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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과 화승총

조선의 화승총 도입과 정착과정(2)

작성자samson|작성시간11.10.26|조회수624 목록 댓글 0

 

선조임금의 처절했던 ‘조총국산화’ 열망

 

 -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도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15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전래된 화승총에 일본과 조선은 각각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재래식 무기에 비해 월등한 사살능력(射殺能力) 때문이다. 일본은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식 아케부스(Arquebus; 초창기 Matchlock)를 모방제작하는데 성공, 일본전역에

대량 보급했고 전국시대의 수많은 내전(內戰)을 거치면서 총기성능이 업그레이드 됐다.

 

화승총(鐵砲)의 위력에 자신감을 얻은 일본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에

출병한 20만 왜군을 뎃포로 무장시켜 개전초기부터 조선내륙을 초토화시켰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비로소 조선조정은 '일본뎃포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能中飛鳥)며 총기이름을 조총(鳥銃)이라 불렀다.

일본은 이미 "화승총도 없이 전쟁에 나서는 행위는 곧 '무뎃포'(無鐵砲)"라는 말이 일반화됐던 시절이다.

 

조선조정은

우선 임진왜란이라는 발등의 불부터 꺼야했다. 선조임금까지 나서서

"일본뎃포를 베껴서 우리도 빨리 조총을 만들라" 하명했지만, 국산조총의 생산은

참으로 요원한 난제(難題)가 아닐 수 없었다.

 

재료(鐵) 확보도, 총기를 만들 기술도, 양질(良質)의 흑색화약 제조기술

그 어느 것 하나 갖춰져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총병 사수(射手)를

훈련하고 양성하는 기본인프라가 전혀 없었다.

 

임진왜란 개전초부터 국산조총을 갈망한 선조임금,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조총을 만들어내지 못한 안타까운 역사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선조임금 관련 부분을 발췌, 되짚어 본다.

 

           

         ▲ 실록(實錄) 발췌 - 선조임금과 조총

 

                

                ▲ 조선왕조 제14대 선조임금(1552-1608년).

                           재위기간 내내 무능하고 무책임했다는 지적을

                           받고있는 대표적인 조선 임금님 가운데 한 분.

                           그러나, 왕조실록에서 드러나고있는 '국산조총'

                           제작열망의 절절함을 미루어 볼 때, 나라사랑의 

                           애뜻한 마음만은 여느 임금님에 못지않았다.

 

 

                                      * 등장하는 날짜는 '음력' 이며, 기록내용은 이해가 쉽게

                                현재 우리가 쓰는 말투로 의역(意譯)했습니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 발발.

선조임금은 “조선군이 육상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는 이유는 왜군의 조총(鐵砲)때문이며,

조선군의 약점은 화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선조실록 39권)이라 지적했다.

 

그럼에도 당시 명(明)나라 군사자문단은 “왜노(倭奴)들이 믿는 것은 오로지 조총(鳥銃)뿐이고 조총은

3발 사격 뒤 연속발사가 어렵다. 왜노들의 머리수는 많지만, 용맹한 자가 없으므로 앞줄에 선 1-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혼비백산 도망갈 것이다. 누가 나서서 공을 세울 지사(志士)가 있다면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1593.1.7)라며 허무맹랑한 조언을 해댔다.

 

1593년 2월 선조임금은

“왜군의 전리품인 조총을 모방하여 제작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해

우리로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해 12월까지 결국 조총 국산화에 실패하자

“조총의 제조법이 교묘하여 세심하고 정교한 기술 없이는 제조가 불가능하다”는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후기에 설치된 전란시의 국방최고기관)의 보고를 받았다.

 

1953년 2월10일

선조임금은 이런 계책을 하교했다.

“주백총(周百總)이란 중국사람이 조총과 화약 만드는 법, 사격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그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며 ‘기술이 뛰어난 대장장이를 붙여주면 내가 감독해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손재주가 좋은 대장장이와 화약제조 장인 몇 명을 신속히 구하고 특별대우 해줘서 기술습득을 하게하라.

