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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아사(만들다,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

작성자바나바|작성시간08.11.01|조회수3,467 목록 댓글 0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창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함을 뜻한다.


비슷한 말로 히브리어‘아사’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만들다’라는 뜻이다.

중요한 건‘창조’의‘바라’와‘만들다’의‘아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바라’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뜻으로 하나님의 권한을 나타내시고,

‘아사’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도와 이미 창조되어 있는 재료를 가지고,

‘창의’(創意), 즉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창조’한 것들은 영원하다.

다만, 세상이 돌아갈 뿐이다. 세상은 변한다.

이 한 세대가 지나면 또 다른 세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하더라도 태양처럼 별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인류 최대의 지혜자로 꼽히는

솔로몬 왕은 이렇게 고백한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漣)하여 흐르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눈은 보아도 만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가 않으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반복하니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리켜 이것이 그것보다 새것이라

할 것이 없으니 이전 세대에도 그것은 있었다.

다만 우리가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듯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전1:4-11)


그렇다. 사람이 철이 들었다는 것은 자신의 참된 아버지,

즉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찾아 곧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다.

아이들은 태어나 눈도 뜨기 전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젓줄인 엄마의 젓을 찾아 빤다.

살기 위한 본능적이고도 반사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음성을 본능적으로 듣기를 원한다.


엄마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곧 바로 젓을 물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해 영혼의 양식을 준비하지 못한

엄마는 여전히 철부지 엄마다.


그러므로 아이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해

철든 엄마가 해야 할 일 중,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입에 젓을 물리고 그의 귀엔 영혼의 샘물인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

맨 처음 찾아야 할 보물은

나의 참된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고아로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물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 중

바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은 영이시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연의 모든 질서를 따라 섭리하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지만

분명히 있다고 고백하는 거와 같다.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아직 사물을 구분하지 못하는“철부지”나

아니면‘정신장환’을 가장 심하게 앓고 있는 중독환자든지,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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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

사람은 사물을 ‘만들거나(make) 조성할(form)’ 수 있지만, 창조하지는 못한다. 하나님도 역시 사물을 ‘만들거나 조성할’ 수 있으신데(히브리어로 각각 아사(asah)와 야싸르(yatsar)), 사람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빨리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만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만들거나 조성하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보다 복잡한 체계로 구성하는 것인데 반해, 창조의 활동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만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 가운데만 있었던 것이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창세기 1:1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다음의 정보를 주고 있다. 즉, 물리적인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활동 이전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 한 분만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다. 또한 그분은 전능하시므로, 그분이 말씀으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영원한 초월적인 하나님에 관한 이 개념을 전적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alternative)인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eternal self-existing universe) 개념도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영원한 하나님(Eternal God)이냐, 혹은 영원한 물질(eternal matter)이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현재의 원인-결과에 관한 과학법칙이 유효하다면, 영원한 물질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작위적인 물질 입자들이 복잡하고, 질서 있고, 지성적인 우주를 저절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하나님만이 그러한 결과(effects)를 산출해 내실 수 있는 적합한 단 하나의 원인(Cause)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참조 : 자료실/성경과 기독교/창세기
http://www.creation.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B04

출처 : Creation 14(2):20-21, March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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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의 첫째날의 빚과 네째날의 광명과의 관계


1.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광명”과의 관계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성경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광명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고 그 날부터 저녁과 아침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넷째 날에 두 큰 광명을 만드시어 그 광명으로 주야를 나뉘게 하시고 일자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

“빛”이란 히브리어 오르(דꕻא)는 그 뜻이 “빛 그 자체”이며,

“광명”이란 히브리어 므오로트(תꕌꔠꖮ)는 빛을 담는 “그릇”이나 “용기”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문제는 빛과 태양이 각각 다른 날에, 그것도 태양이 나중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크게 나누면 언제나 “첫째 날 태양 창조론 "과 "넷째 날 태양 창조론”이다.

첫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었다는 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빛은 발광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첫째 날에 태양을 창조하셨다.


