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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 평전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06.04|조회수223 목록 댓글 1

「전봉준(全琫準) 장군 평전(評傳)」

● 불우한 가계, 아버지와 처의 죽음

1966년에 간행된《천안전씨대동보(天安全氏大同譜)》에 따르면, 전봉준(全琫準)은 천안(天安) 전씨(全氏) 삼제공파(三帝公派) 40대손으로 1855년 12월 3일(음력) 부친 전창혁(全彰爀)과 모친 광산(光山)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봉준이고 항렬명은 영준(泳準)이며 자(字)는 명숙(明淑)이다.

그런데 이 대동보는 그의 아버지가 1845년생으로 전봉준과는 10살 차이고, 어머니는 1848년생으로 불과 8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사실상 이 족보는 크게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전봉준의 위공을 기리기 위해 근년에 새로 만든 족보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기화와 송정수가 1866년에 간행한《천안전씨병술보(天安全氏丙戌譜)》를 인용하여 새롭게 밝힌 바에 따르면, 전봉준은 천안 전씨 삼제공파가 아닌 문효공파(文孝公派)의 지맥인 연산공파(連山公派)에 속한다. 그는 천안 전씨 시조인 전섭(全攝)으로부터 53대손이며, 문효공으로부터는 10대손이다. 이 족보에 따르면 전봉준의 선조 가운데 종6품 선무랑, 정5품 통덕랑의 벼슬을 지낸 인물도 있거니와 그의 집안은 비록 지체가 높지는 않지만 양반의 집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전봉준의 증조부인 전도신(全道信) 이후로는 관직을 지낸 인물이 보이지 않아 대체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병술보》에서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호적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또 전봉준의 족보명이 전병호(全炳鎬)이며 처음 이름이 철로(鐵爐) 자는 명좌(明佐)이며, 철종(哲宗) 재위기인 을묘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병술보》가 부합된 것으로 보인다.

전창혁은 의식 있는 농촌 지식인이었다. 그는 고창 당촌에서 서당 훈장을 지낸 것으로 전한다. 그의 집안을 오지영은『동학사』에서 사림세가(士林世家)라 하였고, 또 그의 아버지가 고부 향교의 장의를 지냈다고도 하였다. 또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과 비슷)이엇다고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적어도 평민 이하의 신분이 아님을 말한다. 곧 향교의 장의나 향청(鄕廳)의 이정(里正)은 평민들이 맡아볼 수 없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또 당시 서원의 유사(有司)나 향교의 장의는 웬만한 신분이나 재산가가 아니면 맡을 수 없었고, 또 상당한 수완이나 줄이 있거나 학식을 겸비해야 한다.

한편《전씨대동보》의 조상 계통을 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는 반족(班族)에 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전씨대동보》에는 6대조 이하에 벼슬상이한 조상이 보이지 않지만, 이것은 잔반(殘班)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 현상일 뿐이다. 전봉준은 이런 신분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글을 읽혔고, 나중에 훈장이나 접장으로 직업을 삼았던 것이다.

모든 ‘영웅 신화’에서 그러하듯 전봉준의 출생 과정에도 몇 가지 ‘전설’이 따른다.

˝전설에는 그 부친 전창혁이 일찍 흥득 소요산 암자 속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와 보였다. 그 후 선생이 탄생한 바 용모가 출중하고 재기가 과민하여 활달한 기상은 급인(及人)의 풍(風)이 있고 강개한 회포는 제세(濟世)의 지(志)를 품었다. 선생은 일찍 시서(詩書) 백가어(百家語)를 아니 본 것이 없이 많이 보았으나 마음에 항상 만족치 못하여 불우지지(不遇之志)를 품고 사방으로 두루 돌아다니다가 병자년 간에 손화중(孫和中) 선생을 만나 도(道)에 참여 세상일을 한번 해보고자 해 북으로 경성을 향하여 정국의 추향을 엿보았고, 또 외세를 살펴본 바가 있었다.˝ - 오지영,『동학사』, 영창서관, 1940년, 168쪽.

전봉준의 출생 이후 성장 과정과 행적을 토대로 판단한다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서배 집안은 아니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다만 반족에 끼는 가계로, 몰락하여 경제적 토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활 유지를 위해 이런저런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태어날 때부터 재기 넘치고 활달한 기상을 가졌으나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라는 별명을 들었다. 열세 살에 지엇다고 전하는〈백구시(白鷗詩)〉를 보면 비범한 수재였음을 보여준다.

〃自在沙鄕得意遊 스스로 하얀 모래밭에 놀매 그 뜻이 한가롭고
雪翔瘦脚獨淸秋 흰 날개, 가는 다리는 홀로이 청추롭다.
蕭蕭寒雨來時夢 소소한 찬 비 내릴 때 꿈속에 잠기고
往往漁人去後邱 고기잡이 돌아간 후면 언덕에 오른다
許多水石非生面 허다한 수석(水石)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
閱幾風霜已白頭 얼마나 풍상을 겪었던가 머리는 이미 희게 되었도다.
飮啄雖煩無過分 비록 번거로이 마시고 쪼으나 분수를 알지니,
江湖魚族莫深愁 강호(江湖)의 물고기들이여, 깊이 근심치 말지어다.〃- 오지영,『동학사』, 영창서관, 1940년, 162쪽.

전봉준이 젊었을 때 가정생활은 상당히 곤궁했다.〈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 합쳐 3마지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 마지기는 약 6백평에 해당하는 면적으로, 당시 빈농층의 일반적인 소유 면적 수준이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모자란 면적이다.