병조판서에게 이 일을 비밀리에 맡길 것이니 주백총이란 중국사람에게는 성공할 경우 큰 포상이 있을 것이라고 전하라”

 

선조임금은 또 “조총실물은 전리품으로 확보했지만, 염초(焰硝; 흑색화약 원료 KNO3) 굽는 방법은 익히지 못했다.

이번에 생포한 왜군이 그 방법을 안다고 하니 죽이지 말고, 오응림(吳應林)·소충한(蘇忠漢)을 시켜

우리 장인(匠人)을 데리고 가 기술전수를 받으라. 이 교시를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전하라”(1593.3.11) 일렀다.

 

석달 뒤 선조임금은

또 한번 조총과 염초제조 방법을 알아내라고 다그쳤다.

“전에 생포한 왜군 2명가운데 한 명은 염초를 구울 줄 알고, 한 명은 조총을 만들 줄 안다고 했다.

염초를 굽는 왜군은 영변으로 보내 가을부터 염초를 구워내라하면 많은 염초를 생산할 것이다.

또 조총 만드는 왜군은 철(鐵)이 생산되는 고을에 보내 조총을 많이 만들게 하라.

이런 뜻을 군기시(軍器寺)에 전하고 의논하게 하라”(1593.6.16)

 

1593년 7월에는

예정된 무과별시(武科別試; 임시로 치러진 무관임용 과거시험)에서 “철전궁수(鐵箭弓手)에게

조총 세 자루를 쏘게 하여 한발이상 과녁에 맞추는 자는 모두 선발하라”고 교시했다.

이어 비변사에서 “조총사격 훈련병 2백명을 선발하자”고 선조임금에게 아룄다.

 

비변사는 “양반상놈 따지지 말고 조총사격에 자질있는 사람을 뽑아 그만한 대우를 해주되 지금부터

시험을 봐서 차근차근 선발해나가자”고 부연설명까지 했다.

 

1593년 11월12일 선조임금은

유성룡(柳成龍; 선조임금때 병조판서,영의정,도체찰사 등 국방관련 최고위직 재임)에게

“내가 새로운 조총을 고안했으니 웃지말고 시험이나 한번 해보라”는 교시했다.

선조임금은 그 화승총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총이 천하의 신기한 무기임에는 틀림없는데, 화약을 장진하기 쉽지 않고

화약선이 잘 연결 안 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한 사람은 발사에만,

한 사람은 화약 장진에만 매달려 탄환을 끊임없이 발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일을 있은 뒤 선조임금은 “임금까지 나서서 시시콜콜 무기개량까지 해야하고,

그럼에도 대신들은 가타부타 한 마디없이 아첨만 해대니 통탄스럽다”고 했다.

 

선조임금은 1593년 12월2일

황해감사에게 “삼혈총통(三穴銃筒; 명나라 군사의 발사구 3개짜리 총통으로 조총에 비해 성능이 현저히 낮다)을

제작하라”고 명했다. 정밀한 구조의 조총생산이 실패를 거듭하자 우선 만들기 쉬운 총통제작을 지시한 것이다.

 

이런 선조임금의 지시는 비변사가 올린 '조총국산화 포기성' 보고에서 비롯됐다.

비변사는 “각종화기 가운데 전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조총(鳥銃)이고 그 다음이 삼혈총통입니다.

조총은 제작이 매우 까다로워 뛰어난 장인의 정공(精工)이 아니면 제조불가 합니다. 삼혈총통은 숙달된

야장(冶匠; 대장장이)이면 누구나 다 만들 수 있고 황해도에는 철물(鐵物)이 많이 생산되니,

황해병사와 평안·전라의 감사에게도 권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 아룄던 것이다.

