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과 신숙주,김질
지금까지 내가 역사 글을 써 오면서 현재시각으로 보았을 때 우리 선조들이 당시 행했던 일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답답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그들 행위를 현재 내 시각으로만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 당시 사회저변에 흐르는 분위기, 즉 시대적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단종을 향한 사육신의 가문 몰살까지 몰고 온 충절은 고지식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사육신에 대한 평가를 현재 잣대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했을 까?
당시에도 사육신과 같이 동문수학을 했고 단종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문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 중 사육신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 시대를 본 유학자들도 있었다.
신숙주와 김질이었다.
성삼문과 신숙주가 살았던 시대는 유교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철학으로 완연히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아직은 조선후기 성리학처럼 유학이 마치 탈레반처렁 교조주의 화 된 것은 아니었다.
신숙주, 김질등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학자였으나 한명회, 권람등과 같이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또 그들은 성리학적 사상에서도 조금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학풍을 지녔다. 그들은 후에 훈구파라고 불리우게 된다. 훈구파는 도덕적인 면에서는 많이 떨어져 개인치부를 마다 하지 않았다.
성삼문, 박팽년등 사육신과 남효관, 김시습등 생육신들은 성리학에서 명분과 절개, 의리를 최우선으로 했다. 또 그들은 도덕적 이상주의와 청백리를 꿈꾸며 성리학 기본사상에 철저했다. 이들을 계승한 유학자들을 우리는 사림파라고 부른다. 당시만해도 이들은 훈구파에 비해 현실감에서 많이 떨어졌다.
성삼문 신숙주가 살았던 그 시대에는 훈구파나 사림파의 구분은 없었다. 사림파는 수 십 년이 지난 성종때야 나타난다. 그 이전 세조시대는 한명회, 신숙주등 훈구파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성삼문, 신숙주 두 사람의 정신세계를 잘 살펴보면 성리학이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지는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주어진 현실상황에서 수양에 의한 계유정난을 지지했거나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대처하는 기준은 그들 나름 소신과 가치관에 따라 행했다고 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들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은 그 사건을 보는 이들의 각 자 서있는 위치와 가치관에 따라 달라져 왔다.
그러나 사육신이 사면되고 난 후 수백년 동안 조선은 물론 현재까지 와서도 우리는 사육신 삶이 옳았고 그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우리 학창시절에도 그렇게 배웠다.
이에 비해 신숙주는 쉽게 변해 짓이겨 만두 속에 집어 넣어야 할 숙주나물로 비유 될 만큼 백성들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김질은 야비한 밀고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한명회는 오랫동안 희대의 간신으로 남아 있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 바꿔 생각 해 보자!
내 개인적시각으로 보았을 때도 단종복위운동에 나서다 실패하여 비참하게 참살당한 사육신에 대해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또 그들의 의기를 높이 산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의기가 진정 우리 민족이 수 백년 동안 만고의 충신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두고 따라야 할 만큼 충분히 명분있는 일을 하였는가에는 회의가 든다.
당시는 이씨 왕조시대였다. 이씨 왕실 혈통을 지녔다면 왕이 누가 되든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였다.
사육신이 유일한 왕으로 추종했던 단종의 혈통도 그렇다. 단종 증조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도 형제들을 죽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동일한 시기에 조선사대부들이 하늘같이 모시던 명에서도 영락제에 의해 '수양이 친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일'과 똑같은 일이 먼저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세계역사상 왕조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실 혈통끼리 살육을 겸한 왕위쟁탈전은 비일비재했다.
만약 단종이 성장해서 진정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한 어진 왕이 되었는 데 수양일파가 그런 단종을 쿠데타로 몰아 내고 압제가 심한 정권으로 들어 섰다면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그 당시 상황에서 보면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이 된 것은 왕실혈통을 지닌 왕족들끼리 왕위쟁탈전이었을 뿐이다.
사육신 단종복위운동도 조선사대부들 개인적 명분과 의리. 절개와 함께 하고 있지만 사실은 왕실내부권력쟁탈전의 일종이었다.
계유정난이나 단종복위운동 둘 다 조선사대부들에게는 권력투쟁 중심에 있는 왕과 왕실만 있었고 백성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육신들도 마찬가지 였다.
사실, 왕조시대 왕을 바꾸는 역모나 쿠데타는 어떤 명분이든 나름의 명분은 가지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당시 현실에서 그 명분의 옳고 그름은 쿠테타의 실패와 성공에 달려 있다. 실패하면 역모로 몰려 비참하게 죽었고 성공하면 공신이 되어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렸다.
