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7년간 30만명을 조선에 출병시켰고
5-6만정의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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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註 임진왜란(1592-1598)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방법은 많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사회, 군사적배경을 분석하는 미시적관점에서부터 서구문명의 아시아 전래와 그로인한 동아시아 판도변화 등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국제환경과 질서재편을 거시적관점으로 살피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강화 화승총 동호인회는 서구문명의 하나였던 화승총을 동아시아에서 가장먼저 자체생산, 국가차원의 대규모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던 일본의 조선침략 과정과 그에 대응한 조선군의 전쟁수행 과정을 실록과 정사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임진왜란을 통해 화승총의 위력을 깨닫게된 조선이 그로 인해 군사국방, 사회적 측면에서 어떤 변화를 하게됐나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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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1592년)・부산진순절도(釜山鎮殉節図)
왜군을 실은 전선이 새카맣게 몰려든 부산포에, 화승총으로 무장한
왜병들이 부산진성을 공략하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 왜(倭)의 조선침략군 숫자는 30만명 내외
국내외 기록을 종합해보면 왜국이 임진왜란에 동원한 침략군 숫자는 수군을 포함
▲ 임진년 : 15만명 - 17만명 ▲ 정유년 : 12만명 - 14만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상륙한 왜병 숫자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고 있음에도
2만명의 여유병력을 추계합산한 것은 한국과 일본간 지리적 근접성에 기인한다.
전쟁기간중 왜는 수시로 보충병력을 실어 대한해협을 왕래했기 때문이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출진한 함대는 일단 대마도에 도착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부산포로 출정했다. 일본의 혼슈(本州)나 큐슈(九州)에서 출항한 함선들은 단지 노를 저어
대한해협을 건넜기 때문에, 대마도까지는 최소한 만 24시간 이상 소요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꾼들의 숫자 및 해풍, 해류 등에 따라 사정은 달라진다.
일본측 기록에는 전쟁기간중 긴급한 연락업무를 담당하거나
전선보다 빠른 '쾌속선'을 작전상 운행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대마도에서 부산포까지는 7-8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고니시 유키나카(소西行長)가 이끈 제1번대는 임진년 4월14일 오전8시
병선 700여 척에 18,700명을 나눠 태우고 대마도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당일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 곧바로 부산포에 상륙했다.
상륙군 규모는 약간 유동적이었다.
1592년 전쟁개시 두달전인 1월5일, 토요토미가 휘하장수들에 하달한
최초의 전투동원령에 의하면 19개부대 총병력 281,000명이란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3월18일자 상륙부대 구성은 모두 9개 부대 158,000명으로 구성됐다.
또 6월에 기록된 조선침략군 편제표에는 8개부대 13만여명으로 수정됐다.
왜군의 실질적 총사령관 역할은 선봉부대(제1번대) 장수가 맡았는데
임진년의 경우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그 임무를 맡았으나 5년뒤인 정유년에는
평양성 패전책임을 물어 고니시는 2번대 지휘장수로 밀려났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제1번대 장수자리를 차지했다.
명목상 총사령관은 임진,정유년 침공시 모두 우키타 히데이데(宇喜多秀家)가 맡았다.
1592년 6월의 임진년 침공의 최종기록본 부대편제 및 병력수는 다음과 같다.
1 번대 :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휘하 18,700명
2 번대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 22,800명
3 번대 :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 25,000명
4 번대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휘하 8,700명
5 번대 : 하치스카 이메마사(蜂須賀家政) 휘하 7,200명
6 번대 :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휘하 9,200명
7 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 15,700명
8 번대 : 우키타 히데이데(宇喜多秀家) 휘하 10,000명
1597년 정유년 침공시에는 왜병 121,000명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1 번대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 10,000명
2 번대 :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휘하 14,700명
3 번대 :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휘하 10,000명
4 번대 :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휘하 12,000명
5 번대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 10,000명
6 번대 :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휘하 13,300명
7 번대 : 하치스카 이메마사(蜂須賀家政) 휘하 11,100명
8 번대 : 우키타 히데이데(宇喜多秀家) 휘하 40,000명
■ (일본기록) 임진년 출병 및 초기전황
당시 왜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감하고,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왕을 대신한
절대권력을 거머쥔 간파쿠(関白)에 등극했다. 토요토미는 150년간의 피비린내나는 내전 기간동안
지방 영주(大名)들이 조직하고 잘 훈련시킨 화승총부대를 한데 끌어모아 총출동시켜
일단 조선을 점령, 그곳을 발판삼아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전쟁계획을 세웠다.
