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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의 역사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10.06|조회수293 목록 댓글 0

🇰🇷 태극기는 누가 만들었을까?

1875년 일본 정부는 조선의 해로(海路)를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군함 운요호를 부산에 입항시켰다.이에 대한 조선 관리의 항의에 함포를 발포하는 무력 시위로 대응하며 동해안과 남해안을 측량한 운요호(雲楊號)는 서해안을 따라 강화도에 이르게 된다.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접근하자 해안을 경비하던 조선군은 예고도 없이 나타난 함선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곧이어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1876년 1월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였다.

당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으로 온 구로다 기요타카는 뻔뻔하게도 "운요호에 국기를 달아서 일본의 배라는 것을 표시하였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까?" 라고 항의했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책임은 일장기를 보고도 포격을 가한 조선군에 있다며 되레 손해배상까지 요구했다.

결국 1876년 2월 조선은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한 각본에 따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조선말기 역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吳世昌)의 증언에 따르면 태극기의 원형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기 위한 회의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오세창의 아버지인 오경석(吳慶錫)은 조약을 체결할 당시 통역관으로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관리가 조선의 국기에 대해서 묻자 국기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오경석이 임기응변으로 강화 유수영 정문에 그려져 있던 태극 문양을 보고 태극이 조선의 국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오경석이 역학에 밝은 김경수와 상의해 태극 주위에 4괘를 배치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최초의 국기 태동설이다.

이른바 '오경석, 김경수 태극기 고안설'은 당시 정황과 이후 전개되는 역사적 사실을 볼 때 태극기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학설이지만 증언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국기에 대한 논의는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주일청국공사관의 참찬관 황쭌센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에게 바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황쭌센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하여 조선이 스스로 강해지려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親中國 結日本 聯美國)'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국기로 청나라의 용기(龍旗)를 사용할 것도 함께 제안했다.

당시 조선은 왕이 행차하는 어가 행렬에 왕권을 상징하는 교룡기(蛟龍旗)를 사용하고 있어 용기(龍旗)를 국기로 사용하자는 황쭌센의 제안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청나라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도 조선의 국기로 용기(龍旗)를 사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다만, 조선은 제후국이니 황제의 상징인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은 사용하면 안 되고 발톱이 네 개인 사조룡을 사용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조선을 독립국이 아니라 청나라의 속국으로 보는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조정은 황쭌센과 리홍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이 본격화되면서 국기에 대한 논의는 다시 진행되었다.

1882년 5월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김홍집 일행이 제물포에 정박한 스와타라호를 방문했을 때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조선이 독립국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국기가 필요하다며 국기를 제정하여 사용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김홍집의 지시를 받은 통역관 이응준(李應俊)이 태극과 4괘를 이용한 국기를 만들었다.

흰 바탕 위에 청색이 좌측으로 적색이 우측으로 휘감긴 태극 주위로 흑색의 건곤감리 4괘가 놓였다.

김홍집(金弘集)은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청나라 사신 마젠창에게 이응준(李應俊)이 만든 국기를 보여주었다. 마젠창은 이응준의 국기가 일장기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뜻대로 용기(龍旗)를 사용할 것을 다시 주장했다.

하지만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장에서 조선의 깃발로 게양된 것은 이응준의 국기였다.
조약의 체결을 축하는 예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미국 성조기와 함께 게양되어 바람에 나부꼈다.

이응준(李應俊)의 태극기는 조약이 체결된 지 2개월 뒤인 7월 미국 해군성 항해국이 발간한 <해상 국가들의 깃발들>에 'COREA Ensign' 이란 명칭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응준(李應俊)의 태극기는 공식적인 조선의 국기로 인정받지 못했다.국왕의 허락이나 조선 조정의 논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5일 후 김홍집(金弘集)은 붉은색 바탕에 반청. 반백의 태극을 사용한 국기를 제안했고, 마젠창은 개인의 의견임을 전제로 하여 흰 바탕에 반홍. 반흑의 태극을 넣고 조선 팔도를 상징한다는 의미를 담아 8괘를 그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김홍집(金弘集)은 마젠창과의 논의 결과를 이응준의 태극기와 함께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

같은 해 6월 구식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은 보상을 요구하며 조선에 제물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조약에 따라 철종의 사위이자 당시 개화에 앞장서던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 사죄하는 국서를 갖고 일본으로 파견되는 수신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고종으로부터 국기 제작의 권한을 위임받아 그해 9월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국기를 만들게 되었다.

박영효(朴泳孝)는 미리 준비해 온 태극팔괘도를 영국인 선장 제임스에게 보이며 국기 제작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각국의 국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제임스의 조언은 국기 제정의 경위를 알리는 보고서 <송기무처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태극과 팔괘의 형식은 특별해서 눈에 띌 만큼 뛰어나지만, 팔괘의 분포가 자못 조잡하여 분명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며, 또 각국이 이를 모방하여 만드는 데에도 매우 불편하니, 다만 사괘만 사용하여 네 모서리에 긋는다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박영효(朴泳孝)는 제임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앙에 반청. 반홍의 태극과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 4괘를 그린 태극기를 완성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에서 마젠창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기 어려웠던 박영효(朴泳孝)는 제임스의 조언을 구실로 내세워 이응준이 고안한 태극기를 모본으로 삼아 국기를 제작했다.

박영효는 일본 고베와 도쿄의 숙소에 당시 제작한 태극기를 내걸었고 각국 외교관들을 초청한 연회에서도 실내를 태극기로 장식하였다.
대내외에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일본 외무성 관원인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영국공사 해리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남아 있는 태극기를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로 추정하고 있다.

박영효(朴泳孝)는 태극기의 제작을 본국에 보고하였고, 고종은 1883년 3월 6일에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반포하였다.
이로써 태극기는 정식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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