한창 때는 승려가 780명이나 되는 절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갑사의 대웅전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 물론 안에 들어가면 1,2층이 통해 있을 것이다 - 2층에 달려있는 ‘大雄寶殿’ 현판의 글씨는 언뜻 보면 이제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쓴 것처럼 소박하게 보인다. 일반적으로 다른 절에서는 대웅전과 같은 주전(主殿)의 현판 글씨는 힘차고 화려하게 쓰던데... 그러나 저 대웅보전 글씨는 볼수록 빨려드는 맛이 있다. 무릇 대가들의 작품은 그 경지를 넘어서면 어린이 같다는 말도 있던데, 저 현판의 글씨를 쓴 서예가도 그럴까? 내 사무실 근처 봉은사의 판전(板殿)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노년에 죽기 얼마 전에 썼다고 하지. 그 글씨를 보면서도 처음에는 이런 초보자 같은 글씨가 추사의 작품이란 말인가 하며 의아해했지만 갈 때마다 ‘板殿’ 글씨를 보면 볼수록 그 글씨가 내 마음에 와 닿았었지.
대웅전 뒤로 계단을 올라가니 보이는 건물은 국사전(國師殿)이다. 국사전? 도갑사에 국사전이 있다면... 도선국사? 안을 들여다보니 한 고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저분이 바로 도선국사? 그런데 도선국사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저 영정은 화가가 상상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그린 것이겠지.
국사전 옆에는 한 비석이 비각 속에 모셔져 있다. 국사전 옆의 비석이니 도선국사 비석이려니 하고 다가가니 세조 때 도갑사를 크게 중창하였던 수미왕사의 비각이다. 설명을 보니 영암 출신의 수미왕사는 한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간경도감에서 일을 하였으며, 세조가 왕사에게 ‘묘각(妙覺)’이라는 호까지 내려주고 왕사로 책봉까지 하였다고 한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악업(惡業) 때문인지 불교에 기울은 세조로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妙覺이라... 수미왕사가 참 묘한 깨달음을 얻었구나.
마당 한쪽에는 ‘108 산사 순례 기도회’가 도갑사 순례 기념으로 불기 2551년 4월 12일에 심은 나무가 아직은 여리게 서있다. 불기 2551년이라면 서기로는 2007년이니 5년 전에 기념식수를 한 것이구나. 이들은 한 달에 한번씩 9년 동안 108 산사 순례 목표로 지금도 계속 순례를 돌고 있다고 한다. 108 산사라고 하니 먼저 108 번뇌가 떠오르는데, 실제 이들은 108 산사를 찾아 108 참회를 하며 108 번뇌를 소멸하고 108 염주를 만들어 간다고 한다. 전에 석모도 보문사에 갔을 때에 보문사가 한국 33 관음성지 중 제1호라는 팻말을 본 적이 있다. 불자들 중에는 33관음 성지를 순례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108 산사를 순례하는 이들도 있구나. 요즈음 세속에서도 둘레길 걷기가 유행인데, 산사에서도 이런 믿음의 순례가 유행하고 있는 것인가? 불교뿐만이 아니다. 천주교에서도 유행하고 있고, 하다못해 국내에는 가볼만한 성지가 별로 없을 것 같은 기독교에도 성지 순례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제 절 뒤편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월출산의 품으로 들어서서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용수(龍水) 폭포다. 이곳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는데, 그래서 이름도 용수 폭포다. 그런데 예전에는 폭포 밑의 소(沼)가 하도 깊어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 허 참! 그놈의 뻥 너무 심한 것 아니야?
용수폭포를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등산로로 접어드는가 하였으나, 이번에는 길옆 언덕 위의 전각에 보물 제89호의 석조여래좌상이 있다는 안내판이 나온다. 나는 친구들에게 잠깐 올라갔다 오겠다고 얘기하고는 급히 오른다. 용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보이는 전각은 미륵전이다. 다른 전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석조여래좌상은 이 안에 모셔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용화문을 지날 때 이곳은 기도 도량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판을 보았는지라 차마 미륵전의 문을 열어보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미륵전에 미륵불이 모셔져 있지 않고 웬 석가여래냐?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중생들은 구원받으면 됐지 불교 교파가 무엇인지 전각에 따라 모시는 부처가 어떻게 다른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의 전각에 태연히 석가여래를 모신들 어쩌랴? 교파가 나뉘어 서로 싸우지 않고 통합불교로 여러 부처님들이 한데 사이좋게 모셔져 있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그래도 여기는 같은 부처님들 중에 누구를 모시냐는 것이지만, 다른 곳에서 어떤 중생은 기도처에 부처와 예수님을 함께 모셨다더라. 후후! 좀 심하긴 하였지만 미욱한 중생들에게는 자기를 구원해주는 신이면 다 하나의 절대자 아니던가?