많은 세월이 흘러야 역사는 그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당시는 성공과 실패만 있었을 뿐이다.
또 그 객관적 평가도 시대상황과 각자 서있는 위치에서 역사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계유정난에서 보듯이 한명회, 신숙주는 정난을 성공시켜 공신이 되어 자신들 당대는 물론 자손들까지 부귀영화를 누린다.
사육신들 또한 계유정난 때 핵심으로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는 수양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유를 막론하고 그들은 세조시절까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사육신!?
그들은 계유정난을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 수양 편에 섰을 까?
노회한 김종서, 황보인등이 어린 단종을 농락하고 있다고 보고 그들만을 제거하고 나서 수양이 중국 주나라 주공
처럼 해주길 바랬을 까?
(주공은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면서 나라를 잘 다스리다 조카가 성인이 되자 섭정자리를 물러났다. )
사육신 그들은 순진한 생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수양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까지 차지하지는 않으리라 믿었을 수도 있다.
사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어린 단종이 왕으로 있거나 수양이 왕이 된다 한들 별 차이가 없었다.
누가 왕이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배 따숩게 잘먹이고 잘살게 하면 백성들에게는 최고였다.
왕조시대 왕위 쟁탈전은 지배층끼리 자기들만의 권력쟁탈전 이었을 뿐이다.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 또한 다른 의미로 보면 왕조시대 왕위쟁탈전인 권력다툼 일종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 사육신이나 고려시대 정몽주처럼 오랫동안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 받는 인물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당대 권력을 빼앗으려하는 자들에게 사육신이나 정몽주는 가장 위험스런 인물들이지만, 권력을 가지고 난 후 그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 들에게 사육신이나 정몽주와 같은 인물이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본보기가 된다.
이런 이유때문에 정권차원에서 사육신을 150년 가까이 역적으로 몰다가 후대에는 정권유지 차원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내 개인적으로 냉철하게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 때 목숨을 잃은 의병장,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해준 것도 없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없는 들꽃 같은 의병들, 구한말의 구국의 인물들, 일제시대 때 모든 것을 바쳐 나라의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투사,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민주화시대의 민주투사들 보다 더 사육신을 만고의 충신이며 의리와 절개의 상징으로 치켜세우며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사육신의 삶을 추구하고 그들의 정신을 숭배하게 하는 것 또한 조선사대부들의 겉으로만 드러 난 표면적인 정서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그리고 구한말 시절, 대부분의 조선사대부들이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입으로만 충정을 외쳤다. 현실에서 실제로 한 짓은 너무 많이 달랐다. 임진왜란 때는 전쟁대비보다 당파 싸움에 그리고 도망다니기에 바빴다. 병자호란 떄는 나중 병자호란 편에 쓰겠지만 백성들이 죽어나가던 말던 남한산성에 숨어 명분싸움만 하고 있었다.
구한말 나라를 망국시키고 일본으로 부터 공신대접을 받고 하사금과 귀족작위를 받은 사람 중 90% 이상이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 일당이었다.
이처럼 시대가 바뀌어도 변신의 귀재들인 그들이 호위호식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현실속에서 너무 많이 본 우리나라 일반사람 거의 대부분은 사육신의 비참한 삶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김질의 삶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선호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겉으로는 정몽주와 사육신의 충절과 의리를 치켜 세운다. 그러나 속으로는 신숙주, 김질의 삶을 산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나라는 겉과 속이 다른 '똥구먹 호박씨'들 지도층을 양산하고 있다.
요즈음 정치현실에서도 너무 많이 보는 모습이다.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총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우리나라의 이런 이중적인 정신상태나 태도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조선 중, 후기 사대부들 이었다.
그래도 조선초기 사대부들은 그래도 사육신처럼 한 번 마음 먹은 소신을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명분과 의리, 절개등은 높이 살만한 행위를 했다. 이번 나의 글이 그들의 그런 정신까지 폄훼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밝혀둔다.
그러나 그 명분과 절개가 나라나 백성을 향해 있지 않고 권력투쟁이라는 그들만의 리그에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 까지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고 마는 경우였다면 우리가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글을 썼다.
아까운 사육신 인재들이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에만 너무 집착하지말고 현실적으로 어떤 선택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인지 좀 더 개방적이고 실용적으로 생각했었음 하는 마음이다.
박철홍쓴것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