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화식(指火式) 총통이
화승점화(火繩點火) 방아쇠 총으로
■ 화통(총통)에서 화승총으로
고려 말 화통도감(火桶都監; 1377.10)이 설치되면서 우리나라는 일거에
화약무기생산국 반열에 올랐다. 화약(焰硝)의 자체제조는 물론, 화포(火砲)와 로켓화살(走火) 등
20여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혹은 타국(中國)제품을 모방생산하면서 당대의 화약무기 강국으로 도약했다.
고려가 개발한 초기 화약무기 가운데, 오늘날의 소총처럼 병사가 휴대한 개인화기는
'화통'(火筒)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관만 보면 마치 쇠(鐵) 피리처럼 생겼다.
화통종류는 다양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길이는 20-40cm 남짓,
한쪽 끝이 막힌 일(一)자형 총신이었다.
고려 화통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으나, 화통이 만들어진지 불과 10여 년 만에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개국했고, 최무선의 화통은 조선군 무기체계에 그대로 승계돼 ‘총통’(銃筒)으로 개량을 지속해갔다.
총통, 사격수가 조준할 시간이 없었다
총통은 한 쪽이 밀폐된 금속 발사관(筒)에 화약을 밀어넣고, 그 앞에 장전한 발사물이
화약폭발에 의해 발사되는 '유통식'(有筒式) 화기다. 오늘날의 소총류 개인화기 발사체 구조와
같은 획기적인 무기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약을 점화하는 방식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인 '지화식'(指火式)이었다.
지화식은 "사람 손으로 직접 불을 당긴다"는 뜻으로 초창기의 총통은 화약이 장전된 약실(藥實)과
연결된 구멍(藥線穴)에다 사격수가 직접 불심지를 집어넣어 화약을 폭발시켰다.
이때 불을 붙인 도화선 심지(火芯)는 오늘날처럼 저절로 불꽃을 일으키며
타들어가는 도화선(導火線, fuse)이 아니라, 종이나 면사(綿絲) 등에 불을 붙여
약선혈에 밀어넣어 화약에 갖다 대 폭발을 일으켰다.
때문에 사격수가 목표물을 조준할 겨를도 없이 화약이 폭발하고 장전된 화살탄이 발사됐다.
화약을 입힌 도화선이 개발돼 화선혈에 끼우게되면서, 비로소 총통 사격수는
목표를 조준할 시간을 가지게 됐다.
화승총, 총통의 단점을 한꺼번에 지웠다
이런 '원시형태'의 발사시스템은 화승총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해소됐다.
총통은 옆구리에 나무자루를 엉거주춤 낀 채로, 조준할 겨를도 없이 발사됐지만
화승총은 사격수가 개머리판 끝을 어깨와 뺨에 밀착시키고 가늠자를 통해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한 뒤 사격수가 원하는 시간에 방아쇠를 당겨
실탄을 발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 조선전기의 총통
개인화기로서 총통은 세종임금(世宗, 재위1418-1450)때 많은 발전을 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77권(세종17년, 1437.6.27) 에는 총통군(銃筒軍)에게 개인화기
세총통(細銃筒)과 화살탄(矢箭) 등을 평안도에 보급하면서 절제사에게 세종임금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을 시험해보니 휴대와 발사 모두가 편리했다.
비록 척후병(정탐꾼)이 쓰기에는 합당치 않더라도, 적과 마주하여 싸울 때는 말(馬) 위에서
각자가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할 것이며, 위급할 때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휴대하고 발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세총통 150정과 피령전(皮翎箭; 가죽날개 달린 화살탄) 1천개, 철전(鐵箭; 쇠 화살탄) 1,500개를 보내니
적절히 활용할 것이며, 더 이상의 피령전은 현지에서 만들어 쓰는 게 좋겠다.”
▲ 육군박물관 소장 조선전기의 세총통. 청동주조물이다.
또 세종임금 29년(1447) 11월15일에는 조선군 병사의 개인화기 총통류 운용규칙을 설명하면서
" 5명으로 1개 분대(伍)를 만들어, 4명이 총통을 발사하고 한 명은 기민하게 장약(藏藥; 화약을 장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총통(二銃筒)·삼총통(三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사전총통(四箭銃筒)·세총통(細銃筒) 다섯 가지
총통을 뒤섞어서 가지고 다니면, 총통마다 격목(檄木; 총통약실 앞에 끼우는 나무마게)과 장전하는 화약의 양이
각각 달라서 혼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분대원 다섯명은 모름지기 똑 같은 총통을 휴대하고 적과 싸워야
효율적이니, 평상시 연습부터 그렇게하라" 고 교시했다.
