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의 원리 (동양의학은 병을 어떻게 치료하는가)
경락
동양의학의 경전인 『황제내경』에 의하면 인간의 몸에는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보이지 않는 통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경락이다. 그리고 이 경락의 중심에 오장육부가 있다. 즉, 오장육부가 우리 인체의 생명 현상의 핵심인 것이다. 그 외에 기경팔맥이라는 특수한 경락이 있어 우리 몸의 생명의 기운이 이 20개의 통로를 중심으로 운행되어, 생명 현상이 유지된다는 것이 생명 활동에 대한 동양의학의 설명이다. 오장육부가 중심이 된 생명의 기운이, 이 통로를 통해 전신에 막힘없이 잘 흐르면 건강한 생명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황제내경』의 사상이다. 즉, 오장육부경락일체론이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질병이란 이 생명의 기운이 원활하게 운행되지 못함으로써 생긴다. 그것이 외부의 사기에 의한 외감증이든 또는 오장육부의 이상으로 생기는 내상 잡병이든, 결국은 이 생명의 기운이 원활하게 그 각기 흘러야 되는 생명의 통로를 따라 잘 운행되지 못하여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경락이라는,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우리 몸의 통로 중에는 피부에서 그 기운과 아주 쉽고 강하게 만나는 곳이 있다. 땅속에는 어디든 물이 있고, 물이 흐르는 수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 곳이나 땅만 파면 쉬이 물이 나오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렇듯 우리 몸도 피부 아무 곳이나 찌른다고 쉽게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통로와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통로 상에서 그 기운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강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혈자리인 것이다.
침은 어떤 원리로 작용해서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인가?
인체의 생명 현상의 핵심은 오장육부이고, 생명의 기운을 주관하는 핵심도 오장육부이다. 그래서 경락은 오장육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경락에 생명의 기운이 모두 담겨 있다. 따라서 병은 어떤 것이든 오장육부에 의한 병이라면, 그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통로를 통해 혈자리에 침을 놓아 그 장부의 기운을 조절해서 치료할 수 있다. 이게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침 치료의 핵심 사상이다. 따라서 그 병이 어느 장부의 병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병의 허실을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황제내경』에서는 조악한 의사는 외형에 집착하고, 고명한 의사는 신(神)이라는 인간 생명 현상의 종합적인 판단에 중점을 둔다고 하며, 외형에 집착하는 의사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치료를 할 수 있겠는가 반문한다. 또한 신을 판단하여, 즉 생명 현상의 종합적인 판단에 의하여, 허한 자는 실하게 하고 실한 자는 허하게 하여 치료한다고 설명한다. 이게 사실 침 치료의 전부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앞에서 보여준 예가, 바로 이렇게 변증을 통해, 병이 어디에 있는지, 또 그 허실은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해당 경락상의 중요한 혈자리를 찾아 보사하여 해당하는 장부의 기운을 조절하여 병을 치료한 것이다. 이게 침 치료의 시작이고 끝이며 본질이다.
변증은, 즉『황제내경』에서 말하는 신을 파악하는 것은 약이나 침이나 똑같으니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약 대신 혈자리를 어떻게 선택하고 구성하여, 처방하고 보사할 것인가가 그 중점 과제다. 변증에 의하여 침구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증하여 어떤 혈자리를 선택할 것인가와 관련, 아주 잘 정리된 훌륭한 책으로 꼭 권하고 싶은 책 두 권이 있다. 모두 이세진(李世珍)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으로,『상용수혈임상발휘(常用얀穴臨床發揮)』[李世珍 著, 北京:人民衛生出版社, 1993, 제1판 4차 인쇄]와『침구임상변증논치(鍼灸臨床辯證論治)』[李世珍·李傳岐·李宛亮 著, 北京:人民衛生出版社, 1995, 제1판]이다. 이 두 책은 변증에 따라 혈자리를 선택하여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나도 많은 것을 얻었다. 특히 앞의『상용수혈임상발휘』는 각혈이 어떤 작용을 하며, 어떤 한약재에 해당하는 작용인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나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유로, 일생을 연구하고 임상하여 얻은 것들을 종합하여 써놓은 것이다. 변증이야 나 나름대로 하면 되지만, 혈자리를 어떻게 선택하여 구성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지, 직접 임상을 하지 않고도 이 책을 통해 몇십 년의 고귀한 경험을 그대로 얻었다.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통로가 막히면 그곳에 통증이 발생하거나 운동 장애가 생긴다. 외상을 입어서든, 외상과는 관계없이 내적인 원인에 의해서든 통로가 막히면 통증이 생기고 운동 장애가 생긴다. 이런 경우, 그 생명의 통로가 잘 소통되도록 하여 치료하는 것이 침이 작용하는 기제다. 이런 경우는 기본적으로 장부의 기운과 관계없이 단순히 통로의 문제일 경우로, 그 막힌 생명의 통로가 잘 소통되면 될 것이다. 침으로 치료하는 많은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별 이유도 없이 허리가 삐끗하여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경우, 밤에 잠자고 난 이후 목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경우, 운동하다 발목을 삐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장부의 특별한 이상 없이 발생하는 경우로, 이때에는 문제가 되는 부위의 경락 운행을 잘 살펴 그 경락이 잘 소통되도록 하여 치료하면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홍○○, 남자, 59세
2006년 2월 4일 초진
왼쪽 옆구리 갈비뼈 밑의 살이 아픈 지 4년. 서양의학으로 X-RAY도 찍고, 대장 내시경 검사도 했고, 별의별 검사를 다 했으나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양의사는 근육이 파괴될 때 아픈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었는데, 어제부터는 원래의 부위가 심하게 아프고 당길 뿐만 아니라 왼쪽에서 뒤로 돌아 허리를 지나 오른쪽 옆구리까지 아프고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배꼽 부위와 배 앞부분은 아프지 않다. 원래 발병했던 왼쪽 부위가 제일 심하다.