이제 정말 본격적인 등산을 하는가 하였더니 이게 다가 아니었다. 모퉁이를 돌아 조금 오르니 도갑사의 부도를 한군데에 모아 둔 곳이 나오고, 그 옆으로도 화려한 비각 안에 한 비석이 모셔져 있다. 바로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의 비석이다. 도선국사의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돌거북은 입에 여의주를 문 채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거북이 바라다보는 방향을 나도 같이 따라가니 시선이 가는 너머는 도갑사가 있는 곳이다. 거북은 여기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도갑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가?
비각을 지나 전진하니 갈림길에서 연욱이가 기다리고 있다. 앞서 간 친구들은 계곡길로 가지 않고 왼편의 능선으로 향하는 길로 갔다고 한다. 우리도 왼쪽 길로 올라간다. 이젠 정말 본격적인 등산을 하나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오르던 길은 국립공원 관리소 측에 의하여 차단되어 있다. 월출산 보호를 위해 능선 등산로를 폐쇄하였단다. 이런 오던 길을 도로 내려가야 하나? 그런데 오른쪽 대나무숲으로 생태 관찰로가 이어져 있다. 우린 누구라 할 것 없이 생태 관찰로로 들어선다. 덕분에 의외로 대나무숲을 통과하는 즐거움을 갖게 된 친구들은 대나무숲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 저마다 사진 한 장 찰칵! 찰칵!
이제 아까 헤어졌던 계곡길을 만나 계곡물을 따라 오른다. 오르다 한 개울을 건너려는데 개울에는 로프가 매어져 있고 ‘비상탈출용 안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집중호우로 개울이 넘칠 때 쓰는 비상탈출용 로프란다. 그렇지. 지금은 저렇게 순해 보이는 개울도 일단 폭우가 쏟아지면 사나운 야성의 개울로 변하지 않는가? 그런 개울을 얕보고 건너다가 일단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그대로 휩쓸려 내려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뉴스가 생각난다. 한 대학교에서 교수 인솔 하에 단체로 산에 갔다가 사납게 변한 개울물을 만났단다. 물이 무섭게 변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교수는 서로 서로 손을 잡고 개울을 건너자고 하였겄다? 그러다 한 사람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니 연쇄적으로 모두 넘어지면서 단체로 사납게 변한 개울물에 휩쓸려 내려갔다는 것이지. 살아난 사람은 없었다고 하던데, 거기에도 이런 로프가 있었으면 귀한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또 오르다보니 ‘산행 중 심장마비 예방법’ 안내판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안내판은 월출산 국립공원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산행 중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그으래? 나는 관심을 갖고 안내판을 들여다보는데, 제목은 산행 중 심장마비 예방법이라면서 산행 전 예방법만 주욱 열거해놓고는 정작 산행 중 예방법에 대해서는 달랑 한 문장이다. ‘호흡곤란 등 이상 징후 발생 시 산행을 중단하고 충분한 휴식과 안정을 취한 후 하산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뭐야? 결국 충분히 쉰 후 내려가는 것 이외에는 예방법이 없다는 것이네.
9:52경 미왕재에 올라섰다. 이제부터는 능선을 따라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다. 미왕재에는 시원한 억새밭이 펼쳐지고 있다. 원래부터 억새밭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산불이 난 후 더 이상 숲은 살아나지 않고 억새밭만이 물결치고 있는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이제 반대편 산하가 눈에 들어온다. 발밑으로 성전저수지가 보인다. 저 성전저수지 왼쪽으로 무위사가 있다. 극락전이 아름다운 무위사, 인위적인 것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는 無爲, 그 이름이 아름다운 무위사. 그러고 보니 작년 6월에 저 무위사에서 올려다보던 곳에 지금 내가 서 있구나.
