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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II

작성자양승국|작성시간12.07.22|조회수105 목록 댓글 0

II. 둘째날

 

다음날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일본 영사관 자리. 영사관 자리에는 지금은 화원 소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영사관 터에 그대로 소학교를 세워서인지 사진으로 보던 일본 영사관과 겉모습이 아주 딴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로에선 건물 지층도 볼 수 있게 도로와 지층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다. 왜놈들에게 끌려온 안의사가 바로 저 지하실에서 놈들에게 취조를 받았겠구나. 안의사뿐인가? 저 지하실에서 북만주 독립운동의 거두 김동산 선생, 여자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는가? 겉만 번지르한 영사관이었지, 실은 북만주 독립투사들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고문실. 저 지하에서 고문을 받았을 독립투사들을 생각하자니 온 몸이 떨려온다.

일본 영사관 터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러시아 영사관 자리. 노란색의 서양식 러시아 영사관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 영사관을 보았으니 러시아 영사관도 보자고 우릴 이리로 데려 온 것일까? 그건 아니다. 안의사가 왜놈들에게 인도되기 전 이곳 러시아 영사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등박문은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위해 러시아가 관할하고 있던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온 것이라 하얼빈역 구내에서 발생한 사건은 응당 러시아가 관할하는 사건이 된다. 러시아로서는 자기 관할 구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자기들이 조사하고 재판을 하겠다고 하여도 일본으로서는 할 말이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지 얼마 안 된 때이고 일본의 최고 실력자가 저격당한 사건이라는 부담 때문인지 강력한 일본의 요구에 안의사를 일본에 넘기고 말았다.

다음으로 우리가 들른 곳은 조선민족 예술관이다. 건물 전면 벽에는 커다란 한글로 자랑스럽게 ‘조선민족 예술관’이라고 내림글씨로 쓰여 있다.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안의사 기념실이 있기 때문이요, 또 이곳에서 재중동포 서명훈 교수로부터 안의사가 여순 감옥으로 이감되기까지 하얼빈에서의 안의사의 발자취에 대해 강의를 듣기 위해서이다. 기념실에는 안의사에 대한 전시물뿐만 아니라 저격 순간의 하얼빅 역 풍경을 조각으로 구성해놓았다. 기념실을 돌다보니 유명인들의 방문 흔적도 보인다. 영화배우 신성일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는 사진이 걸려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붉은 깃발에 뭔가를 쓰는 장면도 보인다.

‘어? 이건 뭐야?’ 예전의 ‘느낌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개그맨 남희석과 윤정수도 이곳에 왔었구나. 서교수의 강의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평생을 하얼빈에서 우리 동포들과 독립투사들의 삶을 연구해온 노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서교수는 안의사가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곳이 러시아 영사관이 아니라 역 구내의 헌병대실이라고 한다. 으잉? 박교수는 자신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을 얘기한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에서 가까운 시대의 역사도 아직 이렇게 혼선이 있구나.

예술관 관계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나온 우리가 들른 곳은 조선족 초등학교인 도리 소학교. 학교 안에 들어가니 아이들의 사진 밑에 그 아이가 한글로 쓴 글과 한자로 쓴 글이 나란히 걸려있다. ‘후후! 그렇지. 나도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잘 한 친구들 것은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져 있곤 하지 않았는가. 아마 내 것도 좀 올라가곤 했었지?’ 안의사가 거사 직전인 1909. 10. 23. 하얼빈 최초의 조선인 학교인 이 학교를 - 당시 학교 이름은 동흥학교 - 방문하였다.

 당시 안의사는 동흥학교의 김형재 선생으로부터 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이 실린 중문신문 대동보를 건네받고,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었다. 당연히 현관 들어가자마자 벽면에는 안의사에 대한 사진과 글을 붙여놓았다. 우리가 예정에 없이 방문하였음에도 교장 선생님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고, 안의사가 동흥학교를 방문할 당시의 학교 위치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가르쳐준다. 하여 우리는 원래 동흥학교 터도 가본다. 박교수는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동흥학교 원래 터를 답사하는 것은 우리가 처음이란다.