식사:잘한다.
대소변:좋다.
수면:수면시 호흡 장애가 있어 기계를 착용하고 잠자리에 든다. 기계를 착용하지 않고 잠들면 1∼2시간마다 소변을 보게 되는데. 이는 호흡 장애로 복부근육이 긴장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설:담홍설, 박백태
맥:좌우 모두 활(滑)
참으로 괴상한 병이다.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변증할 만한 특별한 장부 이상을 볼 수도 없고, 특별한 원인도 없다.
[변증] 대맥(帶脈) 경기(經氣) 소통불리(疏通不利)
[침구 처방] 대맥, 오추, 태충, 양릉천, 인중
침을 놓은 후에 유침한 상태에서 물어보니 한결 수월해진다고 한다. 침을 뽑고 물으니 아주 시원하다고 한다.
재진:2월 7일
치료받기 전에는 너무나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어제 치료받은 후 반은 나은 것 같다. 이제는 생활에 지장이 없고,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침구 처방 어제와 동일하다.
이것으로 완전히 치료가 되었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진찰하는 도중에 바로 이는 대맥의 경기가 잘 소통되지 않아서 생긴 병이라는 판단이 들었지만, 그래도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나머지를 확인한 것이다. 대맥 자체는 고유한 혈자리가 없다. 다만, 대맥의 병일 경우에는 대맥과 교차하는 족소양담경의 대맥혈과 오추혈 등에 놓아서 치료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태충과 양릉천을 놓은 것은, 앞의 두 혈을 놓고 다른 곳은 모두 좋아졌는데 아직도 원래의 왼쪽 옆구리 밑 부분은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이 옆구리로 지나는 간담의 경락을 소통시키기 위해서 자침을 한 것이다. 인중은 무엇인가? 대맥과 등 정중앙에서 교차하는 독맥의 경기를 소통시켜 등과 허리 부분의 치료를 보강한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단순한 외적 통증이나 운동 장애의 경우에는 해당하는 경락의 기운이 잘 소통되도록 치료하면 된다.
특수 침법에 현혹되면 안 된다
인간의 몸에는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보이지 않는 통로가 있으니, 이 통로 즉 경락을 통해 인간의 생명 활동의 핵심인 장부의 기운을 조절하여 치료하는 것과 경락이 잘 소통되지 않아서 생기는 병들을 이 경락을 잘 소통케 해줌으로써 치료하는 것, 이 두 가지 기제가 침구 치료의 요체이고 핵심이고 전부이다. 두 가지 침구 치료의 핵심을 이해하면 비록 초보자라 하더라도 이것저것 온갖 잡술에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선인들의 임상경험을 덧붙이고 자기 자신의 임상경험을 더해 가면 별 어려움 없이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황제내경』에서 말하는 이와 같은 진정한 의사의 길을 가고자 하면, 처음에는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어떤 상황의 어떤 환자를 만나더라도 자유롭게 그 환자의 신을 판단하여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효과에 기대어, 눈에 보이는 깜짝 효과에 현혹되어, 특수 침법들이 침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나아가면, 당장의 치료는 가능할지 몰라도 수많은 다양한 병증에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동씨침법을 포함하여 사암침법, 기타 평형침이나 복침 등 모두 일정한 범위 내에서 효과를 지닌 많은 침구 기술들 가운데 하나일 뿐, 이것이 침구 치료의 기본은 아니다. 진정한 사유 없이 그저 단순히 암기함으로써 익히는 침법들은 간혹 간단한 병증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본격 의사의 길이 아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동씨침법의 소절이라는 혈은 발목관절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분명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발목관절이 극심하게 손상되어 온 경우에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다시 기본적인 침구 치료방식으로 들어가 치료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발목이 아파서 온 경우, 일단 이 소절이라는 혈로 어느 정도 진통을 완화하고, 손상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의 여부를 따져 다시 본격 치료에 들어간다. 이 소절혈로도 충분하면 그것으로 그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러한 특수 침법은 크게 말하여 특수혈에 불과한 것이다. 당연히 의사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병을 치료한다든지, 이게 침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서 대맥증 환자의 경우에 동씨침이니 사암침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나는 중증의 심한 척추측만증 환자를 완벽에 가깝게 치료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도 또 다른 초기 척추측만증 환자를 침 세 번 놓고 눈에 띄게 돌아오게 하고 지금은 거의 완전하게 돌아오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 동씨침법이 무슨 소용이고 사암침법이 무슨 소용인가? 전혀 무용지물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침법들이 유용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의사는 모름지기 알아둘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선인들이 361개의 혈자리를 밝혔겠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사암침법이야『황제내경』에 나오는 오행침법의 일부 경험례를 밝힌 것일 뿐 사암선생이 발견한 원칙도 아니고 그 뭣도 아니다. 