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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권희로 인질사건

작성자오비최이락|작성시간20.04.29|조회수199 목록 댓글 0

權禧老 권희로

캬바레(무도장 술집)에서 야쿠자 2명한테 빚 독촉을 받던 재일한국인 권희로(김희로)가 두 사람을 사냥총으로 살해했다. 그런 뒤 45km 떨어진 온천여관으로 이동해 여관 주인과 투숙객 등 20명을 인질로 잡고 약 3,000명의 경찰과 대치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형 인질극이 벌어진 것이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넝마주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3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라고 불렸다.

극빈층 조선인으로 일본에 살았는데 소학교 때부터
민족차별을 겪으면서 조선인은 다닐 곳이 못된다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으로 열세 살에 가출하여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먹었고,
일본 사회의 천대 속에서 수 차례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결혼과 사업에 실패하고 마흔 살이던
1968년 2월 20일 채권자의 청부를 받아 빚 독촉을
하던 야쿠자 2명이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한 말에 격분해 라이플총으로 이들을 사살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갖고 도주, 가와네 온천장에 있는 후지미야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4일 만인 24일 검거되었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 등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체포된 후 8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가석방을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박삼중 스님과 재일동포 사업가 조만길 등이 ‘재일한국인 김희로씨 석방후원회’를 만들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1999년 9월 7일 31년 만에 석방되어,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장기수는 법적으로
국외 추방토록 되어 있는 일본 법규에 따라
박삼중 스님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분노는 폭포처럼"이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고, 1990년대 초에는
영화 《김의 전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권희로는 1928년 일본에서 출생했다. 한국 언론에서
권희로로도 불리고 김희로로도 불린 것은 친부는
권씨이고 의부는 김씨였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은 권희로의 분노를 달래고자 그 옛날
그에게 모욕을 준 형사를 급히 수소문했다.
형사를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시켜 사과하도록 한 뒤,
권희로에게 TV를 틀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 정도 조치로 풀릴 분노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명분이 많았다.

그는 자수 권유를 무시하며 무장 대치를 계속 끌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사진기자로 가장해 접근한 경찰 7명에 의해 붙들렸다. 2월 24일, 권희로의 인질극은 그렇게 종료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는 복역 31년 만인
1999년 석방됐다. 그 뒤 고국에 정착해 2010년에 눈을 감았다.

사회의 위기를 '혐오'로 풀어낸 일본

권희로를 비롯한 재일한국인들이 겪은 민족차별은,
일본 사회에 중대 위기가 발생할 때는 집단적인 혐한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위기 상황에서 민심 이반을 우려한

일본 정부 혹은 지배층이 재일한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해서 독일 통합을
도모한 것을 연상케 하는 일이었다.

권희로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23년의
관동 대지진 때는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국인
음모론을 유포해 대중의 분노를 이쪽으로 유도했다.
한국인들이 대지진을 틈타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다.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실장인 김인덕은
<극우에서 분단을 넘은 박애주의자 박열>에서
"적어도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관동대지진은 유언비어가 발단이 되었다"면서

"조선 사람들이 지진의 혼란을 이용해서 폭행, 약탈,
방화, 여성 능욕, 폭탄 투척, 집단 습격, 우물에 의한
독극물 투약 등의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조선인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말이 유행했다. '불순한 조선인'이란 의미로 주로 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일본 발음으로 '후데이 센징'인 이 표현이
관동 대지진 당시의 일본열도에서도 유행했다.

'조센징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발 없는 말처럼 일본 전역으로 퍼지면서
'후데이 센징'을 운운하는 일본인들이 많아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뒤에도 유사한 양상이 보였다. 2018년에
<일본 근대학 연구> 제60집에 실린 노윤선의
'일본지진을 통해 바라본 혐한과 혐오 발언
관동 대지진과 동일본 대지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대지진 직후에 등장한 유언비어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바로 일본 사회 내에서 재일한국인을 배제하는 단계로 변하였는데, 동일본 대지진 이후 혐한 시위 건수가 늘어난 것이다. 실제로 2013년 10월 30일에 공개된, 외교부가 처음으로 주일 공관별로 전수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2009년에 30건에 불과하던 혐한 시위 건수는 2010년에 31건, 2011년에는 82건으로 늘어나더니 2012년에는 301건을 기록하였다. 3년 사이에 10배가 급증한 것이다."

위 논문에 따르면, 이때 등장한 구호 속에
"조센징을 죽이자! 학살하자!"도 있었다.
관동 대지진 때 등장한 '후데이 조센징'이란 구호도
현수막에 또다시 등장했다.

위기 때마다 재일한국인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
일부 일본인들의 경향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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