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이 다소 깁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은
강화 화승총 동호인회만의 '독자적 관점의 개발콘텐츠' 이오니,
끝까지 읽으시면 아마... 공감을 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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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초여름, 우리나라는
미국과 "참으로 이상한 전쟁"을 치렀다.
- 그리고 그 후
* 필자 註
20세기의 석학 문명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nold J. Toynbee)는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란
명쾌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토인비박사는 문명의 흥망성쇠와 역사전개를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과정" 으로
설명했다.
1871년 6월의 한미전쟁은 4천년 유구한 역사의 조선과, 신생독립국 미국이 피를 흘리며 첫 대면한 사건이다.
그날로부터 140여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은 혈맹(血盟)의 이웃나라가 됐다. 역사는 반복되었고,
도전과 응전은 숨가쁘게 이어졌다.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의 흙담 돈대(墩臺)위에 우뚝서서 부릅뜬 눈으로, 강화화승총을 거머쥐고 "무릎꿇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장렬한 생을 마감했던 이름없는 조선군의 넋은 - 세계의 10대 경제대국으로 훌쩍 커져버린 대한민국의
지금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이 '한미동맹'이라는 반석위에서 이뤄진 결과라 설명하면, 강화도의 조선군 혼백은
어떤 감회에 사로잡힐까.
토인비 박사는 서구문명을 본질적으로 혐오한 문명사학자였다. 그는 이런 우스갯소리를 남긴 사학자로도 유명하다.
"미국은 작은 방에 갇혀있는 커다란 덩치의 붙임성 많은 개(犬)다.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 때마다 방안의 의자가 뒤로
나자빠진다" (America is a large friendly dog in a small room. Every time it wags its tail it knocks over a ch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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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최초의 '상호평등조약' - 1882년 한미통상수호조약
* 조선조정,11년만에 미국을 용서하다
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의 끝은 실권자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조선이라는 '정략적 발판'으로 아시아진출을 노렸던 미국으로서는, 어정쩡한 강화도 무력침공으로
조선을 영원히 적으로 만들고 만 "뼈 아픈 외교적 실패"가 아닐 수 없었다.
만회를 노린 미국은 이후 조선조정에 대해 일체의 '강압적 태도'를 버렸다. 분노한 조선정부와는
직접 협상을 타진하기보다 일본과 중국 등을 앞세워 수교의사를 타진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임금이 집권하자 대원군과는 달리 개방의지가 강했던 것이
조약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데 한몫 했다. 이 틈을 노린 일본이 선수를 쳐, 1875년 운요호사건을
일으켰고 그것을 빌미로 이듬해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부산, 원산, 인천 3개 항을 개항시키는 등
조선반도 '개화의 첫 물꼬'를 텄다.
일본이 조선진출 이니셔티브를 쥐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쪽은 중국이었다.
1880년경 청나라 일본주재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이던 황쭌센(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는
"조선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위해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는 결속하며(結日), 미국과는
연대(聯美)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쭌센(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특히 미국과의 수교를 강조했는데
"미국이란 나라는 조선과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남의 나라 영토나 백성을 탐내지 않으며, 남의 나라
정치에도 간섭않는 민주국가일 뿐만아니라 오히려 약소국가를 돕는 나라이니, 조선은 미국을 우방으로
삼으면 (타국이 침략해도) 화를 면하게 될 것" 이라 주장했다. 이 '조선책략'은 고종임금의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의 대외수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조미수호조약 분위기조성의 일등공신이었던 중국인 황쭌센 저작 '조선책략'
* 사진출처; 뉴시스. www.newsis.com
* 조미통상수호조약의 체결
1882년 5월22일 현재의 인천 파라다이스(옛 올림푸스호텔) 호텔 현관부근, 화도진(花島鎭) 언덕에 세워진
임시막사에서 조선측 전권대표 신헌, 김홍집 등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펠트(R.W. Shufeldt) 등이 전문
14개조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다. 미국으로서는 강화도 한미전쟁 이후
11년만에 '소원성취'했던 셈이다.