▲ 조선전기 세총통과 화살탄 차세전. 총통은 구경별로 발사물 규격이
있는데, 세총통에는 세전(細箭; 가는 화살)보다 조금 더 가늘었던
차세전(次細箭)을 장전했다. (사진 속의 차세전은 유물아닌 복원품임)
소형 총통류로 무장한 조선군은 사격에 필요한 휴대장비를 꼭 지녀야 했는데,
조선초기 왕조실록에 기록된 총통군 휴대장비는 격목(檄木)·철퇴(鐵椎; 쇠몽치, 총통발사관을 의미하는 듯함)
·철전(鐵箭; 쇠 화살탄)·화약(火藥)·화심(火心; 도화선)·양약요자(量藥凹子; 장전할 화약의 분량을 재는 도구)
·장화기(藏火器; 총통 수납장구) 등으로 기록돼있다.
조선전기의 개인화기로 쓰였음직한 소형 총통류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이총통 혹은 우자총통(二銃筒, 宇字銃筒)
- 길이 44.99cm, 구경 26.2 mm
- 장전발사물 : 소전(小箭; 작은 화살) 1발,
세장전(細長箭; 가늘고 긴 화살탄)사 6발,
차세장전(次細長箭; 세장전보다 약간 가는) 9발
- 세종임금 29년(1447년) 기록에서 최초확인된 총통으로,
실물유적은 없으나 경주박물관에 ‘이총통’이라 적힌 총통
한 자루가 소장돼있다. 경주박물관의 이총통 모습은 병기도설의
이총통과 조금 다른데, 부리 구멍(총구)이 원형이 아닌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오례서례 ‘총통도’(銃筒圖)에는
경주박물관의 이총통과 유사한 총통그림이 실려있다.
▲ 삼총통 혹은 주자총통(三銃筒, 宙字銃筒)
- 길이 33.18cm, 구경 16.1 mm
- 장전발사물 : 차중전(次中箭; 중간크기 화살탄보다 약간 작은) 1발
- 이총통보다 길이와 구경이 작지만 발사물은 더 큰 '차중전'을 썼다.
삼총통은 조선 태종에서 세종임금 당시 중국식 화포를 모방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임금 27년(1445)에 화포성능개량을 하기 전부터
우수한 총통으로 명성을 얻었던 총통이다. 2010년까지 발굴된
조선총통가운데 가장 많은 71정에 달한다. 경남 하동군에서는
한꺼번에 52정이 발굴되기도 했다.
▲ 경남하동에서 출토된 삼총통. 아래는 삼총통의 확대사진.
진주박물관 도록에서 발췌한 사진이다.
▲ 팔전총통 혹은 홍자총통(八箭銃筒, 洪字銃筒)
- 길이 31.33cm, 구경 29.4mm
- 장전발사물 : 세전(細箭; 가는 화살탄) 8발,
차세전(次細箭; 세전보다 약간 가는 화살탄) 12발
- 세종임금 28년(1446년) 1월에 처음 기록이 등장하는 총통이다.
길이는 삼총통, 구경은 이총통과 비슷하다. 구경이 큰 편이어서
격목통(隔木筒; 화약과 발사물사이 밀폐를 위해 넣은 나무조각)
부분이 길며, 약통(약실)은 짧은 편이다. 약통길이는 삼총통이
7-8cm인데 비해, 팔전총통은 4-5cm에 불과하다. 삼총통이
큰 화살탄 1발을 발사하는데 적합하다면 팔전총통은 소형화살
여럿을 동시사격하게 만들어졌다. 기관총처럼 사거리가 짧은 대신
많은 실탄을 사격하는 셈이다. 경남 하동에서 2문이 출토되어
현재 진주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총신에는 ‘팔전총통 홍자이양총통
무진8월 사천’(八箭銃筒 洪字二樣銃桶 戊辰 八月 泗川)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1448년(혹은 1508년) 경남사천의 조선군 무기창에서
만든 총통임을 밝히고 있다.
