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사형집행인

작성자추월|작성시간23.10.04|조회수12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563

ㅡ 사형집행인! ㅡ

오늘 인터넷에 아래 기사가 주요 제목으로 떠 있는 것을 보았다.

[20명 연쇄살인한 유영철 서울구치소로 이감한 법무부,
사형장 시설 보수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사형 집행할 가능성 있다는 말이 나돈다"
유영철 이감 후 서울구치소는 얼어붙은 분위기로 사고 대폭 감소,
윤석열 정부가 정치적인 국면전환 카드로 사형 집행 선택할 수도,
서울구치소는 분위기 완전히 아주 얼어붙은 듯이 조용]

우리나라는 사형제도가 존재는 하지만 지난 1997년 12월 이후 25년동안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다.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최근엔 사형집행 여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과 신림역·서현역에서 연속해 발생한 흉기난동 사건 등 연이은 강력 범죄에 '사형제도 부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서이다.

<법무부는 지난달 25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연쇄살인범' 사형수들을 사형 시설이 있는 서울 구치소로 이감시키도록 조치했다. 아울러 헌법재판소는 3번째로 사형제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이기도 하다. 헌재는 지난 1996년과 2010년에 모두 사형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윗 기사처럼 사형집행 가능성을 열어놓는 모양새이다.

사형제도 존폐에 대한 시민들 생각은 엇갈리고 있다.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시민들은 흉기난동 연이은 강력사건에 대한 처벌차원에서 사형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사형제도는 '생명권'에 관한 제도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전하다. 사형을 다시 집행할 경우 국제적으로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우리 정부가 사형집행을 결단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하기 쉽지 않다. 사형집행은 단순히 국내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사형을 집행하게 되면 특히 EU와 외교관계가 심각하게 단절 될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나라가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이유는 2007년 EU와 범죄인도와 정보교환 협약하면서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사형집행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 선진국 중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 뿐이다.

현 윤석열정권이 미국·일본과 거리를 좁히려하고 있고 따라하기에 열중이다.

그렇다고 사형집행까지 따라 할까?

우리나라 국민여론은 끔찍한 범죄들을 저질렀을 때 그 범인을 당장 사형시켜라는 주문이 빗발친다.

현재도 여론조사 해보면 사형제도를 실질적으로 실시해라는 여론이 항상 더 높게 나온다.

여기서 묻는다.

<여러분들은 어떠 하십니까?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
실질적인 사형집행에 대해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나는 30여년 전, 직접 사형집행 현장에 있었고 사형집행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서 사형폐지론자가 되었다.

아랫 글은 오래 전에 썼고 이곳에 올리기도 했지만 다시 올려 본다.

****************'******

사형집행인!!

지금으로 부터 20 여녀 전,
노태우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교도소가 재소자들로 넘쳐나던 1990년도!

난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복역(?)중 이었다.

교도소하면 음침하고 아주 무서운 곳으로 생각 되어 질 것이다.
사실 교도소는 그러한 곳이다.
온갖 범죄자들을 모아 놓은 곳이니 오죽하겠는 가?

하지만 내가 교도소를 직접 겪어 보니 그 곳 또한 사람 사는 곳으로 사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일반인들과 다른 특수한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제약은 많았지만, 교도소 내에도 나름대로 사회와 비슷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그 당시 내가 근무하던 광주교도소 내에는 공장도 10개 정도 있었다. 재소자들은 아침마다 정해진 곳에서 일을 하고 오후 5시 쯤 해 떨어지기 전에 각자 정해진 자기 사방(재소자가 자는 방)으로 들어 가야 한다.

우리나라 범죄자 구금시설은 '구치소'와 '교도소'로 나누어진다.

구치소는 미결수 (구속은 되었지만 아직 형이 확정 되지 않고 재판에 계류중인 재소자)들이 있는 곳이고
교도소는 기결수 (형이 확정되어 강제노역 등에 처해진 재소자)가 있는 곳이다. 원래 이 두 곳은 따로 있어야 하는 데 내가 근무했던 광주교도소는 너무 오래된 시설이라 문하나 사이로 같이 있었다. (현재 광주교도소는 2016년에 옯겨 최신식 시설로 다시 지어져 있다.)

보통 사형수들은 형이 확정되어도 교도소로 보내지지 않는다.
구치소에 남아 미결수랑 같이 지낸다. 항상 손에는 가죽 수갑을 찬 채 오늘을 마지막 하루 같은 마음으로 불안 속에 살아 간다.

내가 근무할 당시인 1990년, 광주교도소에는 두 명의 사형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도 사형집행을 잘 안 해서 10년 가까이 된 사형수 들이었다. 원래는 그 정도 되면 사형집행을 안 하고 무기수로 감량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집권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정치적 상황을 해결하고 국민들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1989년 '범죄와 전쟁'을 선포했다. 본보기로 전국적으로 사형집행도 했다. 당시 교도소는 조폭들과 운동권 학생들로 미어 터졌다.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주 화창한 봄 이었던 것 같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을까?