이를 제일 먼저 한국에서 발굴하여 크게 밝힌 사람이 아마도『황제내경』을 보지 못했거나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정확히 말하면 “오행침법의 사암선생 임상경험집”이라 해야 맞다. 진정한 의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는 이런 일부 침법이 마치 침의 모든 것이라도 되는 양 오해하거나, 또는 일부 잡술에 불과한 침법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좀 늦더라도(사실 늦는 것도 아니지만) 앞에서 말한 바른 길을 잡아 꾸준히 나아가면 큰 성취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침을 한 번에 얼마나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침 하나로 병을 고친다는 데 크게 의미를 두고 요란법석들을 떠는데, 참으로 우스울 뿐이다. 침 하나로 나을 병은 침 하나로 고치면 그만이고, 많이 놓아서 고칠 병이면 많이 놓으면 그만이다. 물론 나도 가능하면 많이 안 놓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병증에 따라 다르다. 환자가 빨리 낫는 게 중요하지 침 하나로 고쳤다는 의사의 명성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쓸데없이 침을 많이 놓아 환자를 괴롭히고자 하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이 놓아야 할 경우에는 당연히 많이 놓아야 한다. 초보자가 이런 일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데 집착하는 것은 의사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명할 것이다.
보사
다음으로 보사의 문제이다. 보사에 관하여는 전문적인 책이 많이 나와 있어 굳이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은 모두 『황제내경』에 기술되어 있다. 단 하나 여기서 밝히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좌우보사에 관한 나의 견해이다. 많은 사람들이 침구의 여러 보사에 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좌우보사에 관하여 더욱 이해와 신뢰가 안 따를 것이다. 하여 내 실제 경험과 이론적 근거를 밝힘으로써 이를 돕고자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워낙 책을 좋아하기도 했는지라, 중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간혹 방학 때 귀국하면 꼭 서점을 찾아가 이런저런 분야의 신간들을 보고 새로운 동향들을 파악하고 의미 있는 책들은 사고는 했다. 꼭 찾는 서점이 있다면 교보문고와 교보문고 옆에 있는 정신세계사 책방이다. 어느 해인가는 친구와 함께 정신세계사 책방에 들러 이런저런 책들을 보다가 기가 담긴 물건을 파는 코너를 둘러보는데, 그 코너를 담당하고 판촉하는 젊은 친구가 나를 보고 말하기를, “기를 느껴보셨습니까? 제가 한번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저도 교통사고로 크게 상처를 입고 죽을 뻔했는데, 기를 훈련해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한다. 그러더니 나더러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라면서, 손바닥을 내 배를 향해 내밀고는 살살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손바닥에서 강한 기운이 배를 향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고는 기를 넣은 만큼 빼주겠다면서 손바닥을 반대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가 내게 하는 양을 옆에서 가만 지켜보던 내 친구가 자기에게도 한번 해달라 해서 그에게도 했는데, 그는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책방에서 나온 후 친구는 자기는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상당히 불편해했다. 그래서 당시 나는 중국에서 매일같이 기공연마를 하고 있어서 쉽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침구 치료의 보사의 원리인 것이다. 그 이론적 근거는 크롬웰의 전류의 법칙, 즉 동심원이 오른쪽으로 돌면 전류가 앞으로 흐르고, 왼쪽으로 돌면 전류가 뒤로 흐른다는 법칙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 기운은 이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고 본다. 특히, 우리가 아는 기라는 것은 전기와 유사한 에너지의 일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좌우보사에 관하여 중국에서도 논란이 많다. 그런 까닭에 책을 보다 보면 헛갈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어떤 경우든 의사의 입장에서 본다. 경락이 위로 흐르든 아래로 흐르든 관계없이 내가 침을 놓는 입장에서 오른쪽으로 돌리면 외부의 기가 앞으로 나아가 환자 안으로 흘러들어가니 보하는 것이고, 왼쪽으로 돌리면 환자의 기운이 밖으로 나와야 되니 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외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기는 전기와 달라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황제내경』에서는 침을 놓을 때 전심을 다해 일념으로 놓으라고 한 것이다. 이는 모든 우주에 적용되는 법칙으로, 보사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의사가 이 보사를 믿는 것이다. 우주 만물이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더욱이 마음과 밀접한 기를 다루면서 시술하는 의사 자신이 그 결과를 믿지 않으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하겠다.