▲ '팔전총통'에 나무막대를 끼운 모습.(윗사진) 사격수는 나무막대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심지에 불을 붙인뒤, 두 손으로 막대를 움켜쥐고 목표물을 향해 화살탄을 발사했다.
아래사진 왼쪽은 총구에 꽂은 장전발사물인 화살탄 끝부분이 튀어나온 모습.
아래사진 오른쪽 설계그림 및 해설은 '병기도설'에 수록된 팔전총통 관련 부분이다.
▲ 사전총통 또는 황자총통(四箭銃筒, 荒字銃筒)
- 길이 26.30cm, 구경 21.9mm
- 장전발사물 : 세전 4발, 차세전 6발
- 세종임금 28년(1446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며, 팔전총통의
소형버전이다. 조선초기 화차(火車; 다연장 화살탄)에 장착되기도
하는 등 조선전기의 주력 총통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쓰였다.
2010년까지 10정이 발굴됐는데, 경남하동 출토 3정은 진주박물관에
보관중이며 건국대, 서울대 박물관이 각 1정, 동아대박물관이
2정을 소장하고 있다.
▲ 사전장총통 또는 일자총통(四箭長銃筒, 日字銃筒)
- 길이 43.05cm, 구경 24.1mm
- 장전발사물 : 차소전 1발, 세장전 4발, 차세장전 6발
- 개발시기는 불분명하나 세종임금 30년(1448년) 12월에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사전장총통은 ‘이총통’보다 약간 작으며
구조상으로는 비슷하다. 현재까지 실물은 1점만 전해오는데
경희대 박물관이 보관중이다.
▲ 세총통 또는 월자총통(細銃筒, 月字銃筒)
- 길이 14cm, 구경 8.1mm
- 장전발사물 : 차세전 1발
- 세종임금 27년(1445년)에 처음 '세화포'(細火砲)란 이름으로 등장했다.
세총통은 우리나라 최초의 '권총'이랄 수 있는 독특한 무기다. 어린이나 여자들도 사격할 수 있게 만들다보니,
총통길이가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14cm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제는 화약폭발시 뜨겁게 달궈지는 총통의 몸통을
맨손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총통은 철흠자(鐵欽子)라는 ‘쇠집게’로 집어서 발사했다.
오늘날의 권총손잡이와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세종임금 27년의 성능개량이전에는 사거리가 200보 이내였으나,
성능개량 후 500보까지 늘어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 철흠자(왼쪽)에 세총통(왼쪽 두번째)을
끼운 모습(오른쪽). 왼쪽에서 세번째의
화살이 실탄격인 '차세전'이다.
▲ 신제총통 또는 영자총통(新製銃筒, 盈字銃筒)
- 길이 19.69cm, 구경 13.4mm
- 장전발사물 : 신제총통전 1발
▲ 측자총통(昃字銃筒)
* 크기 및 발사 물 미확인.
2. 조선중기 이후
총통군(銃筒軍)이 조선군 편제의 한 축으로 성장해나가면서 세종임금 때는
화포류의 대대적인 성능개량이 이루었다. 그러나 세종이후 조선에서는 개인총포류 개량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관심이 지속되지 못했다. 무신(武臣)과 민간 장인을 통한 성능 업그레이드와
가끔 표류해왔던 중국 등 외국 총포전문가를 통한 기술이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조선중기이후 총통의 진화가운데 가장 큰 변화 세 가지는
▴개인화기 총통 발사물이 화살탄(矢箭)에서 대부분 쇠구슬(鐵丸), 납탄(鉛子)으로 발전
▴약통(약실)과 부리사이에 끼웠던 격목(隔木)을 쓰지 않게 됐으며
▴ 조준 가늠자에다 개머리판이 부착된 견착식(肩着式) 총통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섰던 것이 '승자총통'(勝字銃筒)이었다.
승자총통은 제14대 선조임금(宣祖, 재위 1567-1608) 때 전라좌수사를 지냈던
김지(金遲)가 1583년경 창안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승자총통 유물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75년에 제작된 것이다.
승자총통은 이전 총통에 비해 부리(총신)가 길어 사정거리와 함께 명중률도 향상시켰다.