둘째, 창세기 1:1은 첫째 날에 포함되며

거기서 말하는 “하늘[天]”에 곧 해, 달, 별이 포함된다.


셋째, 창조주간은 첫 날부터 낮과 밤이 구분되었다.

낮과 밤의 구분은 반드시 태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넷째 날에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셨다.

(창1:16)는 진술을 달리 해석하는데, 그것이 소위 “안개 이론(vapor theory)”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첫째 날에 태양을 창조하였지만

넷째 날까지는 짙은 안개 같은 것에 싸여 그 빛이 희미한 산광으로 비추이다가

넷째 날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본격적으로 비추이기 시작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창세기 1:16의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셨다”는

히브리어 동사 아사(הꙴꘝ)도 “정리하다” 혹은 “풀어놓다”로 해석한다.

이러한 이해는 사람의 과학적 상식과 조화되는 것 같고

또 성경의 충돌을 피하면서 창조의 권위와 질서를 더욱 잘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가장 큰 맹점은 성경 주석상의 무리이다.

이러한 주장은 반드시 창세기 1:16의 아사를 “만드시니” 외의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아사란 단어가 짐승들의 창조(창1:25)와

인간의 창조(창1:26) 시에도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문자 그대로 “만드시니”란 뜻이다.

그런데 같은 창조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에서

동일한 단어가 무슨 근거로 이 넷째 날의 경우에만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더군다나 성경에는 빛이 안개 같은 것에 차단되었다가 드러났다는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창세기 1장에서 아사는 바라(אꕇꔯ)와 함께 짝을 이루어 사용되었는데,

이 두 단어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아사는 “만드시니”로, 바라는 “창조하시니”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의 아사는 어의 상으로나 문맥적으로나

우리말 성경의 번역대로 “만드시니”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또한 창세기 1:1의 “하늘[天]”에 해, 달 , 별이 포함되었다는 주장도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주장도 창세기 1:16의 명백한 진술을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사실, 성경에는 넷째 날에 해와 달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있어도

별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우리말 성경에는 창세기 1:16에 “또 별들을 만드시고”라고 되어 있지만,

“만드시니”란 단어는 역자들에 의해 삽입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글자체보다 적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 원본에는 넷째 날에 별들을 만드셨다는 기록이 없다.

이 부분은 “해로 낮을 주관 하신 이에게 감사라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시138:8~9)는 구절과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램31:35)”다는 구절과 병행시켜 보면 또 “별들을 만드시고”가 아니라

또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시고”라는 해석이 더 문맥에 맞는 번역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1:1의 진술에 별들을 포함될 수 있어도 해와 달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세기 1:16은 넷째 날에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셋째 날 식물이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그 전에 태양이 창조되었어야 한다는

이론은 창조주간의 하루를 긴 시대로 보는 소위 “날- 시대 이론”(day-age theory)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림 교회는 그 역사 동안에 단 한번도 이 이론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이런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첫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었다는 이론은 성경 자체를 주석(exegesis)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과학적 상식을 성경에 주입(eisegesis)시켰다는 사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주석하는 입장에서 성경 그 자 체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제, “넷째 날 태양 창조론”을 살펴보자,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넷째 날에 “두 큰 광명을 만드(창1:16)”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진술을 창세기 1장의 자체적 문맥 속에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의 문제는 거르면

창조주간의 처음 3일이 어떻게 나중에 3일과 같이 태양일을 구성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우리 인간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이미 창조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피조 세계의 질서 속에 창조주의 능력을 제한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도 우주의 법칙 안에서 일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창조는 그 자체가 일반 법칙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특수 사역이다.