● 형형한 안광, 예리한 관찰력

사실 전봉준의 성장기와 청년기에 관한 자료도 드문 편이다. 어두운 시절 시골의 무명 청소년에 대한 기록이 있을 리 없다. 여기서는 연구자들의 자료와 주위 사람들의 면담을 통해 얻은 단편적인 기록으로 그의 젊은 시절을 꿰맞춰 보기로 한다.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동학당이 “바로 서울로 들어와 외국인들의 간섭이 미치지 못했을 때에 개혁에 착수했다면 서구 혁명의 피가 아시아 동쪽 반도에서 다시 보였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이들에게는 그런 담력과 식력(識力)이 없었다고 했다. 결과에 대해서도 ‘화국(禍國)’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국가에 화를 미쳤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전봉준에 대한 백암의 인식이다.

˝전봉준은 매우 준걸하고 지략이 있는 인물이다. 여러 번 관군을 패배시킨 것을 오산하여 오로지 미신으로써 그의 무리들을 복종시켰는데, 그 무리들은 어렵고 위험한 일을 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 무리에 이르기를 “나는 신기한 부적이 있어 비록 포탄이 비 오듯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부상당하는 일이 없다. 너희들은 이것을 보아라” 하고, 곧바로 소매 속에 탄환 수십 개를 몰래 감추고 비밀히 잘 아는 사람 10여명에게 자신을 포위하여 모두 총을 쏘게 하였다. 실제로는 모두 공포였다. 전봉준이 포위당한 속에서 뛰어나오며 소매를 흔드니 탄환이 어지럽게 땅에 떨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장군은 사람이 아니고 신인(神人)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그 무리들은 그 부적을 차고 총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 박은식,〈갑오동학의 반란〉,《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⑴》, 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회 편, 여강출판사, 1996년, 23쪽.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오소리)에 있는 평민의 가정(어떠한 이는 향리의 가정이라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도 반역 사상가로서 군수의 탐학에 격분하여 민요를 일으켜 군의 관아를 습격하다가 피살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길러낸 가정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 김상기,〈동학과 동학란〉,《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⑴》, 60쪽.

˝봉준의 소년 시대의 조우(遭遇)가 이렇게 비참하였지만 주위의 훈련이 이렇게 비상하여 담력은 두(斗)와 같이 컸고 그 심장은 철석같이 굳어 의분의 장한 뜻, 강렬한 용기는 실로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듯한 괴로움도 피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 사서(史書)를 읽고 고금을 통하고 아버지의 남긴 뜻을 이어서 자유 평등의 정신을 도야하였다. 그러나 봉준의 신체 모양은 매우 왜소하여 속담에 전봉준은 전녹두라 하는 것은 곧 봉준이 키가 작아 녹두 같다는 말이다.˝ -〈전봉준실기〉,《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⑴》, 351쪽.

˝이러한 가정, 이러한 혈동 하에서 산육된 전봉준 군은 생래의 천생이 강의영민, 비분강개의 파괴적 인물의 특점을 구비하였을 뿐 아니라 아무리 신장이 왜소하여 녹두장군의 작호를 들었더라도 그의 헌앙한 기우(氣宇)에는 발발한 영기가 유로(流露)하고 그의 형형(炯炯)한 안광에는 예리한 관찰력이 횡일(橫溢)하며 벽력을 능모(陵侮)할 듯한 과인의 담용(膽勇), 풍운을 환기할 만한 종횡의 기지, 탁월한 문장, 유창한 변설, 어느 방면으로든지 파괴적 위인이 될 만한 희생과 재능이 완전히 발육되지 않음이 없는 초범(招凡)의 인물이었다.˝ - 장도빈,《갑오동학란과 전봉준》, 덕흥서림, 1926년, 23쪽.

전봉준, 그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일까? 나는 일찍이 이평 면장과 함께 그의 옛집이 있는 장내동(長內洞)에 이르러 그가 살던 초가집을 두드려 보고 동네의 어른을 모셔 그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그는 키는 작았으나 얼굴은 하얗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아보았다. 평소 그는 집에서 마을 소년들에게 동몽선습과 천자문을 가르쳤고, 어른이 오시면 옛 현인의 행적을 이야기하였을 뿐 세상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이 없으면 종일 묵묵히 일어났다 누웠다가 하였으며, 집이 매우 빈곤하여 부모님께 극진한 봉양을 할 수는 없었지만 농사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먼 곳에서 온 손님이 여러 날 머무는 일이 있었으나 그들이 마을 사람과 사귀지 않았다.

마을 내에 경조사가 있으면 그는 먼저 절하여 축복하여 주고 조문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인물됨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존경하였다. 어느 해인가 전봉준의 아내가 죽자, 그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랑하는 아내와 이별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무덤을 황토현 남쪽에 만들고 이곳에 아내를 장사지냈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과는 달리 사랑하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아내의 묘소 앞에 서서 묵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이번의 변란이 일어나자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일어나 난당을 지휘하였다.

고부민란에 달려가기 며칠 전 서너 명이 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혀 본 적이 없는 인물들로서 후에 알고 보니 모두 동학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 김상기,〈동학과 동학란〉,《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⑴》, 171쪽.

전봉준에 대한 기록과 평가를 종합하면, 체구는 비록 단묘하지만 대단히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눈이 샛별같이 빛나는 비범한 소년이었다. 어려운 생활에서도 의식이 살아 있는 아버지로부터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뒷날 혁명의 기치를 들었던 배경 가운데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도 하나의 요인이 될 만큼 가정사는 평탄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은 젊어서 사망하였다.

암울한 시대에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강퍅한 삶을 살아야 했던 전봉준에게 혁명은 차라리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만의 불우가 아니었기에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사람들이 그와 행동을 함께한 요인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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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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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성 | 작성시간 19.06.04 전봉준에게 혁명이라.. ?
    대원군의 식객으로 대원군이 정치적으로 몰릴 때
    시켰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때 그쪽 지방에 물세 사건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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