득기
다음으로 득기(得氣)의 문제이다.『황제내경』에서 득기를 표현한 것을 보면 마치 의사의 손끝에서 느낀 것같이 표현되어 있다. 물론 『황제내경』에서 말한 대로 환자의 신을 일념으로 주시하면서 침을 놓으면, 놓는 순간에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한 환자에 일심으로 전념을 다한다면 아마 하루에 서너 명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꼭 환자에게 “뻐근한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 없다고 하면, 환자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까지 계속 침을 조절하거나 보사를 하고는 한다.『황제내경』에서는 이 득기가 없으면 그건 침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롱으로 침 꽂아두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미 침이 아니다. 물론 대롱으로 놓건, 손으로 직접 놓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롱으로 침을 꽂는 데도 장점이 있다. 침이 피부를 뚫는 순간의 통증을 환자로 하여금 상당 부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침 치료시 통증 대부분이 기실 침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의 통증이다. 그러나 득기를 통한 뻐근함에 비교하면 피부 통과 때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국의 침구 전문 의사들은 연마를 많이 하여, 침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침을 잘 놓는다. 침을 아주 잘 놓는 젊은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마치 침이 손끝에서 날아가는 것같이 놓는다. 어쨌든 대롱침에서도 취할 점은 있지만, 그래도 나는 손으로 침을 직접 꽂을 것을 주장한다. 그래야 침과 의사가 하나가 되어서 침을 놓을 수 있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이렇게 대롱으로 꽂아놓기만 하면 침이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황제내경』에서 침구의 치료는 장부의 허실을 판단하여 보사를 하는 것에 있다고 하는데, 전혀 보사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치료가 되겠는가?
보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득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득기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사가 되는가? 이제 침을 시작하려는 사람이거나, 진정으로 참된 동양의학의 의사의 길을 가려고 하는 자는, 이 말을 꼭 새겨들어 침을 놓을 때마다 득기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황제내경』에서는 인체의 기는 하루와 1년 사계절에 따라 그 깊이를 달리한다고 되어 있다. 이 생명의 기운과 만나지 않고 어떻게 치료가 이루어진다 하겠는가? 이는 마치, 수맥을 찾고서 그 위에 파이프는 제대로 꽂지도 않은 채 그저 세워만 놓고 물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또한『황제내경』에서는 사기의 깊이가 일정하지 않으니 사기가 깊은 자를 얕게 놓아도 문제고, 사기가 낮게 있는 것을 깊게 놓아도 문제라고 누누이 말하고 있다. 그럼 사기가 깊은지 낮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따라서 일반적으로 득기한 것을 보아 침을 제대로 놓은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황제내경』에 의하면 여름에는 몸의 기운이 체표로 활짝 나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나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늘 체표가 열려 있고, 비교적 침을 살짝 놓아도 득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대롱침이 남쪽에 위치한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말이 들리는데, 그 유래야 어찌 됐든 대롱침이야말로 한국 침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라 하겠다.『황제내경』의 이론에 의하든 기타 어떤 이론에 의하든 대롱으로 침만 꽂아놓는 것은 동양의학 이론상으로 침이 아니다. 그 임상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다양하게 많이 익힐수록 좋다
다음으로는, 다양한 침법이나 기술을 가능하면 많이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원칙에 입각해 치료해 나가되 모든 기술을 가능한 익히라는 것이다.『황제내경』에서도 의사는 모든 치료법에 능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극력 반대하는 것은 어느 하나만을 맹신하거나 그것만이 유일한 침법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동씨침법은 물론, 오행침법의 원리도 이해하고, 중국에서 나온 평형침도 익혀보라. 이 침법은 사실 중국에서는 거의 이름도 없는 침법이다. 이런 침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워낙 침들을 잘 놓고 엄청난 질환들을 고치는데, 그런 정도의 특수혈로 일부 질병을 치료하는 변각의 침법으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이는 동씨침법도 마찬가지다. 그 외 두피침, 이침도 모두 알아둘수록 좋다.
내가 정말 임상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는 것은 화침이다. 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효과를 갖고 있다. 특히 한증(寒症)의 경우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 그리고 경락의 기운이 오랫동안 소통되지 않은 괴질이나 특수 질환에 효과가 아주 좋다. 정맥류에도 효과가 좋다. 어혈로 인한 질환에도 좋다.
그럼 화침으로 특효를 본 구체적인 임상사례를 살펴보자.
허○○, 여자, 58세
2005년 10월 29일
왼쪽 다리, 바깥 복숭아뼈 위 5센티미터 지점에서 통증 느낀 지 4년. 4년 전부터 해당 부위의 살 속에 좁쌀만한 것이 생겼는데, 이것이 찬바람을 쐬거나 찬 기운을 느끼게 되면 성이 나면서 엄청나게 아프다. 한번 성이 나면 무척 아프고 힘들다. 양의사들은 다리의 정맥류로 인해 그럴 것이라고 판단, 정맥류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전혀 변화가 없다. 따라서 늘 그 부위에 보호대를 차고 다닌다. 만져 보니 정말 좁쌀같이 조그마한 것이 피부 속과 표피 사이에서 보이고 또 잡힌다. 혈압이 높아 혈압약을 복용한 지 5년이다. 기타 특이한 점은 없다.