아무리 답사가 중요하다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리는 하얼빈 중심가에 위치한 한국 음식점 ‘서라벌’로 들어간다. 논현동에 위치한 ‘한우리’가 하얼빈에 진출하여 낸 식당이다. 왜 한국에서 쓰던 이름 ‘한우리’를 그대로 쓰지 않을까? 원래 ‘한우리’도 ‘서라벌’이라고 하였었다. 그러다가 먼저 ‘서라벌’ 상표를 등록한 업소가 사용 중지 요청을 하여 할 수 없이 ‘한우리’라고 바꿨던 것. 사장은 원래 쓰던 ‘서라벌’이란 이름에 애착이 가는지, 중국에 진출하면서는 원래대로 ‘서라벌’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구나. 식당에 들어가니 태극기와 중국의 오성 홍기를 나란히 걸어놓았다.

점심을 먹고 우리가 찾은 곳은 조린(兆麟) 공원. 거사를 위해 하얼빈을 찾은 안의사는 이 공원 근처의 김성백씨 집에서 머물렀다. 안의사는 머릿속에 어떻게 거사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이 공원을 거닐었겠지. 공원 안에는 안의사의 글씨 ‘靑草塘’과 ‘硯池’를 새긴 돌비석이 놓여있다. 물론 중국측의 배려로 우리가 세운 것이다. 우리야 물론 ‘청초당’이나 ‘연지’보다는 안의사의 뜻이 드러나는 글귀를 새기고 싶었었지. 그러나 이 또한 일본을 자극할 염려가 있다는 중국측에 의해 지극히 평온한 문구가 새겨진 것이다. 중국이 이것 말고도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남사군도를 놓고 베트남, 필리핀을 위협하며 결코 양보하지 않는 것을 보면 중국은 몸체만 큰 거인일 뿐이지 생각하는 것은 대국답지 않은 소인배다.

조린 공원은 중국의 항일투사 이조린 장군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그러니까 안의사가 이 공원을 거닐 당시의 공원 이름은 조린공원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공원 안쪽에는 이조린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 장군의 묘소도 있다. 동상 앞의 장군의 생몰연대를 보니, 안의사가 거사를 할 당시에는 이조린 장군은 태어나기도 전이다. 이조린 장군도 안중근을 존경하며 흠모하여 심양에서 혁명 활동을 하면서 청년들에게 안의사를 추모하는 노래를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한다.

공원을 나온 우리는 김성백씨 집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거리를 헤맨다. 김성백은 러시아가 이곳에 철도를 놓을 당시 통역을 하며 돈을 번 사람으로 하얼빈 한인회 회장을 하면서, 처음 만난 안의사에게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하며 안의사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역사 전면에 드러나지 않게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다. 김성백씨도 그렇게 번 돈을 자기 안위만을 위해 쓸 수 있고, 또 자기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협조하면서 사는 것이 자기 재산을 지킬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의사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안의사를 도왔던 최재형 같은 분도 러시아 해군에 군납으로 번 돈을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지 않은가?

 

오늘의 답사는 여기서 멈추고 우리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따라 하얼빈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중앙대가로 간다. 거리 양쪽으로는 이곳이 중국인가 할 정도로 서양식 건물이 늘어서있다. 러시아가 한창 이곳을 지배할 때는 약 20만명의 백인들이 이곳을 활보하였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사진 속에 중앙대가를 걷는 이들은 온통 백인들인 것이 마치 유럽의 어느 한 도시를 보는 것 같다.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것이 과장된 말은 아닌 것 같다. 많은 건물들 앞에는 건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동판들이 붙어있다. 인파 속에 묻혀 중앙대가를 걸어본다.