조약체결 당시 중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마젠중(馬建忠), 딩루창(丁汝昌) 등 고위무관을 파견해
어깃장을 놓았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므로, 조선의 모든 국제조약은 중국과 우선 조율해야 한다" 는
생떼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회담장소에까지 중국 무관들이 들이닥쳐 "미국은 우리와 먼저 협상하자"고
우겼지만, 미국측은 이런 중국의 태도에 단호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는 "조선과 미국은 자주독립국가이며, 조미통상조약은 독립국 당사자간 고유권한으로
맺는 조약" 이라며 청나라 무관들을 별도의 방에 퇴장시킨 뒤, 조선측 전권공사와 마주앉아 1:1 협상을 했다.
(실제로는 슈펠트가 중국과 먼저 조미통상조약을 체결을 한 뒤, 이날 조선과 '형식적'비준을 했다 한다)
▲ 조선 전권대사 신헌(申櫶; 1810-1884). ▲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조미수호조약 체결당시엔 매우 병약(病弱)한 1821-1895).1867년 제너럴셔먼호 진상조사
상태였지만,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섰다. 에도 참여했던 해군제독 출신 고위외교관.
1870년대 말 촬영했던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래저래 조선의 개화기와 인연이 깊었다.
▲ 인천 화도진에서 체결된 조미 양국의 통상수호조규 협상 대표단의 협의모습(고증 재현).
기록상으로는 인천 화도진 언덕에다 임시 막사(천막)를 가설했다고 하는데, 고증으로
재현된 장소는 어디로보나 '천막' 같지가 않다.
▲ 조약내용을 담은 합의서는 한문(漢文) 및 영문(英文) 책자로 각각
3부씩 만들어 양국대표가 서명 날인했는데, 총 14개조항으로 양국의
무역 및 인적물적 교류에 관한 사항을 명기하고 있다. 문서 말미에는
미국대통령을 '대아미리가(大亞美理駕)합중국 프레시덴트'라 표기해
눈길을 끈다.
* 미국은 조선을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 most-favored-nation treatment) 했다.
전문 14개조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상호평등' 원칙에 입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약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이 자국에게 유리한 '불평등조약'을 강요했던 것과는 판이했다. 이러한 미국의 배려는
아마도, 11년전 강화도 한미전쟁 당시 '16세기 화승총군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한 도덕적 반성에서
비롯된 속죄의 뜻이 담겼을 수도 있다. (*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다)
전문 14개조 가운데 특기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딴 나라가 양쪽정부의 어느 한쪽을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제1조)
- 양쪽나라는 각각 외교대표를 상호교환, 양국 수도에 주재시킨다(제2조)
- 수출입상품에 대한 관세부과권은 조선정부에 귀속한다(제4조)
- 치외법권은 잠정적으로 인정한다(제5조)
- 거류지는 조선영토의 불가결한 부분이다(제6조)
- 양국간 언어, 문예, 법률 등 문화학술교류에 보호와 원조를 다한다(제11조)
특히, 제6조는 "조선국민은 미국의 어디든지 내왕하고 거류할 수 있으며 토지와 가옥의 매매 및
건축도 할 수 있고 적당한 영업이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조선측의 권리와 함께 "미국국민은
조선개항장과 통상지에 내왕하고 거류하며 토지와 가옥을 매매하고 건축할 수 있으며, 적정한
영업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는 명쾌한 양국간 호혜(互惠)원칙을 규정했다.
이러한 조미수호조약의 상호평등 규정은 1882년 이후 조선이 줄줄이 체결하게된
외국과의 수호조약에 '표본' 역할을 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발효로 미국은 광산개발권과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했다.
이듬해인 1883년 5월에는 초대 미국 전권공사 푸트(L.H. Foot)가 부임해 비준서를 교환했고,
6월에는 전권대신 민영익, 부관 홍영식 등 8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견미(見美) 사절단
'보빙사'(報聘使; 개화기 때 조선조정이 파견한 서구사절단)가 미국에 파견됐다.
■ "직접보고 느끼세요" - 미국, 1883년 조선 보빙사(報聘使) 초청
보빙사(報聘使)란 "상대국가의 정중한 초청에 화답하는 방문사절단" 이다.
미국은 조선의 관리들을 미국에 직접 방문케하고, 그들의 선진문물을 직접 보여주려했다.
미국의 초청을 선뜻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가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조선내 세력확장을 꾀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고종임금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관측도 있다.