[침구 처방] 화침으로 해당 부위에, 먼저 중앙을 찌르고, 다음에 둘레를 4, 5번 찌름.
그동안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았던 괴질이 이것으로 치료되었다. 환자는 너무나 신기해한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괴질이 아주 간단하게 치료되니 사실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화침 책에는 알코올램프로 화침용 침을 달구어 정확하게 순식간에 해당 부위를 적절한 깊이로 찌르고 빼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만든 화침용 침을 보니 너무 굵어서 그것으로 화침을 맞으면 환자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나 자신도 감당 못할 것 같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일반 호침, 주로 30밀리미터 길이의 침으로 침을 놓고자 하는 부위 바로 위에서 일회용 라이터로 달군 다음 순식간에 깊이를 고려해서 찌르고 뽑는다. 누구로부터 배운 바가 있어서가 아니다. 화침이라는 책을 보고 그 사유의 본질을 느낀 다음 내 나름의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증에 너무나도 좋은 치료법이다. 뜸을 뜨려면 시간도 걸릴뿐더러 환자도 괴롭고, 시술하는 사람도 힘들다. 그렇지만 화침은 순간에 해결된다. 또한 침의 기운이 굉장히 강하다. 나 스스로 합곡혈에 놓아본 적이 있는데, 그 기운이 얼마나 강하게 경락을 타고 흐르는지 모른다. 침을 빼고 난 다음에도 한참 동안 침이 꽂혀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경락상의 오래된 괴질이나 경락이 오래 막혀 생긴 병에는 그 막힌 경락의 기운을 뚫어주는 힘이 아주 강하다. 허리가 아픈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위중에 침을 놓거나 사혈을 하여 치료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이를 잘 활용한다. 그 이론적 근거는 ‘요통’편에서 설명하겠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위중혈에 사혈침으로 사혈하면 사혈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삼릉침으로 찌르면 너무 아플 것 같아 화침으로 위중혈 부위에 정맥이 뭉친 혈관이 보이면 그곳을 순식간에 찔러 사혈과 동시에 침 놓은 효과를 같이 누린다. 또한 일반적으로 정강이의 정맥류는 심하든 심하지 않든 그 자체로 통증을 가져오거나, 허리 및 무릎 통증을 유발하거나, 기타 여러 가지 다른 병을 일으킬 수가 있다.
한번은 강화도에 있는 친구네 놀러갔는데 친구의 형수가 늘 다리에 통증이 있고 정맥류가 심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라고 권유한다기에 보니, 양쪽 다리 정강이에 아주 심한 정맥류가 튀어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시골에서 죽 일하며 산 분이라 친구의 형수는 신체가 아주 다부지고 건강했다. 게다가 다시 오기도 힘들 것 같아 한 번에 치료를 끝낼 작정으로 양쪽 다리를 각기 다리 하나에 40∼50번 정도로 화침을 놓아 다리의 뭉친 어혈을 풀어내고 막힌 경락을 확 소통시켰다. 화침의 열기가 막힌 혈관을 뚫어주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로 절대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도합 100여 번의 화침을 맞으면 견뎌낼 사람이 별로 없다. 그분은 평생 시골에서 자라 체질이 강건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돌아간다고 하니 힘들어서 못 일어나겠다며 엎드린 채 고맙단 인사를 한다며 미안해했다. 그 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침은 그 기운이 강하니 절대로 임산부나 허약자, 기타 당뇨병 환자나 심장병 환자 등에게는 금해야 할 것이다.
전○○, 남자, 63세
2006년 1월 6일 초진
30년 전 싸움을 말리다가 오른쪽 가슴팍을 맞았는데, 그 후로 비만 오면 가려운 것 같기도 하면서 고통이 있다. 최근에는 뻐근한 것도 아니고, 통증도 아니고, 아주 불편하다. X-RAY상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무슨 나쁜 병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 많다. 예전에 빈혈 증세가 있었는데, 최근 조금 피곤하면 어지럽다. 3년 전 파산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우울하지는 않다. 기타 특이 사항은 없다. 신체 골격 모두 정상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장부의 문제도 아니고 기타 어떤 문제도 아니다. 30년 전 맞은 곳에 어혈이 남아, 오랫동안 경락의 기운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운동 계통의 질환일 경우는 거자법(巨刺法)으로 반대편을 많이 놓는다. 그 이유는 침을 놓은 상태에서 침의 효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침을 맞은 상태에서 해당 부위를 움직이면서 풀어주면 더욱 효과가 좋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주 효과가 좋다. 그러나 늘 사유가 자유로워야 한다. 반드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깨관절이 아픈 경우 대부분 반대편 손에 놓아 치료하는데, 이 중 담이 걸린 것 같은 경우에는 반대편 손에 놓은 후에 대개 풍륭혈에 다시 놓아 담을 제거하면서, 그 경락이 가슴을 따라 올라가면서 영향을 미치므로 이런 경우에는 바로 해당하는 쪽에 놓는다. 그래도 어깨 운동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효과는 더욱 좋기 때문이다.
