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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과 화승총

국산로켓 나로호와 국산화승총 조총은 닮은 꼴(2)

작성자samson|작성시간13.08.10|조회수302 목록 댓글 0

 

 

 

                  400년전 화승총 국산화는 우주로켓 나로호 개발과정과 닮은 꼴

 

              당시 조선의 화승총 생산 기반은 어땠을까?

 

 

                                

                                                                                              작성   :    손상익

 

 

 

 

 

 

■ 두 번째 당면 과제는 화승총 재료 광물질(鑛物質)의 수급이었다.

 

 

조선은 사철광(砂鐵鑛)에서 주로 쇠를 얻었다.

갱도에서 광석을 채굴하기보다 강변의 모래를 채취한 것이다.

그나마 화산섬 일본에 비해도 턱없이 부족한 사철자원이어서 제철이나 기계공작분야가

낙후된 근본원인가운데 하나가 됐다.

 

조선은 부족한 광산자원을 가졌음에도 왜국이나 청국에 비해

우수한 제련기술을 확보한 탓에, 무쇠(生鐵)와 시우쇠(正鐵)는 물론 강철(鋼鐵)까지

생산해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 초기에 총통부대를 운용했다 하지만 총통과 화승총 제작 간에는

기술문제가 하늘과 땅차이만큼 크다. 주물(鑄物)로 찍던 무쇠 총통에 비하면,

화승총 총신은 순도 높은 시우쇠(正鐵)를 정교한 단조작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조보다 주물기술이 뛰어났던 조선 제철산업의 근간도 문제였지만

대량의 시우쇠를 확보하는 일부터가 난제였다.

 

처음에는 철산지마다 정부가 파견하는 철장관이 광부인 취련군을 모집하고

제철과 제련을 맡았다. 철의 수급은 나라가 농민에게 쇠를 만들어 바치게 하는

공철(貢鐵)제도를 유지했다. 1530년 무렵에는 전국의

철산지가 83개 읍에 달했고 주로 사철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쇠를 만드는 원리는 같다.

쇠 성분을 간직한 광물을 녹여 쇳덩어리를 만들고, 이를 불에 달구거나

두들겨서 질기고 강도 높은 쇠를 만든다. 조선의 철은 생철(生鐵: 무쇠)과

숙철(熟鐵: 시우쇠) 두 가지로 대별됐는데, 풍상(風廂:풀무)과 야로(冶爐:용광로)에

연결된 공기구멍(風穴) 숫자에 따라 각각 다른 열을 전달시켰고 광물의

용해온도에 따라 생철과 숙철이 생산됐다. 생철 용광로에는 9개의 풍혈이 뚫렸다.

 

숙철 야로에서 뽑아낸 쇳덩이는 신철(薪鐵)이라 불렀는데 이를 총기제작에 쓰이는

시우쇠로 만들기 위해서는 불에 달구고 두들기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서

불순물을 빼내야 했다. 시우쇠 한 근을 만들려면 신철 두 근 반이 필요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화승총 제작이 시급했던 조정은 제철관련 업무를

모두 한양 오군영이 관장하는 철점(鐵店: 광산 및 제련소) 형태로 바꾸었다.

 

중앙정부는 민간 철장(鐵匠) 중심으로 조직된 광산인력을 군대조직(軍伍)으로

편입해 생산과 수급을 통제했다. 시우쇠가 생산되면 곧장 한양 훈련도감이 공출해

화승총 총신을 만들었다.

 

철장은 1년간 채굴한 철광을 농한기에 제련하여 나라에 상납했으며 대부분 시우쇠였다.

1619년에 납철급체제(納鐵給帖制)가 실시되면서 조선 철광업은 민간 형태로 발전해나갔고

18세기 중엽부터 무기 뿐 아니라 민간 철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철광업 거상까지 생겨나

자본주의식 철 생산체계가 자리 잡게 됐다.

 

황해도 재령과 장연군 일대가 철산지로 유명했는데 그곳에는 자본주와 광산경영자

덕대(德大)가 역할을 분담, 철 생산량을 극대화시켜나갔다. 조선 후기의 무쇠는

1근(375g)당 6푼이었고 화승총 만드는 시우쇠는 대략 1전5푼에 거래됐다.

시우쇠는 무쇠가격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 조선후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그림 ‘대장간’. 대장간은 “풀무를 차려놓고 시우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생활용구를 만드는 곳”을 말한다. 시골에는 마을단위나 장터에

                            꼭 대장간이 있어서 날이 무뎌진 농기구나 부억칼 등 생활 연장을 벼리기도 하고

                            호미나 낫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그림 속 길쭉한 설치물은 쇠를 달구는 화덕이고

                            뒷쪽 어린 아이가 화덕에 바람을 넣는 풀무질을 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대처의 솜씨좋은 대장장이가 지방 군영이나 개인의 주문에 따라 화승총 총신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화승총 제작과 부대 운용에 필요한 광물은 시우쇠 외에도

납(실탄제작)과 구리(부속품제작)광산은 물론 화약재료 유황(硫黃) 채굴도 필수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이들 광물의 채굴과 제련은 소량에 그쳤으나

임진왜란 이후 군부가 생산을 관장, 17세기 말까지 전국에 68개 납 광산이 생겨났고,

20개의 유황 광산이 처음 생겨났다.

 

그러나 조선의 구리광산은 수요에 태부족하여 대부분 왜국에서

수입해 썼으며 채굴 유황 또한 질이 떨어졌다.

 

총기 재료가 풍부하게 자체 조달된다 해도 화승총 총신을 가공하는 데는

당시 조선의 단조(鍛造) 기술로는 어려움을 겪었다. 초창기의 총신제작은

총구 굵기의 심지 쇠를 중심삼아 가늘게 자르거나 통짜 시우쇠 철판을 감아서

수도 없이 달구고 두들겨 총신모양을 잡아갔다.

 

또 다른 총신가공 방법은 길쭉한 시우쇠 뭉치를 나무 받침에 단단히 묶고

절삭나사를 돌려 총구 홈을 팠는데, 숙련된 대장장이가 사흘에 걸쳐

총신 하나를 뚫었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정교한 주조(鑄造)기술이 자리 잡으면서

시우쇠 쇳물을 총신 틀에 부어 찍어내는 대량생산이 이뤄졌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군 주력 개인화기는 임진왜란 이후 400년 간 화승총 단일품목이었으나

재료나 제작기술 확보 측면에서 볼 때 어느 한 시기인들 완숙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까지 해도 조선 군부가 국력을 쏟아 부어

생산했던 화승총이었건만, 제조과정에 대한 정확한 매뉴얼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한편으론 의아하다.

 

 

 

 

    - (3)  염초 생산기반 편으로 계속. 연재 마지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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