그러므로 창조에 있어서는 이미 창조된 피조 세계를 통해 창조주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통해 피조 세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사실, 천지 창조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현재와 같은 우주의 현상을 진행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태양이 없이도 24시간을 하루를 구성하실 수 있으시고,

태양이 없이도 식물을 존재케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서의 기록과 같이

때로는 태양을 머무르게 하시고도 하루를 구성하실 수 있으시다. (수10:13)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빛을 먼저 창조하시고 태양을 나중에 창조하신 것은

매우 의도적인 섭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창세기 1:4~5은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을 나누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넷째 날에 이르러서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창1:14)라고 하여,

주야를 구분하는 기능을 광명에 넘기고 있다.

하나님은 처음 3일은 단신이 직접 빛을 주관하시며 주야를 구분하시다가,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빛과 각종 주기의 통치권을 광명에게 위탁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빛의 근원과 각종 주기의 통치자가 전적으로

당신 자신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은 광명 없이도 존재하며 하루의 구분과

주기의 운행도 태양이 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증거하시어 피조물들이 태양이 빛을 발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섬길 이유가 없음으로 분명히 알게 하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도 태양보다 빛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종류의 태양 숭배에 대한 공개적인 거부”(Church Dogmatics, 3:120)라고 하였다.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입국을 눈앞에 둔 세대를 향해

“두렵건대 네가...일월성신 하늘위의 군중 곧 너희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을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신4:19)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섬기는 모든 제단에는 가장 먼저 “태양숭배”가 있다.

빛은 생명의 근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을 가장 먼저 청조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빛을 태양에 의존하시 않으시고 자신이 친히 주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회복될 에덴에 주신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추심이라”(계22:5)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해 없이 빛이 비추일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첫날의 빛을 신적인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으로 보았다.

성경에서 빛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생명, 구원, 계명,

하나님의 임재 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본 교회 성경 주석도 빛의 상징적 의미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SDABC, 1:120),

그러나 이 날의 빛은 결코 상징적인 빛은 아니다.

또 일부 사람이 빛이 이미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빛은 분명히 이전에는 없다가 지금“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존재하게 된 물리적인 빛임을 증거하고 있다.

만일, 이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빛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은 “빛이 있으라”가 아니고 “빛이 드러나라”이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비평적인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전반 3일과 후반 3일이

서로 내용의 문학적 대칭을 이루고 있는 일종의 “송가(頌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의미는 창세기 1장의 기사를

아무런 역사적 사실성이 없는 그저 단순히 운을 맞춘 노래로 보려는 것이다.

사실 둘째 날과 다섯째 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환경조성(Forming)과

내용 채움(filling)”이라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시고 다섯째 날에 그 궁창에 새가 있게 하셨으며,

셋째 날에 물을 내시고 여섯째 그 물에 짐승과 사람이 있게 하셨다.

만일, 첫째 날과 넷째 날도 이런 관계를 따랐다면 첫째 날에 환경에 해당되는 빛이 창조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첫째 날과 넷째 날의 관계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용”인 빛이 먼저 창조되었고, “환경”인 광명이 나중에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이 빛과 태양의 관계는 의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적으로 빛을 광명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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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의 창조(3)-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장 26절)
여섯째 날의 창조(3)-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장 26절)


라황용 목사 (김제송상교회)




창1:26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공중의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사역: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들과 온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1:26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나아세 아담).

원문은 "나아세"로서 '만들다'는 뜻을 지니는 "아사" 의 1인칭, 복수, 연장형으로 쓰여졌다. 연장형이란 히브리어 동사의 미완료형으로 보다 긴 형태로 변형시켜서 화자의 의지를 표현하면서 상대방에게 권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동사형을 가리킨다. 이를 개역성경은 "우리가 ~을 만들고"라고 번역하였다. 권유형이기에 "우리가 ~을 만들자"가 더 적합하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만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는 이미 있는 기존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것을 만들지만 그 결과는 전혀 새롭고 창조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2:7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사람(아담)은 흙이라는 재료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그 결과로 만들어진 사람(아담)은 그 이전의 어떠한 창조물과도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고대로부터 제시된 해석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장엄복수(pluralis majestatis)로 취급하여 복수 의미 대신 단수 의미로 해석함.
②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체에서 말씀하신 자기 독백으로 해석함.
③ 하나님께서 그의 수종하는 천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함.
④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 설명함.
이상의 해석들 중 마지막 견해가 받아질만 하다. 그 이유는 마지막 것을 제외한 나머지 세 의견의 크고 작은 몇가지 문제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략 살펴보면,