 

이에 선조임금은 “그렇게 하라. 우리가 만든 조총은 거칠어서 쓸 수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왜군의

정밀한 조총을 모델(準的)삼아 모든 것을 그와 똑 같이 제조해야 한다”고 교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햇수로 3년째인

1594년이 밝았지만 그때까지도 조선은 ‘조총생산과의 처절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선조임금은 어전회의에서 이런 ‘투정성 교시’까지 내렸다.

 

“중국장수들은 왜군포로는 죽이지 않는데, 우리는 잡히는 족족 죽여버리니 도량이 좁다는 말을 들을 뿐더러

(조총)기술을 전수받을 수가 없다. 전에 우연히 사로잡은 왜군 두명을 내가 만난 적이 있는데, 우리 장수가

죽이자고 했지만 내가 애써 말렸다. 그 가운데 한사람은 염초 굽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지금도

영변(寧邊)에서 그 일을 하고있다. 한 사람은 조총기술을 가르쳐주었는데 질병으로 죽고말았다.

이런 경험을 보더라도 이후로는 왜군 포로가운데 흉악하고 교활한 자 외에는 모두 형틀을 씌워 압송하거나

혹은 잘 달래어 항복을 받도록 하라.”(1594.2.17)

 

비변사가 선조임금에게 아뢰기를

“지난달 전투에서 노획한 왜군조총 가운데 태반을 중국군이 요구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왜군조총은 낱낱이 거둬들여 우리군사를 훈련시켜 사격 잘하는 병사는 특별승진도 시키고

면천(免賤; 천민신분을 면함)하여 기능을 전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의했다.(1594.2.20)

 

1594년3월 비변사는 “화승총 사격을 전담한 포수(砲手)를 훈련시킬 총이 부족하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런 가운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왜군에게서 노획한 대소 조총을 올렸는데,

또 70여 자루의 조총을 보내왔습니다”고 보고했다. 선조임금은 “원균의 전공(戰功)이 매우 가상한 일이다.” 치하했다.

 

1595년에도

조선군의 화포류 생산은 지리멸렬 상태였다. 조선군 무기제조창인 군기시(軍器寺)는 선조임금에게

화포제작의 어려움을 설명했는데, 당시의 열악했던 우리나라 화포주조 사정을 잘 알게 한다.

 

“종루(鍾樓)의 깨진 종이 반쯤 흙 속에 묻혀 있어 최근 인력을 많이 들여 캐내었더니, 5분의 2쯤은

녹아 떨어져 나가 간 곳이 없고 그 나머지는 대략 2만 근이 못 되었습니다. 그걸 불에 달궈 깨뜨려 실어 날라서

화포주조에 쓰려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중론이 일어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종루에서 파낸 유종(鍮鍾; 놋쇠종)은 호조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또 불탄 회암사(檜菴寺;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소재)의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불에 탔지만 전체가 온전하여 종루의 종보다 갑절은 된다고 합니다. 이 종을 가져다가

화포를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訓練都監)도 조총 만드는 주철(鑄鐵)이 부족하니,

다 함께 종을 실어다가 화포제작용 쇠를 제외한 철을 훈련도감이 나누어 쓰면 될 것입니다.

 

경기도지방의 구리(銅)쇠는 지금 바닥이 난 상태입니다. 무기를 만들려 해도 구리를 구할 길이 없으니 걱정입니다.

경기도내에 불탄 사찰에 버려진 종이 더러 있는데, 관에서 거두어 관리하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경기감사에게 속히 현장조사해 숫자를 파악케해야 할 것입니다.”(1595.6.4)

 

얼마 뒤 훈련도감은

조선군의 전술을 왜군에게 배워야한다며 선조임금에게 이런 내용을 아룄다.

“항복한 왜군 여여문(呂汝文)에게 일본군의 전술(陣法)을 배웠는데, 깃발가진 자가 앞장서고 그 다음이

조총병, 뒤에는 창검(槍劍)병이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갖추고 대열 좌우에는 교묘하게 은폐한 병사들이

진을 쳤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깃발을 가진 병사가 대열을 좌우로 분산시키는 사이 조총병과 창검병이

기세를 올려 돌진해 좌우로 대열을 분산시키며 좌우의 복병(伏兵)과 함께 적의 뒤쪽을 포위합니다.