1591년 9월에 토요토미는 휘하 장수들에게 준비명령을 하달했다. 이때부터 토요토미는 전쟁에만
전념하기위해 간파쿠 직을 사임, 누나의 아들로 자신의 양자였던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물려줬다.
1592년1월 휘하장수들에게 출진명령을 내렸다.
그해 2월에 토요토미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조선조정은 답변하지 않았다.
왜군 선봉대가 대마도로 건너갔고 3월12일 부산포 진격을 감행,
3월13일 부산진성(釜山鎮城) 공격을 개시했다.
9개 번대(番隊) 158,000명으로 구성된 왜의 침략군 편성은 다음과 같다.
・1번대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대마도주 소(宋義智; 안내역할 담당) 휘하 18,700명
・2번대 : 가토 키요마사(加藤清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휘하 22,800명
・3번대 : 구로다 나가시마(黒田長政)・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휘하 11,000명
・4번대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 14,000명
・5번대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휘하 25,000명
・6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휘하 15,000명
・7번대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휘하 30,000명
・8번대 : 우키타 히데이데(宇喜多秀家) 휘하 10,000명
・9번대 :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휘하 11,500명
조선출정 기간중 토요토미의 지휘소가 있던 나고야(名護屋)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등이 10만여명을 포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휘하 장수들이 만류했다.
조선에 상륙한 왜병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진격, 연전연승했다.
5월1일 조선국왕이 평양으로 피난갔다. 5월3일 왜군이 한양에 입성할 때는
퇴각하던 조선군이 불을 질러 이미 초토화돼있었다. 왜군은 병력을 나누어 진격,
가는 곳곳을 제압했고 개성을 함락한 뒤 평양을 무혈입성했다.
6월3일 토요토미는 명나라 원군과의 접전을 대비해 군편성을 재정비했다.
■ 화승총 무장비율은 약 20% 추정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 전투형태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센코쿠(戦国)시대 말기의
전투양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칼이나 창으로 맞붙는 백병전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당시 전투사상자 유형을 분석한 결과 활이나 돌, 화승총(鉄砲) 등 소위 '발사무기'에 의해 사상당한
병사가 70%이상이었다고 한다. 예상과는 달리, 닛뽄도(日本刀)는 호신용에 불과했으며
오늘날의 권총같은 용도로 쓰이는 것에 불과했다.
일본은 1543년 화승총이 전래된 이후 10년 만에 대량복제생산을 갖췄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 초반엔 일본전역에 약 30만정의 화승총을 보유, 세계최다 보유국이 됐다.
화승총 화약(塩硝)은 1580년대에 이르러 자체생산을 하기전까지 소요량 전량을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해서 썼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국내산 화약으로 충당했다.
임진왜란 당시는 조선이나 일본군사력의 주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활은 전문훈련을 받은 고급무사가 쐈고, 일반 잡병은 창을 썼다.
당시 왜군이 조선군과 질적으로 차이를 보인 것이 바로 화승총부대(鉄砲隊) 편성이었는데,
화승총부대는 주력부대가 아니라 전체병력의 약 20%에 불과한 '기동타격대' 였다.
이로 미루어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을 통해 조선에 건너온 화승총은
약 5만-6만정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결국 화승총부대로 말미암아 조선상륙 왜병은 개전초기부터
승승장구할 수 있었고, 조선군에게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혔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울산성 전투에 참가한 가토 야스유키(加藤安之)란
화승총 포수는 하루에만 280발의 화승총 실탄을 발사했다고 한다.
