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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III

작성자양승국|작성시간12.07.23|조회수40 목록 댓글 0

III. 셋째날

 

아침에 일어나 호텔 앞을 거닐어본다. 길 건너편 CCTV 빌딩 앞에는 넓은 녹지가 있어 공원인가 하여 다가가니 골프장이다. 이런 도심 한 복판에 골프장이 있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이면 한국 같으면 벌써 홀마다 골프 치는 사람들이 넘칠 텐데, 이곳은 전혀 그런 낌새도 볼 수 없다. 공산국가라 아직은 개장 시간에 통제를 받고 있나?

 눈을 골프장 오른쪽으로 돌리니 골프장 저쪽으로는 30층 가까이 되는 쌍둥이 고층 빌딩이 골조는 다 올라간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어 있다. 공사가 꽤 오랫동안 중단된 모양인데, 하얼빈 개발 붐을 타고 뽐대 있게 올라가다가 무언가 사정이 생긴 모양이군.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들를 곳은 안의사와는 상관이 없는 곳이나, 일제의 잔학성을 알기 위해서는 꼭 가야 하는 곳, 바로 그 악명 높은 731부대이다. 하얼빈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이윽고 731부대 앞에 멈춘다. 여기로구나. 여기서 왜놈들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생체실험용으로 죽였단 말이지. 안으로 들어가보자. 안에는 여러 사진과 설명문이 걸려있고, 또 당시의 생체 실험 모습을 재현해놓은 방들도 있다.

설명을 보니 일제는 패망 후 도주하면서 많은 화학무기를 비밀리에 묻어두고 도망갔다. 그 바람에 전쟁 후에도 애꿎은 2,000여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심지어는 2003년, 2004년에도 그동안 발견되지 않은 화학무기로 43명이 부상을 입었다. 설명을 계속 보니 일본은 이렇게 전후에도 자신들이 묻어놓은 화학무기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음에도 아무런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나온다. 글쎄다... 양식이 있는 국가라면 그런 사태가 발생되기 전에 자신들이 그렇게 버리고 간 화학무기에 대해 자진 사죄하고 이를 제거하도록 적극 협조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긴 일본은 지금까지도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사과는 커녕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전시된 사진중에는 세균전의 책임자 이시히 731 부대장의 사진도 있다. 이런 천인공노할 범죄에 대해 이시히는 당연히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극형에 처해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시히는 극형을 받기는커녕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이시히는 생체실험의 자료를 가지고 미국과 거래하여, 결국 이 자료가 탐이 난 미국은 이시히와 그 일당들을 살려준 것이다. 미국놈들도 똑같은 놈들이군. 생체실험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방으로 들어오니 내 피가 끓는다. 일제는 3,00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산 채로 생체실험을 했다. 그중 동상실험 같은 경우에는 마루타의 옷을 벗겨 영하 30~40도의 동상실험실에 넣었다가 해동한다고 끓는 물에 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영하 200도에 가까운 냉동실에 손을 얼려 손가락을 막대기로 두들겨 부러뜨리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찰하였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실험을 하며 이를 관찰하곤 했을까? 또 어떤 마루타는 유리방에 들어가 서서히 진공상태로 바뀌는 방안에서 질식되어 죽어갔다. 이외에도 팔과 다리를 절단해 바꿔서 접합해보기도 하고, 고속회전기에 사람을 넣어 돌리기도 하고, 두개골을 열고 뇌를 바늘로 찔러 인체의 다른 부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고... 계속 전시된 자료를 보노라니 일제는 731 부대 안에서만 세균 실험을 했던 것이 아니다. 일제는 1940. 10. 영파시 개명가(開明街) 지역에 비행기로 페스트균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악마의 부대 731부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역시 이렇게 현장에 와서 그들의 잔학성을 보노라니 정말 글자 그대로 치가 떨려온다. 인간의 사악함이란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것인가?

 

전시실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에는 이곳에서 마루타로 희생된 사람들의 위패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름을 훑어나가다보니 한글로 된 이름도 많이 보인다. ‘고창률, 이기수, 심득룡, 김성서...’ 심득룡씨는 사진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독립운동가 심득룡. 그는 대련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밀정이 되면 풀어주겠다는 그들의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731부대로 이송되어 마루타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심득룡 선생을 바라보던 나는 도저히 계속 선생을 바라볼 수 없어 눈길을 돌린다. ‘선생이시여...’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는 숨진 마루타 동료를 왼팔로 안고 하늘을 바라보며 지극히 원망의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조각상이 서 있다. 저 남자는 신께 외쳤으리라. “하늘이시여! 도대체 당신은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이 잔혹한 범죄를 그냥 보고만 계시렵니까? 이 죄 없는 이 친구가 왜 이렇게 죽어야만 합니까? 왜! 왜!! 왜!!!”