 

분산할 때는 복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창검과 조총병이 숲속에 흩어져 마치 산짐승과 새처럼 매복해

적을 유인하여 공격합니다. 왜군의 “뭉쳤다간 흩어지고 깜쪽같이 매복하는 전술”(合散伏兵)은

매우 교묘하고 위장술이 뛰어나(巧詐) 그 기술을 다 전수받고 싶지만 배워야할 우리 측 인원(殺手兒童)이

몹시 부족하니 5부(五部; 한성부에 설치한 5관서)에서 속히 더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건의했다.

 

또 비변사는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항복한 왜인(倭人) 1명을 데리고 왔는데, 염초(焰硝)를 잘 굽고

조총(鳥銃)을 잘 쏜다고 합니다. 훈련도감에 배치해 다른 왜군포로들처럼 염초제조나 사격교관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선조임금에게 건의하자 선조임금은 “배치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잘 돌봐주어서

진심에서 우러나 봉사하게 해야한다. 서울 안에 머물고있는 항복한 왜군들에게

겨울 옷도 배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고 교시했다.(1596.9.20)

 

선조임금은 1596년 섣달(음력12월)에

조선군의 조총제조 상태와 조총병양성 문제에 대해 개탄을 하며 정원(政院;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게 이렇게 일렀다.

“포수(砲手)와 살수(殺手)는 건강하고 용감한 자를 선발해야 마땅한데, 마구잡이로 충원해 절반이상이 쓸모가 없다.

이후로는 꼼꼼히 골라서 선발하라”며 “포수라는 군사가 어찌 조총사격기술 한 가지만 습득하느냐,

포(砲)종류는 모두 익히도록 하라”

 

또 지지부진한 국산조총 제작현황에 대해서는

“정밀한 총기를 만들지 못하면 적에게 군사를 내주는 것과 같은데, 훈련도감에 몇 해 동안이나

무기제작창(軍器匠役)을 설치했음에도 인원수만 채워놓고 모두가 한가롭게 놀면서 급료(廩料)만

받아가는 폐단이 없지않다. 앞으론 감독을 철저히 하여 무기를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고 하교했다.

 

이와함께 “단천(端川; 함경남도 북동부)에서 채굴한 은(銀子)은 잇달아 올라오는데,

연철(鉛鐵; 납)을 올려 보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은이 있으면 납도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전쟁에 쓸

탄환제조에 필요한 납은 없는가?” 등을 조목조목 따져 훈련도감이 답변하도록 다그쳤다.

 

이에 훈련도감이 며칠 뒤 선조임금에게

“조총병 선별과 양성문제는 분부대로 받들겠으며, 훈련도감에서 급료만 허비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무기제조창(匠役) 장인들은 철저히 제품검수하여 상벌을 주겠다”는 답변을 아룄다.

 

또 단천의 납(鉛)생산에 대해서는 “납탄환(鉛丸)이 시급하게 필요한 실정이어서 오래전부터

단천의 납을 가져오려 했는데 서울까지 운반할 힘이 없어서 포기했으며, 병조(兵曹; 오늘날의 국방부)에서

사들인 납탄환 10만개도 운반할 힘이 모자라 안변(安邊; 지금의 북한쪽 강원도 중부)까지 겨우 가져왔습니다.”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임금은 “안변의 납탄환을 조속히 서울로 가져오라”고 하교했다.(1596.12.8)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5년째가 되는 1597년까지도

조선은 ‘조총생산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선조임금은 1월16일 조정에서

대신 및 비변사 당상(堂上; 정삼품이상 고위관료)과 왜적 방비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또 한 번 훈련도감의 무기제조 장인들을 문제삼았다.