화승총 포수 한명이 휴대할 수 있는 탄환은 30발이 최대한이었다. 때문에 화승총부대를 운용하려면
기존 재래무기를 휴대한 부대와는 달리 화약과 탄환, 화승(심지)을 따로 수송하는 병참수단이 필요했다.
한 차례의 교전이 벌어지면 개별 휴대탄환의 3배인 90발 정도가 소요됐다.
왜군 화승총 부대는 10명당 1개 꼴로 '탄약상자'(玉薬箱)를 추진했는데
그 속에는 900발가량의 탄환과 약 3kg의 흑색화약이 들어있었다. 탄환무게만 9kg이어서
상자 총무게는 12kg에 달했다.
이 탄약상자는 노역꾼이 끈으로 묶어 등 뒤에 짊어졌는데, 끈은 조금만 손보면
화승심지로도 쓸 수 있었다. 조선상륙뒤 화승총부대의 탄약상자는 사로잡은 조선장정이
운반하거나 말이나 소에 실어 운반했다.
■ 해전에서는 '판옥선'의 조선수군 우세
일본육군은 화승총으로 무장, 개전초기부터 월등한 전력을 과시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수군에게 밀렸다.
거기에는 이순신장군의 탁월한 전술도 있었지만 일본 전선보다 탄탄했던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승패를 가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일본수군의 전함가운데 가장 컸던 배는 아타케후네(安宅船)였다.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뜻이 담겼는데,
일본 안택포(安宅浦)에서 지어져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의 안택선은 30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약 60명 정도의 전투요원이 승선했다. 안택선은 바닥이 평평한 이세형(伊勢船型; Blunted Stem)과 뾰족한
후다나리형(二成船型; Pointed Stem)이 있었다. 노젓는 수부(水夫)는 노(櫓) 당 1명이 맡았고,
80개의 노를 가진 후다나리형 아다케라면 80여명이 노를 저었다.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거북선의 저판(底板; 배밑바닥) 길이는 64.8자(약 20m)였다.
또 광해군 7년경의 판옥선 저판 길이는 47.5-70자(약 14-21m)로 기록돼 있다.
조선후기의 통영상선(통제영 기함)의 저판 길이가 90자(약 27m) 였다.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 안택선과 크기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어서 개펄등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항해가 용이했고,
일본전선의 얇은 삼나무판보다 훨씬 두꺼운 소나무와 참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무겁긴 했으나
전선끼리 충돌할 경우 일본 판옥선은 깨지고 말았다.
■ 왜란초기 조선의 방어진지가 순식간에 뚫린 이유
개전초기 부산포에서부터 왜군의 침공에 이렇다할 반격도 하지못하고 조선육군이 참패한 이유는
그때까지 조선육군의 기본전략이었던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실패에 기인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제승방략은 "적이 침공할 경우 해당고을 수령이 각각 병력을 동원, 자신의 진을 떠나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적군의 침략에 대처하는 체제" 가 기본이다. 그에 따라 군대를 한군데 모아놓고 중앙파견군을 기다리며
수성한다는 전략으로 막았지만, 왜군이 처음 상륙하면서 화승총으로 무장한 선봉대가 동래성을 함락하자
나머지 진격로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길을 내주고 만 셈이었다. 당시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좌병사 이각 등은
동래성에만 군사를 집결하고 고을사람들까지 동원됐다. 임진왜란이후 조선군의 방어체제는 제승방략에서
진관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한 군데 군사를 집결하는 것이 아니라, 진과 관을 설치하고 지역을 세분하여
방어전선을 연결하는 '진관방어' 시스템으로 바뀌게 됐다.
■ 조선왕조실록의 왜란초기(1592년) 화승총관련 기록
5월 1일 ; 여주의 원호 - 화승총으로 무장하지 않은 일본육군을 섬멸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1533-1592) 가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의 신륵사에서 왜군을크게 무찔러 전란후 첫 승리다운 전과를 올렸다. 조방장이란, 장군을 보필하는 부장수을 일컫는다.