이 환자의 경우, 가장 심한 부위가 가슴에서 오른쪽 폐경락이 지나는 자리였다. 따라서 반대편 척택에 침을 놓고 득기한 후 사하니, 그 부분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다시 오른쪽 풍륭과 음릉천에 놓아 비위를 다스리고 담을 잡고자 했더니, 더욱 편안하다고 한다. 그런데 완전하지는 않다. 그래서 해당 부위에 화침 3, 4침을 놓았다. 그랬더니 바로 완전하게 편안하다고 한다. 30년간의 괴질이 침 두 번으로 나았다고 엄청 신기해한다.
재진:1월 11일
5일 후 다시 왔는데, 원래 아팠던 부위는 완전히 나았는데 그 아팠던 곳에서 더 안쪽으로 흉골 바로 옆 부위가 양쪽 모두 불편하단다.
해당 부위를 보니 가슴 흉골 바로 옆쪽으로는 신장경락이 지나는 곳이다. 따라서 용천혈 양쪽으로 각기 화침을 2번씩 놓았다. 그랬더니 확 편해진다고 한다. 그런 후 다시 태계혈에 침을 놓았다. 그리고 단중에 침을 놓으니 한결 편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척택 양쪽에 화침을 놓고, 해당 부위에 각기 화침 3번을 놓으니 다 나았다고 한다.
이 화침은 활혈(活血), 파어혈(破瘀血), 소통경락(疏通經絡)의 기운이 아주 강하다. 따라서 이런 원인에 의한 치료에는 아주 효과가 크다.
공○○, 남자, 64세, 중국계
2005년 2월 28일 초진
좌측 무릎을 중심으로 위아래, 앞뒤 모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3, 4개월간 지속되었다. 무릎은 아프지 않다. 특별한 계기나 원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 콧물, 재채기를 하고 눈이 가렵다. 이 환자는 이발사를 오래 하신 분이라 평생을 서서 작업하신 분이다. 다리를 살펴보니 보통 정맥류는 정강이 뒷부분에 생기는데 이 환자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무릎에까지 정맥류가 있다. 설, 맥 등 그 외 특이 사항은 없다.
심한 어혈로 인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다. 정맥류란 서양의학적 표현이고 동양의학에서는 어혈일 뿐이다. 원래 정맥류의 시발은 정강이 뒤쪽이다. 이 환자는 일생 동안 서서 일하는 직업으로 인하여, 지금 뒤쪽에서 시작해서 앞부분까지 온 것이다.
우선 위중혈 양쪽에 화침을 놓아 그곳에 뭉친 어혈을 사혈시키면서 풀어주었다. 그 순간 양쪽 다리에 있던 통증이 모두 사라졌다. 환자가 얼마나 놀라는지 모른다. 다시 양쪽 무릎의 기혈이 통하도록 무릎 위에 있는 양구, 혈해에 침을 놓아 유침하고, 뒤편의 기혈을 소통시키기 위하여 위중, 승산에 침을 놓아 유침하고, 눈과 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쪽의 합곡과 태충을 놓았다. 합곡은 눈과 코에 모두 작용하고, 태충은 간의 열을 떨어뜨려 눈의 충혈을 잡으려고 한 것이다.
재진:3월 1일
다음날 다시 치료를 받으러 왔다. 침을 맞고 좌측 무릎 뒤의 통증은 줄어들었다. 단지 좌측 무릎 바깥쪽 위편과 안쪽 복숭아뼈 윗부분에 마비가 있고 쑤신다. 오른쪽 안쪽 복숭아뼈 위쪽도 아프다.
[침구 처방] 해당 부위에 화침을 놓으니 모두 좋아졌다. 좌측 무릎 위가 아프다고 하여, 족삼리 부분의 정맥류와 양릉천 밑 정맥류를 화침으로 사혈하여 어혈을 풀어주니 모두 괜찮아졌다.
알레르기는 코와 오른쪽 눈이 지난번에 침 맞은 후 좋아졌는데 왼쪽 눈이 조금 불편하다고 한다. 다시 합곡, 척택, 태충에 침을 놓아 유침하니 모두 좋아졌다.
여기서 잠시 알레르기에 대한 치료를 살펴보자. 이 환자의 경우, 눈물, 콧물, 재채기를 주 증상으로 한 꽃가루 알레르기인데, 지금 합곡, 척택, 태충, 이 세 혈로 치료가 완벽하게 되는 것이다. 앞의 한약편에서 알레르기 치료의 변증 사유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척택으로 계지탕처럼 폐의 선발을 도와 본(本)을 치료하고, 합곡과 태충으로 신이, 백지, 국화 등을 첨가해서 해당하는 부위의 증세인 표(表)를 치료하는 것처럼 그렇게 치료했다. 약과 침이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다양한 여러 가지 침법을 익혀 병증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환자의 치료 효과를 높이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유
다음으로 자유로운 변증의 사유와 창조적인 동양의학적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교과서나 침법 책에 나와 있는 병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그 밑바닥의 사유, 즉 그물을 건져내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말한 침구 치료의 두 가지 기본 원칙하에 자유롭고 유연한 창조적 사고로 대처하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어떤 병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김○○, 여자, 26세
2004년 6월 10일
어젯밤 늦게까지 많은 술을 마시고 렌즈를 낀 채 잠이 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왼쪽 눈이 퉁퉁 부어 뜰 수가 없고 통증도 심하고 쑤신다. 걱정이 많이 되어, 새벽에 일어나 소금물로 씻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진찰해보니 눈이 너무 부어 도저히 뜰 수 없을 정도다. 손으로 눈꺼풀을 까보니 온통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다. 설, 맥 등 기타 특이 사항은 없다.