① 장엄복수(pluralis majestatis)로 취급하여 복수의미 대신 단수의미로 해석함(Kell, Dillmann)

장엄복수란 일반적으로 명사에 나타나는 복수형을 말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장엄하고 권위있는 사물들(예를 들면 땅, 하늘)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라는 동사의 접두어를 장엄복수로 표기하는 것은 이 같은 일반적인 용례에 배치된다. 여기서 장엄한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장엄복수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사 요메르 "가라사대(말씀하셨다)"는 단수로 사용되고 있다(칼·미완료·3인칭·단수형임). 만일 "우리가 만들자"가 장엄복수라면 "말씀하셨다"도 복수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체에서 말씀하신 자기 독백으로 해석함

이 해석은 마지막 의견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의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체(本體)에게 말씀하시면서 왜 1인칭 단수 대신 복수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본체에게 "우리"라고 말하실 수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의견처럼 삼위일체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가 되며, 그렇지 못한다면 이 의견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대신 "나는"으로 대치되어야 할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그의 수종하는 천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함(Von Rad, Kline)

이 해석하는 것은 두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하나는 성경이 사람과 천사를 특성이 전혀 다른존재로 구별하고 있으므로 인간이 천사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주장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창조에 천사의 참여를 허용하므로 하나님의 단독사역에 의한 창조를 부인하고 비성경적인 합동창조론(合同創造論)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Leupold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천군 천사들이 호위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구절들이 많은 것은 사실임을 인정하지만(사6:8, 왕상22:19-22, 욥1:6, 단4:14) 하나님께서 그들과 상의하신 일은 한번도 없음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천사들의 형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중에 한 위가 다른 위에게 말씀하심을 보여준다.



④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 설명함

결과적으로 "우리"란 3위 하나님께서 본체를 향하여 일컫는 인칭의 표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교통을 보여준다. 인간 창조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최고 걸작품인 사람을 창조함에 있어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의 상호 협조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Justin Martyr). 이는 천지 창조 사역에 있어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 하나님께서도 활동하셨음이 이미 밝혀져 있으며(2절) 후에 요한복음 저자가 성자 그리스도께서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요1:2,3)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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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리스도의제자들 원문보기 글쓴이 :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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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하나님은 창조하심과 만드심을 통하여 완성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에 관한 개념이 히브리어로 2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바라]이며, 또 하나는 히브리어 [아사]입니다.
창2:3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창조하시며”라는 단어는 [바라]이며, “만드시던”이라는 단어는 [아사]입니다. 창1장에서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념으로 되었고, [아사]는 일단 창조된 세계를 가지고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바라]는 create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아사]는 make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아사]라는 단어가 최초로 성경에 사용된 곳은 둘째날입니다.
창1:7에서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만드사”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사]입니다. 이것은 이미 처음 창조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을 이용하심을 나타냅니다. 궁창을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 물과 물 사이를 나누사 그 사이에도 궁창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지구의 대기권 위에도 물층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물층이 노아 홍수 때에 지구상에 쏟아진 것입니다.

또 창1:16에서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만드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사]이며, 별들을 만드시고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창1:1에서 행성들이 만들어졌으며, 넷째날 하나님이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의 위치를 조정하시고 빛을 주시고 각 행성의 역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또 그 창조하신 것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재창조(아사)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을 “그대로” 되었습니다.
창1:7, 9, 11, 15, 24, 30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그대로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창조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신대로 만족스럽게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아무런 고장이 없는 완벽한 세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그것은 완벽하게 창조된 세계가 고장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고장난 세계가 하루빨리 완전 회복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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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저녁7시40분 마타 사무실에서 방언기도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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