이제 능선을 따라 전진하는 내 눈앞으로 무수한 바위 군상들이 들어찬다. 월출산이 바위산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저 녀석들은 한때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식어 단단한 바위로 숨어 있었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햇볕이 쨍쨍 내리치는 이 세상에 나와 이리 쪼이고 저리 깎이더니 저렇게 제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월출산의 한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어떤 녀석은 다른 녀석 머리 위에서 겨우 몸 일부분만 걸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녀석은 떨어져 나가겠다는 것을 주위 녀석들이 협동하여 붙잡고 있다. 또 다시 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월출산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향로봉을 넘어서니 이제 눈앞에는 월출산의 최고봉 천황봉이 드디어 자태를 드러낸다.
천황봉을 향하여 능선을 내려가다가 잠시 옆길로 빠져 구정봉에 들른다.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바위를 돌아 봉우리 위로 오르니 바람에 몸이 휘청한다. 구정봉(九井峰)이라더니 정상에는 9개의 바위 웅덩이에 물이 담겨있다. 춘분이 지났지만 이곳은 아직 봄은 딴 세상일이라는 듯 물은 얼어 있고, 웅덩이 가장자리의 바위에는 고드름도 달려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구정봉의 물웅덩이는 마르는 때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에 9마리 용이 살았다니, 요 밑의 구림 마을에 살던 동차진이 이곳에서 까불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9번 벼락을 맞아 죽었다니 등 전설이 따라 붙는다. 구정봉의 9 웅덩이는 옥황상제가 동차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친 번개에 파여 생긴 것이라나?
구림마을 얘기가 나왔으니까 구림 마을 이름 유래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구림은 鳩林, 즉 비둘기 숲이란 얘기이다. 비둘기 숲이라니 구림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라 흥덕왕 2년(827) 이 마을에서 최씨 성을 가진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개울물에 떠내려 오는 푸른 오이를 집어 먹고는 그만 덜컥 임신을 했단다. 무슨 오이를 먹고 임신을 하누? 하여튼 처녀가 아이를 배었으니 어떡하는가? 처녀는 아기를 낳아 몰래 숲속 바위에 버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기가 낳은 아이라 캥겼는지 며칠 후 숲에 가보았단다. 그랬더니 비둘기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살피는 것이 아닌가? 어쩌겠는가? 처녀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아이를 데려다 기르니, 이 아이가 커서 풍수도참 사상으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되었더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도선국사의 출생 이야기를 신비스럽게 포장했는데, 구림마을은 도선국사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도선국사 이전에는 일본에 문물을 전한 왕인 박사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도선국사 이후로는 기생 홍랑과의 사랑으로 유명한 고죽 최경창(1539-1583)이 또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런 곳이라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도 이곳에서 찍었던 것인가?
구림마을 뒤쪽으로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영암천이 보인다. 저 구림마을의 상대포(上臺浦)에서 왕인박사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단다. 예전에 여기 와서 이 얘기를 듣고는 “어? 아무리 보아도 포구가 있을 곳이 아닌데?”하며 의아하게 여기던 것이 생각난다. 일제 시대에 저 앞을 매립하기 전까지는 밀물 때에는 저 앞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기에 왕인 박사는 저 구림마을에서 배를 타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지. 일본 아스카 문화의 원조인 왕인 박사의 고향이라 저 구림마을 성기동에는 왕인 박사 유적지를 잘 단장해놓고, 해마다 벚꽃 피는 4월이면 왕인문화축제를 연다. 그러고 보니 이제 얼마 있으면 축제를 하겠구나. 왕인박사는 일본에서 오히려 더 알려지었기에 일본인들도 왕인박사 유적지를 많이 찾아온다.
구정봉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벼랑에는 국보 144호의 마애석불도 있다고 한다. 국보라는 말에 순간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리 하산할 것도 아니고 다시 올라오려면 왕복 1km... 어휴! 나 혼자 산행하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안 되겠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니 바위 하나에 누군가 한자 암각문을 새겨놓았다. 구정봉 같이 기가 살아있는 곳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는 것. 사람들이 구정봉에 올라와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천황봉으로 향하기 위하여 아까의 갈림길로 돌아가지 않고 구정봉 밑으로 나있는 지름길로 내려가니 조그만 굴이 보인다. 베틀굴이다. 임진왜란 때 이 근방에 사는 여인들이 난을 피하여 이곳에 숨어 들어왔을 때 베를 짰었기에 베틀굴이란다. 그런데 생긴 모양이 좀 요상하다 싶었더니, 베틀굴의 다른 이름은 음굴(陰窟), 또는 음혈(陰穴)이다. 역시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비슷하구먼. 이게 여자의 거시기 형상이라니, 그러면 굴 안에 고여 있는 물은 음수(陰水)이겠구먼. 음굴의 천장에는 음수에서 반사된 햇빛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나는 음기를 받기 위하여 굴 안으로 들어간다.
