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첨부 문서에서 가설이라고 하는 것은 가추법과 동일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소쉬르가 어떤 면에서는 자의성이라는 이름으로 아예 방기한 기호 의미의 관계를, 퍼스는 그렇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관계 자체의 유연성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학적 성취의 역사적 순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획의 끝에는 그 유명한 퍼스지수가 있다.
귀납법, 연역법, 가추법이 그래서 나온 것인데, 가추법을 감성적 배치의 표출로 열어두면서 신뢰를 표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퍼스가 하는 작업은 러셀이 했던 것처럼 인간 존재틀의 언어논리학화가 아니라, 감성과 이성이 연결되는 어떤 통로를 찾고자하는 것이다.
이는 라이프니츠의 파도 비유가 바로 연상되는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감각이 인지되는 문턱을 도입하지 않고, 반대로 끝없이 교란되는 감각 자체를 추리할 수 있는 경로를 도입한다. 그러니 감각의 미세함이 어떻게 증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이 요긴하게 참신한 가설에 이바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탐정같이 감성을 투사하는 것인데, 합리론과 기호론의 차이일까?(처음에 나는 합리론 자리에 경험론을 썼었다) 삶은 미지라기 보다는 수수깨끼가 맞지 않은가.
누구도 온의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적실하게 말하려면 적당한 기호를 찾아야하고, 그 기호는 온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허다한 경로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는 그 경로와 경로가 한 존재를 소묘할 수 있을 정도로 일관될 때 쓰는 단어이다. 세상살이는 그 경로의 얽힘을, 책임감있게, 신중하게 만들어가고 헤아리는 것에 있지, 자신의 온개체적 의식이 포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대해서 될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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