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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발바르제도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10.23|조회수487 목록 댓글 0

스발바르제도 Svalbard Is

이 관측소의 독일군 병사들은 독일이 패망한 후에도
독일이 망한 줄 모르고 계속 본국에 보급을 요청하다 1945년 9월 4일에야 지나가던 노르웨이 어부에게
패망 소식을 듣게 되어 항복했는데 이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한 독일군이 된다. 이후 소련은 노르웨이와 소련이 여길 공동통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은 이 섬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가 소련 붕괴 이후 감소했다. 최근엔 이 곳에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를 만들고 있다. 1941년 2차대전으로 이 섬의 주민은 대피했지만
몇몇 수비대는 남았으며 연합군과 독일군이
지배권을 두고 몇 차례 교전을 벌였다.

미국 및 영국에서 대서양을 통과해
소련의 북극해 항구로 물자를 수송하는 항로가
스발바르 섬과 노르웨이 사이의 바다를 지나고
있었으므로 이 섬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1944년 9월 나치 독일이 하운데즌 작전을 실시,
스발바르 제도의 무인도인 북동섬 (Nordaustlandet)에 비밀리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했다.

1194년 노르웨이에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 섬에 최초로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이곳을 차가운 해안을 의미하는 스발바르로 명명하였다.

그 후 완전히 잊혀져있다가 1596년 빌렘 바렌츠가 북쪽으로 항해하던 도중 이 섬들을 발견하고 뾰족한 산들을 의미하는 '스피츠베르겐'이란 이름을 붙였다.

17세기에는 포경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이 무렵
이 섬의 석탄매장 사실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가 스메이런뷔르흐 (Smeerenburg)를 세워 17세기 중반까지 포경 기지로 이용했고, 영국과 덴마크, 프랑스도 작은 기지를 세웠다.

1820년대까지 이 세 나라는 포경을 계속했다.
1899년 노르웨이가 이 섬에서 석탄 채굴을 시작했으며 1906년 미국인 광산 기술자인 존 먼로 롱이어가

최초로 상업적 광산을 열면서 대규모 탐광 작업이
시작되었다. 1920년 이 섬은 노르웨이령이 되었다.

이 때까지 유럽 여러 나라에선 이 섬을
슈피츠베르겐이라고 불렀고 러시아는 그루만트(Грумант)라고 부르다

역시 슈피츠베르겐으로 갈아탔지만 노르웨이는
이 동네를 스발바르라고 개칭한다.
항공운항편이 없었던 시절에는 마지막 배편이
10월에 떠나면 다음해 5월까지 육지와의
교통이 완전히 끊겼다. 그 동안 섬의 주민들은 영하 20℃ 이하의 혹한 속에서 생활하는데 이 때 감기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다음해 5월이 되어 첫 배가 들어오면,
감기에 걸린 선원으로부터 섬의 누군가 감기를 옮아
주민들 사이에 유행했다고 한다.

리즈시절에는 인구가 1000명까지 늘어났지만,
석탄이 고갈되면서 1998년에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2007년 이후 버려진 시설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관광지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다.

취업할 수만 있다면, 스발바르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이민 정책을 펼치고 있는 곳이다.
취업 허가가 필요 없고 그냥 고용주가 동의하면
취업이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합법적인 거주민이 된다.

대신 직업이 없는 사람이 스발바르 제도에
거주하는 것은 불법으로 거주하는 것이 되어
실직/은퇴 시는 스발바르 제도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여기는 노르웨이 본토의 이민법이
적용되지 않아서 7년 동안 스발바르 제도에 거주한다
해도 노르웨이 시민권의 취득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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