1883년 7월26일 선박편으로 인천항을 떠난 조선보빙사 일행은 모두 11명.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아래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그리고 수행원으로는 유길준(兪吉濬) · 고영철(高永喆) ·
변수(邊燧), 무관 현흥택(玄興澤) · 최경석(崔景錫)이 본진을 이뤘다. 통역관으로 중국인 우리탕(吳禮堂),
일본인 미야오카(宮岡恒次郎), 미국인 로웰(Lowell,P.) 이 수행했다.
▲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홍영식,민영익,서광범, 중국인 우리탕.
▲ 태평양을 건너기 전, 일본 요코하마에 기착한 보빙사 일행. 영어통역을 위해
20세의 일본인 통역자 하나를 현지고용했다고 한다. 사진의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뒷줄 왼쪽 4번째가 유길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한 달여 항해 끝에 9월2일, 보빙사일행은 마침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닿았다.
거기에서 보빙사는 미국이 1869년에 완공한 장장 2,826km의 대륙횡단(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
네브래스카 오마하) 열차를 타고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이르는 대장정을 하면서 "미국이란 나라" 를
찬찬히 뜯어보게 됐다.
▲ 보빙사 일행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기념사진. 앞줄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 9월3일자 현지신문에 게재된 보빙사일행.
열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조선 보빙사일행은 9월18일, 뉴욕에 도착하여 미국대통령 체스터 아서
(Chester A. Arthur; 제21대 대통령으로 재임기간은 1881-1885)를 접견하고 한글로 작성한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 당시 미국신문에 보도된 조선보빙사 대표단이
'대아미리가(大亞美理駕)합중국 프레시덴트' 께
최고예우의 큰절을 올리는 모습. 너무나 깍듯한
조선식 예의범절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서 대통령이 보빙사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렇게
서로가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뉴욕의 미국대통령 접견은 2차례 있었으며 거기에서는 양국간 우호증진과 교역에 관한 논의를 했다.
그후 보빙사 일행은 40여일간 미국현지 체류하면서 세계박람회 · 시범농장 · 방직공장 · 의약제조회사 ·
해군연병장 · 병원 · 전기회사 · 철도회사 · 소방서 · 육군사관학교 등 선진문물과 선진사회시스템을
견학했다.
워싱턴에서는 미 내무성 교육국장 이튼(Eaton, J.)을 방문하고 미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브리핑도
받았다. 그밖에도 우편제도 · 전기시설 · 농업기술 등에 관심을 보여, 뒤에 우리나라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 ·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건설의 계기가 됐다.
미국시찰 당시 내무성 교육국장과 맺은 인연으로 귀국한 뒤 육영공원을 설립한 조선은 주한미국공사
푸트를 통해 육영공원의 교사선발을 의뢰,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생 헐버트(Hulbert, H. B.) · 번커(Bunker, D. A.) · 길모어(Gilmore, G. W.)등 3명의
'미국선생님'이 최초로 한국에 파견됐다.
또 스미소니언 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약용식물 표본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한미간 최초의 문화교류가 시작됐으며, 보빙사가 귀국할 때는 미국의 타작기 · 벼베는 기계 · 저울 등
농기구 18가지를 구입해왔다.
보빙사 일행은 보스턴 등지를 순회하고 조선을 떠난지 10개월만인 1884년 5월, 홍영식 등 보빙사
사절단 본진은 조선으로 귀국했으나 민영익 · 서광범 · 변수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각지를 더 둘러
본 뒤 귀국했다.
수행원 가운데 유길준은 보스턴에 남아 갑신정변때까지 유학했다. 또 한 명, 변수는 유럽여행 뒤
미국에 돌아와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해 미국공무원으로 임용이 됐으나 졸업한 뒤 4개월만에
열차사고로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변수는 한국최초의 미국 정규대학 유학생이었던 셈이다.
■ 근대교육, 사회인프라 구축 - 두드러졌던 미국선교사의 활동
1784년 조선최초의 천주교신자 이승훈(李承薰)이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시작된 서학(西學)의
전파는 1794년 중국천주교회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들어오면서, 소위 '야소교' 선교가
본격화됐다.
19세기 말까지 서방의 조선 선교활동은 주로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소속 신부들이 조선에 비밀리에 입국, 포교활동을 했는데 모방(Maubant,
羅伯多祿) ·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과 주교 앵베르(Imbert, 范世亨)가 최초의 선교사였다.
