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서곡 - 강화도에 울린 조선군 포성(1)
미군부상자 2명, 그러나 미군은 미소지었다
■ 미군의 제1차 강화도 침공
1. 침공도
▲ 강화화승총 동호인회가 우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1871년 한미전쟁당시 미군의 1차 침공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방관리의 정탐보고 내용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날짜표기는 음력이다.
2. 전투일지
- 5월16일(음력 3.27) : 미국 아시아함대(Asiatic squadron)소속 함선 5척(기함 콜로라도 및 순양함 2척,
포함 2척)이 80여문의 함포와 야포, 해군수병 및 해병대원 1,400여명을 싣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출항. 조선원정대 사령관은 해군소장 존 로저스 제독.
* 원정의 목표
1866년(고종임금6) 8월 평양의 대동강에서 방화로 소실, 승무원전원이 학살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하여 조선정부측의 사과와 책임추궁, 보상을 요구하고
'함포시위'를 벌여 한미간 통상조약을 체결한다는 목적. 미국의 아시아함대에는
청나라주재 미국공사 프레드릭 로가 승선했는데, 그는 미국정부가 임명한
조선과의 통상수교 전권대사 자격으로 조선원정 함대에 승선했다.
- 5월19일(음력 4.1) : 한반도 남양만 진입. 이때부터 침공준비를 위한 수로탐사 시작.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 미함대가 진출했을 때 남양부사 신철구가 기함 콜로라도를 방문,
문정(問情; 사정을 탐문함)하자 미군측은 "통상교섭을 위해 왔으니 조선의 책임있는
고위관리를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 5월23일(음력 4.5) : 미 함대의 보트 한 척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주민들에게 강화유수를 경유하는
조선조정에 보내는 '통상교섭촉구' 서한을 전달함. 이날 오후 강화부(江華府) 관리 3명이
콜로라도함을 방문, 최초의 한미간 공적접촉을 가지게 됨. 강화의 관리들은 "조정에서
곧 회답이 있을 것"이라고 미국측에 통보.
- 5월26일(음력 4.8) : 인천 앞바다 작약도(물치도)를 미군 원정함대 정박지로 사용.
▲ 1871년 5월 미국함대가 작약도에 정박하면서 미군일부가 섬 해변일대에서
쉬고있는 모습. 조선원정에서 사망한 병사 3명의 시신도 작약도에 묻었다.
이 사진은 미국원정대를 따라 종군한 사진작가 비토가 찍었다.
- 5월31일(음력 4.12) : 조선조정이 하급 통역관 3명을 미함대 기함에 파견하여 "자진철수"를 종용했으나
미국전권공사 로는 이들이 하급관리이며 국왕의 신임장을 지참하지 않았다며 이들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오히려 "내일부터 한강측량을 실시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함.
- 6월1일(음력 4.13) : 미국은 두 척의 군함을 강화해협(염하)에 진입시켜 수로측량과 조선군 방어태세 정찰을 실시.
강화해협 광성보입구인 손돌목을 지나면서 불법침입한 미 전함에 대한 조선군의 화포공격이
시작됨. 손돌목 부근에서 미전함 모노캐시가 급류에 휩쓸려 좌초하자 미군은 일단 작약도로
철수. 미군 2명이 조선군 발포의 징겔포(대구경 화승총) 탄환에 부상 당함.
- 6월2일-9일(음력 4.14-22) : 조선군의 포격에 별다른 반격을 가하지않고 작약도로 돌아온 미군은 조선조정에
조선군의 적대행위 및 포격행위를 엄중항의하고, 열흘이내에 사과와 배상을 위한
협상을 요구함. 이에 조선조정은 미국의 강화해협진입을 항의하고, 영토(영해)를
불법침범했으므로 협상이나 사죄를 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미국함대철수를 요구했고
강화유수도 서한을 보내 강화포대의 발포 정당성을 주장함.
3. 전쟁안팎 이야기
(1) 출정한 미국군인들의 드높았던 사기
- 야만국 조선을 응징한다는 대의명분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미국전함에 승선한 미군들은 "미개한 나라의 폭압적인 조선왕조를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전의(戰意)에 불 타 있었다.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을 무자비하게 살륙하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 위에 군림하면서 수백년동안 외국과의 교류를 거부한 조선왕조를 심판하는
'정의의 사자'가 자신들인 것으로 여겼다.
원정출항 첫날인 5월16일 미 해병대 틸턴(Tilton)대위는 전함에서 그의 아내 내니(Nannie)에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이렇다.
"... 조선사람들은 무역을 하자며 찾아간 외국인들에게 대답 대신 목을 베었고, 사람머리를 소금에 절여서
피클을 만들어 진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구경시켰다하오! 3년 전에는 프랑스가 자국신부를 학살한 조선을
응징했는데, 프랑스인 친구가 보는 앞에서 프랑스 의사의 피부껍질을 모두 벗겨 해변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오. 눈 앞에서 프랑스 친구가 그런 꼴을 당하는데도 도와줄 수 없었던 것은 그 자신도 체포를 피해
도망다니는 처지였기 때문이라오.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난 잘 모르겠소만; 그러나 지금 떠나는 미국의
조선 원정군처럼 자그만 무력만으로, 그런 야만인들이 천만명이나 바글거리는 조선 땅을 상륙하는데
나도 참여한다고 하면, 당신은 썩 유쾌한 상상만 할 수는 없을 것이요!"