자! 이런 환자가 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교과서를 찾아볼 것인가? 아니면 명의 열전을? 어디에도 없을 가능성이 많고, 있어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뿐인가, 환자는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 찾아볼 시간이나 있겠는가. 스스로 자유롭고 유연하게 동양의학적으로 창조적인 사유를 할 수밖에 없다. 당시는 나도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환자를 몇 명 보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중국에서 침구를 전공했던 것도 아니고, 침구 선생에게 사사를 받아본 적도 없다. 오로지 나는 책이야말로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오는 사람이고, 책을 보되 늘 그 근원의 사유를 중시하고 그 바탕 아래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고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옛것을 따르되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창조적으로 사고하기를 즐긴다. 한국에서 본 일부 의사들 가운데는 전혀 얼토당토않은 사고들을 하면서 동양의학적 사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지, 동양의학의 모든 이론적 패러다임을 담고 있는『황제내경』이나 또는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밝혀진 이론들과는 전혀 부합하지도 않는 소리들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동양의학적 사고인 것처럼 혹은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사고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우선은 당시 차트를 그대로 옮겨보겠다. 당시는 개원 초기이고 환자도 많지 않고 그래서 그랬는지 아주 열심히 차트를 기록했던 것 같다.
소택(少澤) 사혈(瀉血) ─ 경맥순경(經脈循經) 목내외제(目內外際)
대돈(大敦) 사혈 ─ 목은 간의 규(目是肝的窺)
여태(厲兌) 사혈 ─ 경맥류목하(經脈流目下)
풍륭(豊隆) 사(瀉) ─ 화담소종(化痰消腫)
정명(睛明) 사
사백(四白) 사 ─ 국부 경기 활옥(局部 經氣 活沃)
어요(魚腰) 사
동자료(瞳子髎) 사
합곡(合谷) 사 ─ 경기유주(經氣流注)
유침 30분.
눈두덩이 부은 것이 80퍼센트 정도 가라앉고, 눈을 뜰 수가 있음. 눈의 통증도 사라짐.
이상이 당시 차트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렇게 기록을 잘해놓으면 누구나 언제라도 당시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다시 환자의 상태로 돌아가 살펴보면, 이는 내상으로 인한 병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장부 이상으로 온 병이 아닌 것이다. 렌즈를 낀 채 잠을 잔 외적인 충격으로, 국부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두덩이 부은 것은 동양의학적으로는 어혈이 아니면 담이다. 담은 서양 의학적으로는 염증반응으로 일어나는 증상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혈이 흘러나와 부은 것이 아니니 담이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눈꺼풀을 까보니 눈동자, 각막 할 것 없이 모두 시뻘겋다. 열이 있는 것이다. 열을 내리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사혈이다. 그러면 어디를 어떻게 사혈할 것인가?
당시 생각한 사유가 그대로 차트에 기록되어 있다.
“少澤 瀉血 ─ 經脈循經 目內外際.” 이 말은 소택혈을 사혈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수태양소장경이 눈꼬리 안과 밖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을 사혈하면 눈의 열이 내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大敦 瀉血 ─ 目是肝的窺.” 이는 간단히 생각해도 알 것이다. 눈은 간의 기운이 나오는 곳이다. 또한 족궐음간경은 “목계(目系, 안구에서부터 연결되어 뇌의 부위까지를 말함)”로 들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이 혈을 사혈함으로써 눈의 열이 빠질 것이다.
“厲兌 瀉血 ─ 經脈流目下.” 여태혈은 족양명위경의 혈이고 족양명위경락은 눈밑에서 흘러내려온다. 따라서 이 혈을 사혈하면 눈 아래 부위의 열을 떨어뜨릴 것이다. 경락의 열이나 장부의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사혈할 경우에는 사지 말단의 끝을 사혈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사지 말단으로 기가 뻗쳐 가므로 그 끝을 뚫어주면 기가 확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豊隆 瀉 ─ 化痰消腫.” 이는 풍륭을 자침하여 사했다는 것으로 그 목적은 담을 풀어서 부기를 없애겠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혈은 담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모든 질병이나 부종, 수액대사의 이상 현상으로 생기는 부기나 외상으로 인한 부기 등, 모든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아주 효과가 좋은 혈이다.