천황봉을 향해 능선을 내려가다 잠시 구정봉을 돌아본다. 여기서 보이는 구정봉은 사람의 얼굴이다. 그래서 구정봉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큰 바위 얼굴 또는 장군바위이다. 이곳 영암에선 장차 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큰 인물이 나오려나? 능선에서 내려간 곳은 바람재다. 바람이 타고 넘는다고 하여 바람재인가? 바람재 이정표 옆에는 바람재 복원 과정을 찍은 사진들을 세워놓았다. 요즈음 산에 다니다보면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산을 복원해놓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곳은 국내 최초로 바위 위에 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 식생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바위 위에까지? 복원 공사도 발달하는구먼. 이제 천황봉은 1.1km 밖에 안 남았다. 저 위에 천황봉 정상에서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인다.
이정표를 보니 여기서 오른쪽으로 2.5km 내려가면 경포대란다. 경포대? 강릉 바닷가에만 경포대가 있는 줄 알았더니, 이곳 산속에도 경포대가 있네. 강릉의 경포대는 ‘鏡浦臺’이고, 이곳의 경포대는 ‘鏡布臺’이다. 강릉의 경포대는 여름밤의 밝은 달과 담소의 맑은 물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이곳의 경포대는 월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 모습이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경포대란다. 경포대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월남저수지가 있다. ‘월남’ 하니까 따이한이 참전하였던 월남이 먼저 떠오르나, 이곳의 월남은 월남사(月南寺)가 있던 곳이다. 월남사는 한때는 1만여 평에 달하는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물 298호인 모전석탑과 313호인 진각국사비만 쓸쓸하게 옛터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런 큰 절터를 그냥 버려두나 했더니. 조만간 월남서 절터를 발굴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시금 조금씩 숨을 깔딱거리며 천황봉을 향하여 올라간다. 도중에 남근 바위를 지나간다. 아까 지나온 음혈이 바라보는 곳이 이 남근 바위라며? 후후! 양과 음은 서로 끌리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12:33경 해발 809m의 천황봉에 올라서다. 뒤를 돌아보니 향로봉으로부터 지나온 나의 궤적이 보이고, 그 너머로 멀리 목포 앞바다가 보인다. 가만히 눈 찌푸리며 유심히 바라보니 유달산도 희미함 속에 흐릿하게나마 윤곽이 보인다. 아침이면 저 유달산을 뛰어오르던 때가 벌써 12년 전인가? 향로봉 왼쪽으로는 멀리 강진 앞바다도 보인다. 가만 있자... 그 앞의 산이 그러면... 다산 선생이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하여 오가던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이 아니겠는가? 땅끝기맥은 저 만덕산에서 두륜산을 거쳐 어제 우리가 올라간 달마산으로 향하지. 저 아래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 선 한편에선 큰 바위 얼굴 구정봉이 이렇게 감상에 젖어있는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다.
국립공원답게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당연히 정상 기념 사진도 차례를 기다려 찍어야 한다. 그런데 천황봉 정상에는 정상석 외에 다른 안내석이 있다. 내용을 보니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소사터(小祀址)가 있던 곳이란다. 전국적으로 대사터 3곳, 중사터 24곳, 소사터 23곳이 있었는데 유구가 - 통일신라의 향로, 토우, 고려의 녹청자 접시, 조선의 백자접시, 기와편 등 - 확인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단다. 안내문에는 옛 선인들은 이곳을 찾기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였단다. 이크! 나는 대충대충 하고 왔는데... 천황봉 산신이시여! 죄송하옵니다. 용서바랍니다! 이렇게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와 신시를 내었다는 단군신화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안내문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런 제사 전통이 끊겼다는 것 아닌가? 아마도 임진왜란으로 신분질서의 붕괴를 우려하던 양반들이 오직 성리학만 인정하고 다른 것은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우며 사상 통제를 하면서 중지된 것이 아닐까?