(편지원문)
"... came up here to trade, and the natives are said to have cut them up, and pickled them, took them
in the interior and set them up as curiosities! The French came 3 years ago to avenge their priests,
who had been murdered, when they skinned a French doctor, and crucified him on the beach under the
eyes of the Frenchmen who had been driven off, and who were unable to help their friends. Whether
this is positively true or not I can't say; but you may imagine it is with not a great pleasure I anticipate
landing with the small force we have, against a populous country containing 10,000,000 of savages!"
- 조선군이 4백년전 화승총으로 무장한 '원시군인'이란 점
당시 조선군이 무장한 화승총 및 화포류는 4백년전 유럽에서 발명돼 동양에 전해진 '골동품 무기'였다.
그에비해 미군은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발전한 최첨단 '라이플 7연발소총'과 함포, 야포로 무장해
조선군과의 전쟁은 애시당초 "상대가 안된다"는 사실을 참전미군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군들은 조선군과의 전투를 '중세군인과의 전쟁' 쯤으로 여겨 쉽게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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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구인들은 조선을 "희대의 야만국"으로 여겼다.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 학살당한 제너럴셔먼호의 승무원(미국인 5명 포함)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당시 미국정부 및 국민들을 매우 분노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당시 조선은 외국인 승무원들을 참수(목을 잘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잘라낸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인적왕래가 많은 길거리에 세워놓는 효수(梟首)형을 자행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합법(형법)적인 처형이었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소위 '병인대박해' 로 전국을 '살인광풍'에 내몰았는데, 이 때 8천여명의 내국인 신자가 체포돼 참살당했고 비밀포교하던 프랑스신부 12명이 체포돼 9명이 참형을 당했다.
그해 여름 또 다시 평양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외국인 승무원 전원이 학살 당하자, 조선을 규탄하고 응징하자는 분위기가 유럽은 물론 미국에도 널리 확산됐다.
당시 조선이 실제보다 더욱 야만적인 모습으로 서구사회에 알려진 것에는 조선조정의 책임이 컸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주도로 완강한 쇄국정책을 시행, 중국을 제외한 외국과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원천봉쇄했으므로, 외국인학살 소문은 민간의 입을 거치면서 "과장과 왜곡" 이 더 보태져서 외국에 흘러나갔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정부는 미국이 파견한 제네럴셔먼호 진상 조사단에게조차 비협조와 사건은폐로 일관했고, 그러자 미국조사단은 민간의 '뜬소문'을 수집해 미국정부에 보고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정부는 조선조정의 태도에 격분하고 "야만왕조, 거짓말과 사기꾼왕국"이라 결론내리고, 조선원정대를 파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화도의 미군상륙을 보도한 당시 미국 텍사스주 일간신문 '갤베스튼 데일리뉴스'(Galveston Daily News)의 6월28일자는"전쟁의 작은 얼룩" 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당시 미국사회가 알고있던 조선에 대한 시각이 잘 반영돼 있다. 기사전문을 소개한다.
"프랑스와 영국(당시 '미국'을 지칭) 군대가 같은 편이고, 그 반대편에는 조선 이 있었다. 두 나라는 아마도 '중국계 야만인'(조선을 지칭)의 못된 버릇을 가르치는 좋은 방법가운데 하나로서 무력침공을 하게 됐을 것이다.
조선인은 직업해적꾼들이 바다를 점령하고 육지에는 암살자들이 넘쳐나는 배신자와 사악한 마음을 가진 민족이다. 한국은 북동아시아 해안의 좁은 띠 처럼 생긴 나라로, 바다쪽으로 4백마일이 튀어나와 있다. 동해(일본해)와 황해로부터 분리돼 있다. 한국해안은 울퉁불퉁하고 위험스럽기 그지없다. 많은 선박들이 그곳에서 연례행사처럼 파손되고, 선원들은 종종 학살됐다.
항해위험을 줄이기위한 목적으로 기독교국가(서구)들이 조선정부의 승낙을 받아 그 해안들을 측량하려했다. 미국함대가 그 목적으로 세이블강(강화해협) 에 진입하자, 위장한 조선군 포대가 발포를 했다. 물론, 땅위의 먼 발치에서 울부짖듯 경고하는 매너는 보여주었지만.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 실제로 그 관계는 영국과 캐나다 사이와 닮아있다. 상비군은 총 50만명에 달한다."
(원문기사)
SPECK OF WAR.
The rencontre between the French and English squadrons on the one side, and the Coreans on the other, will probably teach the “Heathen Chinee” that both nations have a good deal of fight left in them.
The Coreans are a treacherous, false-hearted race. By profession pirates on the sea and assassins on the land. Corea is a narrow strip of land on the northeast coast of Asia, jutting out into the water for a distance of four hundred miles. It separates the Yellow Sea from the Sea of Japan. Its coast is rugged and dangerous. Many vessels are annually wrecked thereon, and their crews are frequently murdered.
With a view to lessening the dangers of the navigation, Christian nations have engaged in the survey of these coasts, with the consent of the Corean Government. As the squadrons entered the river Sable in the pursuit of this object, they were fired on from masked batteries. Of course they replied in a manner that sent the Celestials howling inland.
Corea is tributary to China. In fact, its relation to China is similar to that of Canada to England. The standing army amounts to half a million. <Galveston Daily News (Galveston, Texas) Jun 28,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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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韓美戰爭) - 전투일지(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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