“睛明 瀉, 四白 瀉 ─ 局部 經氣 活沃, 魚腰 瀉, 瞳子髎 瀉.” 이는 모두 눈을 중심으로 가로로 안팎, 세로로 위아래에 있다. 어요혈은 윗눈썹 가운데 있는 혈이므로 이곳에 침을 놓을 때는 눈동자를 아래로 밀고 윗눈뼈 바로 밑을 1촌 가까이 밀어넣었다. 이럴 경우 보사는 하지 말 것을 권한다. 눈 안에서 출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 사방의 기운을 사하고 기운을 돌리니 충혈과 부종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合谷 瀉 ─ 經氣流注.” 합곡은 안면 부위의 모든 질병에 사용하는 기운이 아주 강력한 혈자리이다. 치통, 비염, 두통, 눈의 통증 등, 모든 안면 부위의 질병에 사용하여 즉시 효과를 볼 정도로 기운이 강한 혈자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롱침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필히 득기한 후에 그 증세의 경중에 맞는 강도의 보사를 해야 효과가 있다.
이렇게 눈 주위에 4개 혈과 합곡, 풍륭에 침을 놓아 유침 30분 만에 뽑으니 차트에 기록된 것처럼 그 심한 부기가 다 빠지고, 극심하던 통증도 사라지고, 눈을 뜰 수 있으며, 충혈되어 시뻘겋던 것이 사라졌다. 침 맞고 바로 눈 뜨고 돌아갔는데, 내일 다시 오라면서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기에 한의원에서 일하는 여직원에게 연락해보라 하니, 다 나아서 불편함이 없어서 올 필요가 없겠다고 한단다. 이 환자는 같이 일하던 여직원하고 한집에 살던 친구였다. 평소에도 한의원에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아무리 아파도 무서워서 침은 절대로 맞지 않겠다고 하던 친구가 병세가 하도 심하고 걱정이 되니 그렇게 무서워하던 침을 다 맞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심한 눈병이 한 번의 침으로 나은 것이다. 양방치료를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약을 얼마나 먹고서야 완전히 가라앉았을까? 또한 동씨침법이나 사암침법으로 얼마나 효과를 보았겠는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면 알아두면 좋을 정도이지, 그런 것들이 침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넓은 중국 천지에 수많은 명의들이 있지만 동씨침법을 이야기하는 사람 들어본 적 없고, 사암침법이야 그저 오행침법이니 그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마저도 오행침법으로 모든 병을 치료했다고 떠드는 사람 한 사람 없고 그런 책을 본 적도 없다.
왕○○, 여자, 39세, 중국계
2004년 12월 13일
소장암으로 1년 전에 수술을 받았으나 간으로 전이되었다. 1년 동안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복수가 차고, 복부와 간구(肝區)에 통증이 있고, 탈장의 통증이 있다. 복수가 너무 차올라 숨쉬기가 힘들다.
설:설소(小), 담백설, 박백태, 습기가 많다(潤).
맥:좌우 모두 약맥.
이 환자는 잠시 밴쿠버에 다니러 왔던 중, 친지의 소개로 우리 한의원을 찾아왔다. 근원적인 치료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가 너무 차올라 고통이 심하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임상에 나선 지 몇 개월 안 된 상황에서 생각해보지도 못한 병이요, 누구를 의지할 수도 없다. 그동안 공부한 이론에 의지하여 혼자서 헤쳐갈 수밖에 없다. 우선 환자가 너무나 힘들어하고, 좌우 맥이 모두 약하다. 따라서 합곡혈에 침을 놓아 크게 기를 보하고자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합곡혈이 크게 기를 보하는 혈인지 잘 모른다. 교과서에도 없는 이론이다. 그러나 명의들의 임상경험집을 보면서 합곡이 기를 보하는 강한 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대장에 작용하여 복부의 기를 유통시킬 것이다. 또한 폐와 표리관계로 폐에 작용하여 선발작용을 강화하여 수액대사를 돕고 복수를 풀어지게 할 것이다. 다음으로 행간에 침을 놓으니 간구의 통증이 사라졌다. 그런 다음 하거허에 침을 놓았다. 위경락이면서 소장과 바로 연결된 낙혈이라 본래의 병 부위에 도달하면서 복부에 작용한 것이다. 이 혈은 풍륭 대신 선택한 것으로 풍륭은 단지 습담을 제거하지만 하거허는 풍륭과 이웃하여 같은 기능에 다시 소장에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음릉천에 침을 놓아 건비하여 습을 잡고자 했다. 동양의학의 기본사상이 간에 병이 있으면 먼저 비위를 다스리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 환자도 필시 비위가 크게 상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음릉천에 놓은 것이다. 이렇게 침을 놓고 나니 숨쉬기가 한결 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중완혈 부위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시 백회에 놓아 임맥과 독맥을 동시에 통하게 해주고 탈장으로 인한 통증도 올려주고 나니, 중완 부위의 통증도 없어진다고 했다. 이렇게 침을 다 놓고 나니 너무나 편하다고 한다. 30분 유침 후에 침을 뽑으니, 복수가 거의 다 쑥 빠져나간 상태다. 모두들 놀랐다. 그 많던 복수가 소변을 본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간 것인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실은 모두 조직에 필요했던 수분이 수액의 운행이 안 되어 한곳에 머물러 있다가 수액의 통로가 열리고 기가 돌게 되니 전신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동양의학은 병을 어떻게 치료하는가?』김동영, 산해,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