종류는 승자총통, 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 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
쌍승자총통(雙勝字銃筒)등이 있었으나 김지가 개발한 승자총통이 어떤 종류였는지는 명확치 않다.
▲ 쌍승자 총통.
승자총통의 총신길이는 53.7-59㎝, 무게 2.5-2.72㎏로 부리(총구) 안지름은 20-30mm였다.
조선의 무기류전문서적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기록에는
"3촌짜리 중약선을 이용하여 불을 붙이며,
이때 사용하는 화약의 양은 1량이고, 화약과 천환 사이에 쓰는 토격은 6푼이요, 철환은
15개를 장신하여 한번에 발사한다. 쇠탄환(鐵丸) 대신 가죽날개 나무화살인 피령목전(皮翎木箭)을
쓰기도 하는데 600보를 날아간다. 세종 때의 소형 총통처럼 격목을 쓰지는 않는다." 는 내용이 있다.
소승자총통 가운데에는 마치 현대의 소총처럼 개머리판이 달린 개량형도 있었다.
1583년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진 ‘소승자총통’은 기존 총통에 비하면 여려 면에서 진화가 이루어졌다.
▴ 옆구리에 끼고 발사한 한 것이 아니라, 가늠쇠와 가늠자로 목표물을 눈으로 조절한 견착식이었으며
▴ 총통부리가 길어지고 죽절(竹節; 폭발압력을 견디기 위해 대나무마디처럼 띠를 둘렀다)이 없는
매끈한 모양새로 바뀌었다. 그러나 손으로 화약심지불을 지폈던 지화식(指火式)
총통이라는 점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였다.
▲ 개머리판 있는 소승자총통’(1583년).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식 모양새를 갖춘 총.
총구와 총의 약통 위에 각각 1개씩 가늠자가 있으며, 철환 1-3개를 발사했다.
청동주물이며, 주조기술이 승자총통보다 숙련된 기법이어서 총신이 매끈하다.
총구로부터 약실까지는 차츰 두꺼워지며, 약실분분에서 약간 두껍다가 개머리판
쪽에서는 약간 가늘어지면서 그 내부는 비어 있다. 개머리판에는 총통명과
용약·탄환·만든 사람 명문(名文)이 음각돼 있기도 하다. 2010년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소승자총통은 모두 24점이다.
3. 임진왜란 - 화승총 도입의 결정적 단서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3년전, 1589년(선조임금 22년)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사신 황윤길(黃允吉) 일행은 귀국길에 대마도(對馬島)를 들러 그곳 도주(島主)로부터
화승총 3자루를 선물로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아무도 이 신무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총통과 활, 칼을 앞세운 조선군이 일본군의 화승총 앞에
맥없이 쓰러지자 그때서야 위력을 절감, 노획한 몇 자루의 총으로 훈련도 하고
실전투입했지만 이미 늦었다.
임진왜란 개전 다음해인 1593년(선조임금 26년) 9월13일, 이순신(李舜臣)장군이
휘하의 훈련주부(訓鍊主簿) 정사준(鄭思竣)을 시켜 조총과 기존의 승자총(勝字銃)을 절충한
새로운 소승자총(小勝字銃)을 만들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 총은 조선 화기 특유의 마디(竹節)가 없고
종래 승자총에 끼웠던 나무자루(木柄)를 끼운 모병(冒柄)부분이 없어져 겉보기에는
일본식 조총과 매우 비슷한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
또 1594년,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일본군 뎃포(鐵砲)를 모방한 화승총 자체생산하려 시도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이없게도, 임진왜란이 끝 난지 이십여년 만인
1624년(인조임금 2년) 조선정부는 일본에서 조총 수 천 자루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은 그 후 조총제작과 양산 및 성능개선에 힘을 쏟았고,
1655년(효종임금 7년)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네델란드의 하멜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훈련도감에 배속시킨 뒤 새로운 조총제작에 참여하게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국내정착한 화승총 제작기술은 1657년(효종임금 9년)에 이르자
청나라에서 수입을 요청하는 수준에 까지 도달하게 됐다.
▲ 19세기의 조선이 만들어 1901년 강화무기고에 격납했던 '강화 화승총'.
임진왜란 이후 거의 개량이 이뤄지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승총에 관한 추가내용은 ‘조선군과 화승총’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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