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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식

최영장군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7.07.04|조회수39 목록 댓글 0

이성계의 장남 방우와 차남 방과,이지란의 아들 화상과 최고시첩목아 등은 우왕과 함께 성주에 있다가 회군 소식을 듣고 탈출해 이성계의 군중에 합류했다.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당황했다.이성계가 회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려라는 체제의 틀 속에서 바라보니 그 틀을 뛰어넘은 이성계와 정도전의 의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회군한지 이레쯤 후 이성계 일파는 개경 인근에 도착했다.이성계는 억류했던 김완을 우왕에게 보냈다.

'우리 현릉(공민왕)께서 지성으로 대국을 섬겼고, 천자도 일찍이 우리에게 군사를 가할 뜻이 없었는데, 최영이 대신이 되어서 조종이래로 대국을 섬기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대군을 몰아 상국을 범하려고 했으니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를 엎어 놓을 것입니다.'

우왕은 진평중을 보내 최영을 제거하라는 요구를 반박했다.

'강토는 조종에게 받은 것인데,어찌 쉽게 남(명나라) 에게 줄 수 있는가. 군사를 일으켜 막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에서 여러 사람과 상의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는데,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가.비록 최영에게 핑계를 대지만 최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조민수와 이성계)의 무리가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해 수고하는 것도 경의 무리가 아는 일이다.교서가 이르는 날에는 완미한 것을 고집하지 말 것이며,뉘우쳐 고치는 데도 인색하지 말아서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시종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라.'

그러나 왕명을 어기고 회군한 군사가 임금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두진영 사이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전열을 정비했다.회군 소식을 듣고 동북면 사람들과 여진족 등1천여 명이 이성계에게 가세했다.
우왕도 군사를 모집했으나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우왕은 여러도에 파발을 보내 군사를 보내게 하고,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거리에 방을 붙였다.

'조민수 등 여러 장수를 잡는 자는 관가,사가의 노예를 막론하고 큰 벼슬과 상을 주겠다.'

최영의 군사는 도성문 밖에 진을치고,이성계의 군사는 승인문밖 산대암에 진을 쳤다.

예상과 달리 백전노장 최영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이성계는 유만수를 보내 승인문 쪽을 공격하고,좌군은 선의문쪽을 공격하게 했으나 최영은 모두 격퇴했다.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각 도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전세가 역전될 수 있었다.

유만수가 패주하자 회군 군사들은 동요했다. 이성계는 동요를 잠재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유만수의 패전이 다급하게 전해져도 이성계는 장막 가운데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주위에서 여러 번 재촉하자 천천히 일어나 식사를 하고 나가 군사를 정돈했다.

백 보쯤 되는 곳에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이성계는 활을 겨누었다.시위를 떠난 화살은 작은 소나무를 꺽었다.그제야 군사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진군했을 때 조민수의 군사는 영의서 다리에서 최영의 왕사에게 쫓기고 있었다.이성계는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앞세우고 선죽교를 거쳐 남산에 올랐다.남산에 웅거했던 최영의 부하 안소가 이성계의 군사에게 무너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전세가 불리함을 읽은 최영은 우왕과 영비를 모시고 궐내의 팔각전으로 퇴각했다. 이성계의 부하 곽충보등이 대궐 안으로 난입했다. 최영은 우왕을 보호하기 위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최영이 투항하려 하자 우왕은 눈물을 흘렸다.

"경이 가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오?"

최영이 요동정벌군과 함께 가고자 했을 때도 같은 말을 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최영도 어쩔 수 없었다.
최영은 우왕에게 마지막 예를 표한 후 투항했다.

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했다.
"이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니오.그러나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이 피로하고 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울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고봉현(경기도 고양)으로 귀양보냈다가 합포와 충주로 다시 옮겼다.
최영의 귀양지를 자주 옮긴 이유는 한곳에 오래 머물면 세력을 모아 봉기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로서는 최영을 살려둘 수 없었다.
왕명을 거역한 인물은 최영이 아니라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왕조국가에서 왕명은 천명이었다.
최영이 살아 있는 한 언제든지 '왕명을 거역한 역적 이성계를 타도하자'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그해가 다 가기 전에 최영을 순군옥에 가두고 참살한 것은 이런 두려움의 발로였다. 권세가들이 산천과 군현을 경계로 삼는 대농장을 차지하는 중에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최영의 73년 인생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야사에는 실제로 그의 무덤에 풀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어찌 풀이 무덤의 임자를 골라 나겠는가마는 최영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신망이 그런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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