 

“도감(都監; 훈련도감)에서는 무기제조창 장인(坐匠)들의 일(工役)을 날짜계산 하여 책임량을 주는가,

아니면 세월만 허비하는가?”묻자 이덕형(李德馨; 당시 훈련도감 당상)이 아뢰기를 “날짜를 헤아리고 있습니다.”했다.

 

이에 선조임금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관청 돼지 배 앓는’(官猪腹痛; 관가에서 기르는 돼지는

배가 아파봤자 백성들은 아무도 몰라준다는 뜻)식이야. 도감에서 만든 무기들이 정밀하지 못하니

그걸 어떻게 쓸 수 있나. 이런 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이 모두가 유사(有司; 담당관리)가 챙겨야 할 일이거늘” 하니

 

윤두수(尹斗壽; 문신으로 판중추부사)가 아뢰기를 “김응서(金應瑞)장군에게 항복한 왜군(降倭)이

조총(鳥統)을 잘 만든다고 하니, 훈련도감에 데려다 총기를 만들게 해야합니다”진언하자

선조임금은 “올라오게 할 것 없다. 우리나라 장인(工匠)들 역시 잘 만들지 않는가.” 했다.

선조임금의 이 말은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왜인들을 데려다가 기술을 전수시켰지만,

우리 장인 그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불만과 체념이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끝내 국산화하지 못하고 - 왜의 조총을 수입하다

 

 

1607년 정월초하루(1월1일),

임진왜란이 끝나고 8년이 지났다. 일본측이 화친을 요청하자 이날 선조임금은 그에 회답하고

또 일본에 억류중인 조선포로를 데려오는 쇄환사(刷還使)를 파견하면서 “일본에 가거든 정교하게 만든

일제조총을 사오너라. 전쟁무기로는 왜인의 조총이 가장 절묘하게 잘 만들었다. 돈을 넉넉히 가져가서

역관(譯官)들이 조총을 잘 골라서 사오도록 하라”고 교시했다.

 

 

 

     ▲ 조선 중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국산조총' 유물. 겉모습으로는 일본 뎃포(鐵砲) 비슷하지만

        총신의 압력 내구성이라던가 총구, 총미부분을 비롯해 방아틀뭉치(기관부) 제조기술이 현저히 떨어지는

        조악한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조정마저 일제(日製)를 신뢰하고 선호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다.

        서글프지만, 조선역사의 살아있는 사실(史實)이 그렇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파견단에 속한 사람들은 이참에 한몫 챙기려 물품들을 가득 싣고 간다며

재야의 지식인들이 한심해 했다.

 

1월4일 선조임금은 승정원에 다시한번 '조총구입'을 하명하면서

“지난 전쟁은 일본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하니 우리도 사신을 파견하여 화답하지만, 적을 막는 데는

왜군 조총만한 것이 없다. 우리가 조총만드는 법을 대략 배웠지만 모두가 쓸모없었다. 얼마 전 함경감사는

은(銀子)을 모아 조총을 구입하기도 했다. 해당 관청에서 사신들에게 미리 돈을 챙겨주어 일본에 가서 닥치는 대로

조총을 구입해 돌아오는 배에 가득 싣고 온다면, 비록 적국의 총이긴 하나 우리에겐 이로운 일이니

이를 잘 시행하도록 비변사에 일러라”고 전했다.

 

다음날 비변사에서

선조임금에게 아뢰기를

적국의 무기를 많이 구입해온다 해도 진실로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왜의 조총 가운데는

품질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으니, 구입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따져서 정밀한 조총만 가려서

사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고 아룄다.

 

이때 조선 쇄환사가 구입해 오거나 여러 경로를 통해 수입한 ‘일본뎃포’는

무려 2만정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조선군은 ‘일제화승총’으로 왜구를 방어하는

"콩깍지 태워 콩구워 먹는" 진풍경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 조선의 화승총도입과 정착과정(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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