원호는 여강의 벽사(甓寺)에 주둔하여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이 급히 원호를 불러 본도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원호가 떠나자 적이 비로소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그 뒤 원호가 다시 와서 고을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적이 구미포(龜尾浦)에 주둔한 것을 보고서
새벽을 틈타 습격하여 50여 급(級)을 베니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구미(龜尾)에 주둔한 왜적은 조총(鳥銃)이 없고 오직 활과 칼만 가졌는데 성질 또한 잔인하고 포악하여
만나는 조선사람을 모두 살상해 "백정왜"(屠子倭)라 불렸다. 원호가 급습하니 적이 집 안에 있으면서
활을 쏘았는데 관군(官軍)이 포위하고는 나오는 자마다 번번이 사살하였으므로, 적이 궁지에 몰려
모두 죽었다. 이 전투로 인해 적의 장기는 오직 조총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9월 1일; 황해도연안 이정암 - 왜군격퇴
왜적이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니,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그들을 격퇴시켰다.
왜적장수 갑비수(甲斐守) 풍신장정(豊臣長政) 등이 성을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며 수천 개의 조총(鳥銃)으로
일제히 사격하니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이정암은 태연 자약한 모습으로 성가퀴를 지키는
조선군에 명하여 경솔히 활을 쏘지 말고 적이 성에 기어 오르거든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명령했다. 문짝·다락 등을
뜯어 방패(防牌)로 삼고 쌓아둔 풀을 묶어 횃불을 만들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 어린이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적이 시초를 참호에 채우고 올라오면 횃불을 던져 태우고, 적이 긴 사다리로 성에 오르거나 판자를 지고 성을 훼손시키면
나무와 돌로 부수고 끓는 물을 퍼붓게 하니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이 남산에다 높은 다락을 세워 판자 벽에 구멍을
내고 내려다 보며 총을 쏘니, 성 안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흙담을 쌓아 막았다. 적이 밤 안개를 틈타 몰래 서쪽 성으로
기어 오르는 것을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가 횃불로 에워싸 40여 명을 태워 죽였다. 포위당한 지 4일 동안 밤낮으로
크게 싸웠는데 적도 탄환이 떨어져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성 안에서는 또한 승리한 기세를 틈타 환호하며 쇠북을 치자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적이 이에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하니,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하여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10월 1일; 조총과 단검으로 무장한 왜병은 기습과 속공으로 영남지역을초토화
왜적 4-5만의 군사가 영남일대를 점령하고 노략질을 하다.
왜적은 척후병을 사방으로 보내어 깊고 험준한 곳을 끝까지 수색한 다음 우리 군사가 웅거할 데가 없게 한 뒤에야
형편대로 진을 세우고 사방으로 흩어져 살해하고 노략질하였다. 좌도는 동래(東萊)로부터 위로 현풍(玄風)까지 10고을,
우도는 웅천(熊川)으로부터 위로 문경(聞慶)까지 12고을을 주둔하는 진으로 삼았는데 한 주둔지에 군사가 천 명을
넘지 않았으며, 해구(海口)의 몇 진에만 각기 수천 명을 주둔시켰으니, 대략 영남에 머문 군사는 4만-5만 명이었다.
그들의 장기(長技)는 조총(鳥銃)과 단검(短劒)뿐으로, 항상 엄습하고 속히 진군하는 것으로 승리하였다.
또 밤낮으로 몰래 부대를 바꾸어 계속 왕래하여 그들의 수효가 많게 보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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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군사측면의 임진왜란 개요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시각 등을 요약, 정리
1592년(선조임금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전쟁을 일컫는다. 전쟁개시후 1차로 임진년에 침입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정유년(1597년)에 감행한 2차 침입은 ‘정유재란’이라 구분해 부르기도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임진-정유년 양대 전쟁은 한데 묶어 ‘임진왜란’이라 칭한다. 일본은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 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 기록하고 있다. 각각 자국의 년호를 딴 명칭이다.