러시아와의 연관성으로 러시아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아라사 상품점’ - 그렇지. 러시아를 한자로 ‘俄羅斯’라고 하였지. 아라사 상품점 바로 옆 가게의 간판은 ‘USA 巴克酒吧’. 하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하얼빈 거리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어깨를 나란히 있구나. 거리를 걷다보니 만주족 전통 의상을 한 여인이 길가에 서있다.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같이 사진을 찍어주려 함인가? 가이드 얘기로는 현재 만주에는 천만명 정도의 만주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한족에 동화되어 현재 만주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100여명의 노인들뿐이란다. 이 노인들이 세상을 뜨면 만주어는 박물관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가 되려나?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청나라도 결국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동화되어 이제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구나.

중앙대가의 끝에 오니 송화강이다. 강변에는 무슨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솟아있다. 나는 중국 공산혁명과 관계되는 탑인가 하였으나 송화강의 홍수를 막아낸 하얼빈 인민들의 승리 기념탑이다. 탑 밑에는 1998. 8. 22. 송화강의 물이 이 높이까지 들어찼다며 홍수 수위를 표시해놓았다. 하얼빈도 도시 중앙이 밋밋하게 솟아 있을 뿐 - 그래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곳이 다른 곳보다 높은 지대라는 것도 알 수 없다. - 북경처럼 평평한 도시인데, 당시 하얼빈은 잠시 물의 도시가 되었었구나. 강가의 계단에는 많은 하얼빈 청춘 남녀들이 나와 있다.

 중앙대가를 거닐다보니 청춘남녀가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애정공세를 하며 심지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키스를 하는 청춘들도 볼 수 있다.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들이 보면 부르주와의 퇴폐 정신이 붉은 중국 대륙을 오염시켰다고 통탄할 일이겠지만, 자유의 바람이 이 깊숙한 대륙 내부의 만주벌판에도 불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다시 차에 타고 저녁 만찬 장소인 스완(SWAN) 호텔로 향한다. 버스는 채홍교를 지난다. 안의사가 저 다리 위에 서서 이등박문이 올 하얼빈역을 바라다보았단 말이지. 오늘의 만찬을 제공하는 이는 장현운 안중근의사 숭모회 하얼빈 지부장이다. 하얼빈 지부장이라 하여 조선족 우리 동포인가 하였으나 한족이란다. 그것도 하얼빈의 최고 갑부. 안중근 숭모회를 통하여 안의사를 알게 되면서 안의사를 존경하여 지부장까지 맡았단다. 만찬을 하면서 들어보니 그는 제주에 객실 4만개의 호텔을 지어, 제주도민 7,000명을 취업시킬 것이라 한다. 그 정도면 제주로서는 제일 큰 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당연 장회장에겐 명예 제주도민증도 주어졌다.

장회장 얘기로는 상해에서 열차로 2시간 거리 이내에 3억원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이들을 제주로 끌어들이면 거금을 투자하여도 충분히 사업성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제주에서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데, 앞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중국인들이 제주도를 찾을 것이라고 하니, 장래에 제주에 가면 주위에 온통 목소리 큰 중국인들의 목소리만 들리게 되는 것 아냐?

 

 지금 만찬을 하고 있는 이 호텔도 장회장이 경영하는 호텔이라는데, 장회장은 이 호텔을 헐고 다시 지으면서,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도 5~600평의 공간을 제공할 것이란다. 대단한 사람이군. 만찬 테이블에는 중국답게 개구리 요리도 올라왔다. 장회장은 귀한 것이라며 우리에게 먹을 것을 자꾸 권하나, 아무래도 통째로 요리된 개구리의 모습을 보자니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다. 아무튼 중국인 장회장의 안의사 사랑, 한국 사랑에 의미 있는 저녁이었다. 만찬 후 장회장의 환송을 받으며 네온사인 반짝이는 하얼빈 시내를 지나 소피텔 호텔로 돌아오니 하얼빈에서의 또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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