좀 더 정상에 머무르고 싶으나 세차게 나의 몸을 식히고 있는 바람 때문에 이젠 내려가야겠다. 내려가는 발밑에서 영암 읍내는 구름 그늘에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고, 읍내 뒤로 펼쳐지는 들판을 백룡산과 활성산이 감싸고 있다. 영암(靈岩)이라면 신령스러운 바위라는 얘기 아닌가? 원래 월출산에 움직이는 바위(動石) 3개가 있었단다. 이 바위들 덕분에 이 고을에서는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이 이 바위들을 산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단다. 그러나 그중 한 바위가 스스로 다시 올라왔기에 영암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조금 내려가다가 통천문을 지난다. 이 조그만 굴을 지나야 천황봉으로 오갈 수 있기 때문에 하늘과 통한다고 하여 통천문이구나. 지리산 장터목에서 천황봉 오를 때에도 통천문을 지났었지? 내려가는 길에는 올라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자주 옆으로 비켜서야 한다. 역시 월출산을 찾는 이들은 주로 이쪽으로 올라온다. 나또한 이전까지는 이쪽으로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올라오는 이들의 대화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나온다. 순간 나는 이곳이 경상도이지 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어? 아닌데?” 오늘 경상도에서 월출산을 찾은 이들이 많은지 내려가면서 경상도 억양이 자주 들린다.
구름다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바윗길이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내 몸을 흔들리게 한다. 나는 모자를 더욱 더 눌러쓰고 무게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몸을 낮추며 한발 한발 고도를 낮추는데, 발밑으로 바람골 위쪽으로 폭포물이 떨어지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바람폭포다. 지금 이렇게 강한 바람을 맞으면서 저 계곡을 내려다보노라니 저 골짜기를 바람골이라고 부름이 이해가 되겠다. 강한 바람에 바람폭포에선 여름이면 물보라가 날리고,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어 빙벽을 이루지.
이윽고 발밑으로 사자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빠알간 구름다리가 보인다. 95년도였던가? 내가 처음 월출산을 찾은 것이? 그 때 평지에서 우뚝 솟은 월출산의 위용에 감탄하고, 저 구름다리를 건너며 주위에 펼쳐지는 기암괴봉에 더욱 내 입은 벌어졌었지. 이제 그렇게 경외감을 가지며 건너던 구름다리를 반대로 건너간다. 이렇게 바람이 몰아세우는 데도 구름다리는 별로 미동을 하지 않는다. 그 사이 구름다리는 더욱 튼튼하고 강하게 변신하였구나. 안내문을 보니 2006년도에 다시 만들었다는데, 동시에 200명이 다리에 달라붙어도 안전하도록 설계하였단다.
구름다리를 건너니 길은 바람골로 내려가는 길과 매봉 반대편으로 천황사 터로 내려가는 길로 나누인다. 어떡할까? 틀림없이 친구들은 바람골로 내려갈 것인데, 나는 바람골로는 여러 번 올라와봤기에 천황사 터 쪽으로 길을 잡는다. 어차피 끝에서는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천황사 터로 내려오니 천황사 터에는 새로 절을 짓고 있다. 한쪽에는 깨진 동종이 보이는데, 새로 발굴한 것일까? 글쎄... 그런 소중한 유물을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천황사 터라고 하면 뭔가 안내문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별로 설명할 만한 절은 아니었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천황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단다. 그후 1646년(인조 24) 중창된 뒤 소규모 절로 명맥만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또 2001. 4.에 또 불이 났다는군. 어째 새건물처럼 보인다 했더니 최근에 다시 복원한 건물들이군.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종훈이다. 바람골로 내려와 이곳이 궁금하여 올라왔단다. 바람골 길에서 조금만 올라오면 된다고 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바람골로 내려가 이리 올라올 것을...
3:09경 등산로 입구에 설치한 등산객 숫자를 체크하는 출입대를 통과한다.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우리는 월출산 바람에 고생한 몸뚱이를 온천물에 쉬게 하고자 월출산 온천으로 향한다. 차를 타고 가면서 월출산을 올려다본다. 달 떠오르는 산, 월출산. 다음에는 보름달이 중천에 높이 떠오르는 밤에 월출산을 올라보고 싶다. 달빛에 물 들은 수많은 월출산의 바위들을 두리번거리며 월출산 속을 걷는 그 느낌은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