일본의 침공준비 150년간의 내전(전국시대)을 거친 일본은 잘 조직되고 훈련된 50만명 이상의 상시동원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신무기 조총(鳥銃)의 대량생산을 통해 준비를 했다. 15세기 후반부터 서구 해양세력의 유입으로 일본민간상업도시가 발전했고 그로 말미암은 경제력의 축적이 대규모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 있게 했다.
전국의 혼란을 수습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전역을 통일하고, 오랫동안 전쟁으로 축적된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일본내 신흥 세력을 억제하고 국력을 한데 모아 대륙침략 기치를 내건 전쟁의 출발이 곧 임진왜란 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먼저 침공하여 전쟁비축물자 생산기지로 활용하고, 거기서 확보된 여력으로 대륙(명나라)을 침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의 대비 임진왜란은 일본의 기습침공이 아니었다. 대마도주를 비롯한 여러 수장과 우리 조정의 신하들이 ‘일본의 조선침공’을 사전에 간곡하게 전쟁대비를 호소했고, 조선조정은 묵살했다. 전쟁직전에는 왜관거주 일본인들이 전원 철수하는 등 전쟁징후도 확연히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조정에 의한 군사 방비책은 전쟁이 발발하던 날까지 전무했다. 연산군이후 명종임금대 부터 시작한 떨거지 중신들 간의 4대사화(四大士禍)를 비롯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 정쟁소모전이 계속됐고 조선초기에 구축했던 국방체제마저 붕괴된 채 변방수비는 허물어졌다. 비변사라는 국방군사 합의기관을 설치했지만, 정상기능은 발휘하지 못했다. 전쟁을 수행할 물자비축은 물론 조정의 전쟁수행 의지도 전무했다.
조선조정의 전쟁준비는 김수(金睟)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임명해 구닥다리 재래식 무기를 정비하고 돌담 성채(城池)를 수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립(申砬)을 경기· 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장비 시설을 점검했지만 때는 늦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해전에 대비한 전비(戰備)를 갖추었던 것이 유일한 ‘전쟁준비’였다.
일본침략군의 구성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군 규모는 30여만명이었다. 전쟁지휘소는 나고야(名古屋)였고 10만명의 병력을 나고야 방어군으로 우선 편성했다. 또 교토(京都)에 3만명의 친위방어군을 배치했다.전투병을 실어 나르고 해전을 치를 수군병력은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지휘한 9,000명이, 구니베(宮部長熙) 지휘의 12,000명은 조선반도 침투시 후방 경비임무를 맡았다. 하야가와(早川長政)가 지휘한 선단(船團)관리부대는 부산에서 왜군 전선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상륙군은 훈련된 육군정예병 158,700명으로 9번대(番隊)로 나눠 각 번대의 주장(主將)이 지휘했다.
제1번 대 : 주장(主將) 고니시(小西行長) 휘하 18,700명 제2번 대 : 주장 가토(加藤淸正) 휘하 22,800명 제3번 대 : 주장 구로다(黑田長政) 휘하 11,000명 제4번 대 : 주장 모리(毛利吉成) · 시마즈(島津義弘) 휘하 14,000명 제5번 대 :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 휘하 25,000명 제6번 대 :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휘하 15,000명 제7번 대 : 주장 모리(毛利元之) 휘하 30,000명 제8번 대 :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 휘하 10,000명 제9번 대 : 주장 하시바(羽柴秀勝) 휘하 1,1500명
● 요약 전투일지
화승총을 앞세운 왜군의 초반 승승장구 고니시의 제1번대는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1592년 4월14일 오전8시 일본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고 그날로 부산포를 침입했다. 일본군에 대항한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은 패하여 전사했다. 왜군은 이어서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했다.