무거운 마음으로 731 부대를 나서 다음으로 우리가 들른 곳은 중국 동북지방 열사기념관. 그런데 기념관 건물은 그리스 신전을 빼닮은 건물이다. 예전에 서양인들이 지은 건물을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것이리라. 역시 ‘역사 건축’이라는 동판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예전에 도서관으로 쓰였단다. 안으로 들어가니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홀에 도열해있다. 이들은 곧이어 엄숙한 자세로 묵념을 하는데, 애국열사를 추모하는 그들의 진지함이 얼굴에서 풍겨 나온다. 이 또래의 우리나라 학생들이 독립기념관에 와서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올린다면 과연 이들처럼 진지한 모습일까?

처음엔 굳이 중국 애국열사 기념관까지 와 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였다. 그런데 돌다보니 23명의 조선 국적 열사의 명단을 나열해놓은 것이 보인다. 김주현, 양형우, 박원규 등등. 박교수는 이외에도 이곳 기념관에 나오는 열사중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독립투사가 더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 기념관에서 대한 독립투사들은 결코 소수민족이 아니었다. 전시된 사진에도 한중 양 민족이 연합하여 일본 강도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적혀있는 사진도 있다.

 

기념관 막바지에 결론(conclusion)이라며 적혀 있는 글에도 우리는 어려운 시기(hard time)에 피로써 맺어진 한국인들과의 귀중한 우정을 간직할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국적 하에서도 일본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싸우다 희생된 이들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선열들에게 고개 숙여진다. "님들이 만주벌판에서 일본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바친 결과 우리 후손들은 중국인들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 만주벌판 어디에선가 묻혀있을 선열들이시여! 당신의 충정을 우리 모두 기억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승에서 저희를 보며 안식하소서!"

열사 기념관을 나온 우리들은 둥그런 돔과 첨탑이 인상적인 러시아 정교회 성당 - 지금은 하얼빈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전시관으로 쓰임 - 을 잠시 들렀다가 인민음악가 정률성 선생 기념관으로 향한다. 조선족 음악가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이면 중국인들이 오로지 조선족 음악가 한 사람을 위해서 이런 기념관을 세워준단 말인가? 기념관으로 들어가니 힘찬 군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 인민군에서나 중국인에게서나 제일 유명하고 많이 부르는 군가라는데, 당연히 정선생이 작곡한 노래이렸다. 한쪽에는 정선생이 나온 전주 신흥중학교 졸업장과 학교 성적표가 놓여있다. 그런데 선생은 일제 시대 졸업하였을 테데 한글 졸업장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보니 1996. 10. 10. 발행한 명예 졸업장이다. 선생이 중국 대륙에서도 추앙받는 음악인이니 신흥중학교에서도 선생에게 뒤늦게 졸업장을 주었구나. 또 같은 달 8.에 우리나라 문화체육부 장관이 주는 감사패도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 1948. 2. 8. 정선생에게 주는 포상장(褒賞狀)도 있다. 그런데 김일성이 주는 상장 위에 새겨져 있는 국기는 인민기가 아닌 태극기이다. 북한도 이때까지는 아직 태극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후후!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런 음악가가 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전시물을 계속 보니 정선생은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렇겠지. 아무리 훌륭한 음악가라 하더라도 인민군으로 참여한 사람을 남한에서 추켜세우지는 못했겠지.

 

또 한쪽에 붙여있는 포스터는 2009. 10. 15.부터 3일간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5회 광주 정율성 국제음악제 포스터이다. 부제는 '소통의 멜로디, 평화의 메시지'. 또 하나의 사진에서는 광주 남구에서 정선생의 생가 앞에 큰 표지석으로 정선생의 생가임을 알리고 있다. 다행히 한중 수교 후 뒤늦게 남한에서도 정선생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다녀간 신성일씨, 박영선 국회의원의 사진도 있다. 이런! 나만 정선생을 모르고 있었나?

오늘은 하얼빈을 떠나 대련으로 가는 날. 하얼빈을 떠나기 전 잠시 태양도 공원에 들른다. 태양도 공원에는 우리가 가야할 정도로 특별한 것은 없으나 공항에 가기 전에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강가의 공원을 걸어보자는 것. 어제는 송화강 강가에서 강물만 바라보았으나 오늘은 배를 타고 강 건너편의 태양도로 건너가, 강가의 나무들을 따라 태양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얼빈의 독립투사들도 여유가 있었을 땐 이 태양도 공원을 걸었을까? 공원 입구까지 왔으나 시간상으로 보니 입장료 내고 들어가봐야 잠깐 들어갔다 나와야 하기에 우린 공원 안쪽을 기웃거리기만 하다 돌아 나온다. 저녁을 먹고 9:10 비행기로 하얼빈을 떠난다. 한밤중에 도착한 대련시는 이제 잠자리에 드는 듯 조용한 모습니다. 차량이 뜸한 대련시로 들어가 프리마호텔에 들어간다. 날이 밝으면 대련시는 나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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