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찬 선비, 남명 조식(曺植)
남명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사(性理學史)에도
큰 업적을 남기셨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과 같은 해 태어나 동시대를 살면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퇴계(左退溪)", "우남명(右南冥)"으로 불리었으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솟은 거인이셨다
남명은 심신수련의 수단으로
노장(老莊)사상의 참동계를 즐겨 읽으며 조용히 깊이 사색하는 태도는 도교나 선학(仙學), 양명학적(陽明學的) 특징을 다분히 나타내는 요소였다
남명의 학문적 특징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서도 일관되었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하학(下學)'적인 측면에 치중하였으며 강학(講學)을 하기 보다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배우는 자 스스로가 깨우치도록 하는 심득(心得)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학문이란 현실에서
일반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리학을 중시하면서도
천문, 지리, 의학, 복서, 병법 등 이른바 잡학에도 관심을 가져 능통하였던 것도 이런 학문들이
현실 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명을 따르는 소위 남명학파는 성리학의 이론에만 연연하지 않고 실천궁행(實踐躬行),
즉 몸소 갈고 닦은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긴다는 실천학풍을 계승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토록 남명은 선비의 실천적 삶을 중시했다
그 제자들 또한 스승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김면 영남 3대 의병장을 비롯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자만도 50여명에 이르렀으니 남명의 '경의(敬義)'정신이 얼마나 대단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선생은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단순히 학문에만 빠져 절의를 지키는 일절지사(一節之士)에 그치지 않고 천길 낭떠러지에 홀로 우뚝 솟은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서 세상을 근심하고 민생을 구하기 위하여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불의에 과감히 맞서는 재야의 비판자 였다고 할 수 있겠다
주역 지산겸괘에 '군자유종(君子有終)'
즉, '군자는 마침이 있다' 라는 말 그대로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진정한 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