고니시 부대는 조선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한반도의 가운뎃길(中路)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조선군 순변사 이일의 관군을 격파, 조령으로 향했다. 가토가 지휘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 제1번대의 부산상륙 성공보고를 받고 19일에 부산에 상륙했다. 가토는 경상좌도의 장기·기장을 거쳐 좌병영 울산을 함락 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 - 문경으로 빠져 고니시의 제1번대와 합류해 충주로 진입했다.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우도를 따라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 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에서 청주방면으로 침공했다. 모리·시마즈의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뒤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향으로 진격했다. 후쿠시마의 제5번대는 제4번대를 뒤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공, 고바야가가 지휘했던 제6번대와 모리가 인솔한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했다. 우키다가 지휘한 제8번대는 임진년 5월초 부산상륙하였고 한양함락 보고를 받고 급히 북상했다. 제9번대는 4월24일 일본 이키도에 잔류하며 침략을 대기했다.
일본군의 부산 상륙소식은 4일 뒤에야 조선조정에 알려졌다.
일본군의 한양함락은 고니시의 제1번대가 5월2일, 가토의 제2번대가 5월3일이었다. 개성으로 피난갔던 선조임금 일행은 한양함락소식을 듣고 다시 평양으로 피난갔다. 이어 조선군의 임진강방어도 실패하고 개성이 함락되자 평양을 떠난 선조임금은 백성들만 사지에 놓아두고, 압록강하구 의주까지 도망치듯 피난길에 올랐다.
임진강을 건넌 왜군은 3갈레로 나눠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제1번대는 평안도 방면으로 침공,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지로 삼았다. 가토의 제2번대는 함경도로, 구로다의 제3번대는 황해도로 진격해 해주를 본거지로 진을 쳤다.
무능하고 대책없던 조선조정을 대신한 조선백성의 군사적 결집이 이루어진 것은 임진년 6월부터였다.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해 무기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또 미리 준비된 이순신 수군이 활약을 펼치면서 전세를 만회하는 기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임진년 10월에는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이 민관군 합동으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벌여 왜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병과 이순신의 조선수군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2,600여 명에 달했다.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숫자다. 의병장으로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 (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馣)·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 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 (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 (朴春茂)·김해(金垓) 등이 활약했다.
조선수군의 활약은 임진왜란의 전투분위기를 한 순간에 바꾸었다. 왜란직전에 조선이 보유한 전선은 판옥선(板屋船) 250여 척으로 추정된다. 경상·전라 수군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1592년 5월4일에서 8일에 걸친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 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에서 적선 37척을 불사르고 파괴하는 대승을 거뒀다. 조선수군은 경상 1명에 불과했다.
이순신의 제2차 출동은 5월29일에서 6월10일까지.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4차례 해전을 통해 왜선 72척을 침몰시켰고 왜군 88명의 목을 땄다. 조선군 피해는 전사11명, 부상 26명에 불과했다. 사천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을 진수, 참전하게 되면서 왜군 수군주력이 괴멸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다.
이순신의 제3차 출동은 7월6일부터 13일 사이였다. 이억기와 전선 90여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 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했다.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왜군 대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 (鶴翼陣)으로 총통(銃筒)을 발사하자 왜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선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층각선(層閣船; 대형누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거나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수군은 안골포(安骨浦)에 정박중인 왜선을 포격기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왜군잔병을 소탕했다. 12일에는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케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해전에서 구키가 지휘한 왜 수군은 대패했다. 3차 출동에서 이순신은 왜선 100여 척을 격파, 나포하고 왜군 250명의 목을 땄다. 임진왜란 개전후 최대전과였다.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지만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 왜군의 서해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제4차 출동은 8월24일부터 9월2일까지 전개됐다.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왜선 본거지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 (絶影島:지금의 부산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척을 먼저 파괴했다. 이어서 왜선 470여척이 정박했던 부산포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돌진, 100여척을 불사르고 파괴했다. 왜군은 배를 버리고 상륙해 육지에서 하루종일 조선수군 함선과 교전을 벌였다. 본거지 부산을 기습당하자 왜군은 이후 이순신과의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만 교전하려 들었다.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은 의병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투를 변환시키는 활력소가 됐다.