조선이 쇄국의 빗장을 풀자 사정은 달라졌다. 미국선교사들이 가장 헌신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는 물론, 툭하면 수교를 빌미로 자국이익만
챙겼던 '못된 이웃'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미국은 조선의 낙후된 사회시스템 전반을 근대적으로
업그레드 시키는 '궂은 일'을 도맡았고 선교사(주로 개신교)들이 그 일에 앞장섰다.
우리나라에 미국선교사가 공식적으로 파송되기까지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일본에 주재하던 미국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Maclay,R.S.)의 한국 방문을 통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선교사들은 조선의 근대교육시스템 뿐만 아니라, 병원이나 언론 등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겪게된 숱한 난관에 멘토(Mentor)의 역할을 떠맡았다. 일본이 집요한 조선반도 강점을
시도하자 미국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영문판 잡지를 발행, 세계에 조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앞장 선 것이 그 대표적인 일이었다.
당시 미국선교사 가운데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미국이 일본의 한국병합을 막기위해
국제적 개입과 행동을 해야한다고 촉구했고,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Horace Allen)과 함께
헐버트는 조선 황실의 입장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을 떠맡았다.
또 메켄지(F.A.Mackenzie)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란 책을 집필,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서 벌인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미국선교사 올링거(茂林吉, Franklin Oblinger), 헐버트와
아펜젤러(Appenzeller, 亞扁薛羅)는 1892년부터 격월간 '코리아 리파지토리'(Korea Repository)를,
헐버트는 1906년부터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잡지를 발행해 조선이 처한 현실을 서구사회에
널리 알려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는데 일조했다.
▲ 조선에 첫발을 딛은 공식1호 미국선교사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58.4.23-1932.12.11).
의사였던 알렌은 한국최초 서구식병원 '제중원'
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을 지냈으며, 조선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서구사회에 널리 알리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던 분이다.
21세기인 지금의 우리나라는 개화기 당시 미국선교사들이 일군 각종 유서깊은 학교, 병원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운영, 그들의 헌신적인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신촌의 세브란스(연세대 병원)를 비롯
이화여자대학교, 배제대학교, 경신학원, 예수병원 등이 그 좋은 사례다.
개화 초창기 조선에 입국해 헌신적인 활동을 했던 미국선교사들의 입국기록 및 활동은 다음과 같다.
- 1884. 9.20;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이 조선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입국
- 1885. 1.21; 의사였던 스크랜톤(Dr.W.B.Scranton)선교사가 조선을 향해 뉴욕을 출발
-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한국 인천에 입국함
- 1885. 4.10; 알렌에 의해 광혜원 설립(국립병원으로 설립,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함)
- 1886. 5.31; 이화여학교 설립.(서울 정동에서 미국감리회 여선교사소속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설립)
- 1886. 6. 8; 아펜절러에 의해 배재학당 설립, 개교함
- 1897. 5; 미국 남장로회 소속인 의사이자 선교사인 잉골드에 의해 '예수병원' 설립, 개원됨.
▲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1902.6.11)의 흉상. 서울 정동의 제일교회에
세워져 있다.
▲ 1885년 4월, 고종임금과 조선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지금의 '외교통상부'에 해당) 산하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했다. 개원당시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지만,
2주일 만에 '제중원'이라 고쳐 불렀다. 알렌선교사가 초대 원장을 역임하고 "대중을 널리 구한다"는
이념을 구현한 한국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다. 오늘날 연세의과대학 전신이다. 초창기 제중원에는
스크랜턴(William B.Scranton), 헤론(John W.Heron), 하디(Robert A.Hardie, 1865~1949년), 빈튼
(Cadwallader C.Vinton) 같은 미국의사들을 대거 입국해 진료를 담당해, 조선의사 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 1886년 미국선교사 스크랜튼의 부인이던 여성선교사 메리 F.스크랜튼
(Mary F. Scranton)여사가 서울 정동에 세웠던 황화방(皇華坊)의 모습.
1887년 2월에 고종황제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과 현판을 하사,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 1899년 - 미국의 한국최초 경인(京仁)선 기차길 놓기 실패담
1896년(고종임금 33년), 한국최초의 기차선로 부설작업인 경인선 철도사업권은 미국사업가
모스(Morse, J. R.)에게 돌아갔다. 당시 조선의 철도부설권은 주변 강국들 모두가 탐냈던
'이권사업' 가운데 하나였는데, 일본의 질투와 시샘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에게 낙찰된 이유는
1883년 조선 보빙사절단을 초청해 미륙대륙횡단 열차를 탑승시켜준 미국의 호의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하는 - 필자의 추정이다.