수준이하 전투력의 명나라 원군 의주까지 도망, 피신한 선조임금은 명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 구구절절 읍소하는 형식의 구원병요청에 매달렸다. 명나라는 국경수비대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인솔하는 5,000명 원군을 끌고 고니시의 제1번대 본거지였던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1592년 7월15일 평양에 도착한 명나라 원군은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다.
이후 명나라는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파견, 조선을 제치고 일본군과 단독 휴전협정에 나서는 등 상식이하의 짓을 계속했다. 명나라 조정은 화전(和戰)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이여송(李如松)을 동정제독(東征提督)삼아 2차원병을 보냈다. 이여송은 43,000여 명군을 이끌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이여송의 동생)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1593년 1월 평양부근에 이른 이여송은 조선의 순변사 이일과 별장 김응서가 이끈 관군과 휴정 휘하의 의승군 수 천명이 합세해 1월28일 평양성 공격을 개시했다. 조명 연합군의 맹공으로 고니시 등은 내성(內城)을 불지르고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 얼음을 밟고 도주했다.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이 모란봉격전에서 수많은 왜군의 목을 따 평양수복에 도움이 됐다.
이여송은 남진을 계속하여 개성을 무혈입성하고 한양까지 의기양양하게 진격하다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속칭 숫돌고개)에 정예병을 매복시킨 왜군 조총병의 급습으로 대패하게 됐다. 이때부터 이여송은 왜군과의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오히려 조선조정에 거만하게 구는 증 갖은 트집을 잡으며 군림하려 들었다.
전라감사 권율(權慄)은 명군과 함께 한양수복을 위해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배수진을 쳤다. 이 소식을 접한 왜군은 2월12일 한양의 왜병 대군을 동원, 일시에 공격했다. 그러나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이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뒀다. 임진년 10월의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해전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이 됐다.
명나라 원군은 오만방자하게 조선조정 몰래 심유경을 다시 한양의 왜군본거지에 보내 휴전협정을 추진했다. 일본군도 전의를 상실했던 터여서 4월18일 한양에서 철수, 강원·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서생포 (西生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지역에 성을 쌓고 화의진행을 기다렸다. 심유경은 왜군을 따라 토요토미의 본영이 있는 나고야에 들어간 후 2, 3년간 명나라와 일본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토요토미는 조선에서 붙잡아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명나라에 화의조건으로 아래의 4가지를 요구했다.
①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貿易證印. 명나라와 일본의 공식 해상무역)을 복구할 것 ③ 조선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심유경은 명나라 조정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터여서, 어이없게도 “일본이 명나라의 신하국이 돼 조공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허위 날조하여 명나라 임금에게 보고했다. 명나라는 심유경보고에 따라 1596년 “토요토미를 일본국 왕에 책봉하며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노라”는 희극을 연출했다. 토요토미는 분노하여 명나라 사신을 돌려보내고 1597년 정유년에 다시 조선침략을 계획했다.
정유재란 - 14만 여명의 왜병 재침략 정유년 1월15일 가토 · 고니시 · 대마도주 소 등을 장수로 왜병 선발대 14,500명을 조선에 상륙시켰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 옛 진지)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해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주둔했다. 고니시는 1566년 말에 미리 조선 두모포(豆毛浦)에 상륙, 정유년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 옛 진영)을 수복하고 장기점령을 획책했다.
조선조정에서는 또다시 모함과 질시가 판을 쳤고, 한산도 통제영(統制營)에서 남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을 갖은 모략을 덧씌워 무고죄를 물어 하옥시키기에 이르렀다.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 원균이 후임이 됐다. 정유년 3월중순부터 왜군 대병력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 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대부분의 장수가 임진왜란 당시의 돌격대장이었다. 총병력은 141,500명이었다. 왜군의 수군도 임진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했다.
왜군은 동래·기장·울산 등을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했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재차 조선원병을 파견했다.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정유년 6월에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로 보내 진지를 구축케 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서 대대적인 모병을 했다. 또 명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 (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명군 장수 양원을 보좌해 남원을 수비하게 했다.