경인철도 부설사업은 1887년, 인천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 1897년 3월22일 인천 쇠뿔고개(牛角峴; 현재의 인천 창영동)에서 가졌던 경인철도
기공식모습. 사진 왼쪽편에 양복차림의 미국 시공업체측 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경인철도 부설을 맡았던 모스(Morse)는 당초 예상했던 모국(미국)으로부터 자본조달에 실패, 결국
사업중단을 결심하게 됐다. 이를 간파한 일본이 조선조정을 무시하고,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
(京仁鐵道讓渡契約)을 체결하고는 당시화폐 180만원을 지불, 사업권일체를 양도받았다.
이러구러 일본이 주축인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설립되었고, 1899년 9월18일
인천 제물포-노량진 간의 약 33㎞의 궤도부설이 끝나 경인선이 개통됐다.
■ 1902년 - 한국역사상 최초 '해외 공식이민'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호혜원칙에 의거해 조선백성의 미국이민을 받아들였다.
1902년 12월22일, 한국최초의 1차 미국이민단(121명)이 겔릭(Gaelic)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이후 미국이민은 1905년까지 65차례에 걸쳐 7,226명(남자6,048명, 여자637명, 어린이541명)에
달할 때까지 이어졌다.
▲ 미국이민 1호선 겔릭(Gaelic)호의 복원 미니어처. 이 미니어처는 인천 월미도의
'이민사 박물관' 에 전시되고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수교한 중국과 일본 이민자들이 하와이에서 '노동세력화' 했던 골치아픈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순진한 조선노동자"를 끌여들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어쨌건 미국으로서는
조선 백성에게도 타 수교국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굶주리고 헐벗었던 당시 조선인 이민자들은 신천지 미국땅 사탕수수밭에서 고된 노동을 해가며
현지정착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고, 해방이후에도
조국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초기 하와이이민들은 억척같이 번 돈의 일부를 조국에 흔쾌히 투척했다.
▲ 하와이 이민 초창기 조선인들이 헌금했던 '대한독립운동비' 영수증.
조선인들에게있어서 미국 화와이는 '제2의 독립운동전초기지' 였다.
인천의 인하(仁荷)대학교는 하와이 이민들의 성금과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하와이에 세웠던 교포2세를
위한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성금을 중심으로 1954년에 설립됐다. 학교명 인하는 인천의 첫 글자
인(仁)과, 하와이의 첫 글자 하(荷)를 따와서 붙인 것이었다.
▲ 미국 이민 1세대의 '억척같은 조국재건' 염원에 따라 1954년 개교한 인하대학교의 기념 현판.
1902년 조선최초의 미국 하와이 이민에 따른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전한다.
미국이민 1세대의 절대다수(전체 7천여명 가운데 여성은 불과 6백여명에 불과했다)가 남성이었던 탓에,
젊은 조선남성들은 조국의 색시감을 구하러 '사진신부' (사진으로만 선을 봤기 때문)감을 한국에서 찾았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사진으로만 머나먼 하와이 땅의 신랑후보를 보았고, 자신들의 사진(아래 사진)을
보냈다. 신부감 사진을 본 조선남성들이 "OK 사인"을 하자 미국정부가 비자를 발급, 조선여성들에게 미국행
여권을 발급했는데, 상당수의 여성들이 하와이 도착즉시 신랑감 얼굴을 보고 실망, 한국으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신랑후보의 얼굴사진은 조선을 떠나기 전에 찍었던 "젊은시절 모습" 이었고,
10여년이나 하와이에서 생활하다 폭삭 늙어버린(?) 신랑감 얼굴을 대면한 색시감 여성들은
"너무 늙었다" 며 퇴짜를 놓고 귀국해버렸다는 것이다.
▲ 미국이민 1세대 남성들과 중매한 '사진신부(Picture Bride)는 1,000여명에 달했다.
1910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사진신부 중매는 미국정부의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된
1924년 5월15일까지 계속됐다. * 사진출처; 화와이 사진신부(중앙일보)
- 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韓美戰爭) - 얻은 것과 잃은 것(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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