정유년 4월에 왜국 수군은 조선근해로 들어왔다. 이순신의 통제사직을 맡은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식한 전투지휘로 왜군에 잇달아 패전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이 전사했다. 이순신장군이 탄탄하게 쌓았던 한산도 통제영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정유년 7월28일부터 우키다를 대장으로한 왜군 5만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왔다. 모리를 대장으로 또 다른 5만명 왜군이 초계·안의를 거쳐 명나라 원군 모국기의 본거지 성주를 우회하여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했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14일부터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격전 끝에 8월16일 남원은 왜군에 함락됐고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만 데리고 간신히 도망쳤다.
원병 2,000명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 유격 진우충도 성을 버리고 도망, 왜군은 전주를 무혈점령했다. 모리 휘하 왜군 병력도 전주에 합류했다. 한양에서는 백성들이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남쪽 패전으로 도망치듯 북상한 명나라 원군이 한강을 방어하면서 선조임금은 궁궐에 머물렀고, 평양에서 철수한 명군 양호의 병력도 한양으로 배치됐다. 명나라 장수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보내 9월5일 직산북방의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교전, 승리하여 왜군의 북상을 차단시켰다.
남해안 조선수군은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9월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거둬 일본군의 남해안 서진(西進)을 원천봉쇄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진격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매섭게 추운 조선의 겨울을 대비하러 10월부터 남해안에 집결했다. 그 숫자가 10수만에 달했고, 왜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았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분할 주둔했다.
명나라 원군은 남원함락 이후 적극적으로 참전, 육군이외 수군까지 원병에 합류했다. 이순신은 정유년 명량대첩 이후 1598년 2월에 고금도로 본영을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 난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이순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불과 몇개월만에 수만호에 이르는 민가가 이순신 진영 주변에 정착했다. 임진왜란 초기 한산도 통제영시절을 능가할 정도였다. 1598년 7월에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이끌고 이순신의 고금도 본영에 합세했다. 명나라 수군은 방자하기 이를데없어서 이순신을 돕기는 커녕 못된 짓만 골라서 해댔다. 이순신은 이를 잘 대처했고, 나중에는 명나라 수군이 이순신의 지휘를 따르게 됐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막내린 임진왜란
병들어죽은 왜국 전쟁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구국일념으로 전장에서 산화한 이순신
1598년 8월18일, 조선침공의 원흉인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었다. 토요토미는 조선과 명나라가 사망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고 조선에서 병력을 철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에 따라 전세가 일시에 뒤바뀌었다. 왜군은 이제 안전한 퇴로를 마련하여 철수를 하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
명나라 원군의 저질스런 행태가 조선군의 설욕기회를 빼앗아 갔다. 명나라 원군의 유정은 조선군 몰래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안전하게 도주하도록 뒤를 봐주었다. 명나라 수군 진린도 일본군의 뇌물을 받아 수군의 퇴로를 열어주려 했으나 이순신이 미리 알아차리고 설득, 마음을 돌리게 했다.
고니시의 구원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전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598년 11월18일 심야 조류를 타고 남해노량을 습격했다. 이날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했다. 사경(四更)에 명군과 함께 출진, 노량에서 왜군 함대 절반을 태우고 부쉈다. 나머지 왜선이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도망갔으나, 퇴로가 막히자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지휘했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왜군의 화승총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조카 완(莞)이 지휘봉을 대신 잡아 왜선 200여 척을 처절하게 응징, 짓이기고 불태웠다. 배에서 탈출한 왜군의 목을 수도 없이 땄다. 왜군 지휘장수 시마즈 등은 겁에 질려 50여척만으로 겨우 도망에 성공했다. 고니시도 전투 중 묘도(猫島)로 몰래 도망갔다.
두 사람의 죽음 - 7년간의 임진왜란 대미(大尾)는 그렇게 마감됐다.
* 이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관련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조, 강화 화승총동호인회가 발췌하고 집약, 알기쉽도록 문장수정을 거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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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實錄) 조선군 화승총(2) - 임진왜란 초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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