갑자기 소지(교도소에서 직원을 도와서 심부름 하는 재소자, 이들은 교도소 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닐 수 있다.) 까지도 모두 다 사방(재소자들이 지내는 방) 안으로 집어 넣고 비상대기 하란 명령이 떨어 졌다.

난 교도소 내에서 폭동이 일어 난줄 알고 잔뜩 긴장하여 소지들을 잽싸게 사방에 집어 넣고 사방 문을 잠궜다.

그때 고참 한 분이 헬레벌레 한 모습으로 내 쪽으로 오시더니만

"어이, 자네 사형 집행 하는 것 한 번도 안 봤지? 평생 보기 힘든 일이니까 한 번 봐두는 것도 괜찮을 거야."

하면서 미결사 쪽으로 가 보라고 한다.

사람 죽이는 것을 보라고....
난 속으로 한 참을 망설이다가

"그래, 평생 언제 이런 것을 보겠어" 하면서 미결사 쪽으로 달려갔다.

미결사에 다다른 바로 그때 건장한 교도관 둘이 체구가 조그마한 재소자 양 옆구리를 끼고 미결사 쪽에서 막 나오고 있는 것과 마주 쳤다.

광주교도소 위치로 미결사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접견실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직원들이 있는 보안과와 교무과로 가는 길이다.

왼쪽으로 틀어 조금 가다 또 다시 길이 갈리는데 한 쪽은 직원들도 기분 나쁘다고 잘 쳐다 보지도 않는 곳으로 조그마한 하얀 건물이 바다 위 외로운 독도마냥 떨렁 홀로 서 있다.

건장한 두 교도관들이 재소자를 양 옆에 끼고 그 독도 건물 쪽을 향해 왼쪽으로 꺽으니 그 사형수 얼굴은 백지장 같이 변했다.

사형수 눈은 초점 없이 먼 하늘 허공에 잡혀 있었다. 발은 땅위에 붕 떠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사형수를 끌고 가는 두 교도관 얼굴은 저승사자 모습이라기 보다는 착잡함과 사형수 못지않는 긴장감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나는 바로 옆에서 그들을 자세히 보면서 같이 걸어 갔다.

사형장에 거의 도착하자 사형수 얼굴에는 핏기가 다시 돌았다. 허공에 맻힌 눈망울은 사형집행장 건물을 보고 그 얼굴에는 뜻 모를 냉소가 피어났다.

미결사에서 사형장까지는 200 미터도 채 되지 못한 짧은 거리였지만 사형수 그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을 까?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 사형수는 뒤돌아 보았다.

허망한 그 눈망울에 가득 채워오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푸른 하늘.

그의 뺨에 살포시 껴 안겨오는 봄 바람과 봄 향기!

그 날 따라 날씨는 어쩌자고 또 그렇게 좋던지....

난 가슴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아픈 마음으로 그 들 뒤를 따라 사형 집행장으로 들어 갔다.

음습하고 으스스할 것 같은 사형장 내부에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펄쳐져 있었다.

언제 왔는지 사형장에는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드라마 '모래시계' 에서 태수(최민수)를 사형시킨 장면을 보았다면 그 거와 비슷했다.

어느 새 검사와, 신문기자들 그리고 목회자, 검시관, 교도소 소장이 재판장 판사석 같이 약간 높은 자리에 않아 사형수가 들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교도관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먼저 교도관들이 사형수를 사형집행대 들어가기 전 재판장 피고석 같은 조그마한 현관에 있는 작은 판자 위에 앉혀 놓고 손과 어깨 쪽을 하얀 밧줄로 꽁꽁 묶는다.

여기서 한 가지 사형을 집행할 때,

‘교도관들은 절대로 한 명이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허가 받은 것이라지만 사람 목숨을 빼앗는 일이 기분 좋을 리 있겠는 가?

철저하게 나누어서 한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어쨌든 사람을 죽였다는
그 책임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날 본의 아니게
사형 집행인이 되신 분들은
코가 삐뚜러지게 술을 먹는다.

당연히 술 값도 조금은 푸짐하게 나온다고 들었다.

먼저 소장이 그 사형수 죄를 읽어 주고 확인한다. 다음 법무부 장관 명령에 의해 오늘 사형집행을 한다고 말한다.

소장이 읽어 주는 그 죄를 들어 보니 그 사형수는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여행 가자고 속여 산 속으로 유인하여 돌로 쳐 죽 인 뒤 유기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듣는 순간은 "죽어도 싼 놈이군" 하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나 갔다.

그것도 잠시,

소장이 읽어주는 그 모든 죄를 담담하게 인정하면서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둔 그 사형수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동안 사형수로 살아오면서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놓았다고 해도 몇 분 후 이 세상과 하직할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습니까?" 하고 소장이 물었다.

사형수는 싸늘한 냉소를 지으면서 처음엔 “없다” 라고 했다.

소장이 “이 생에서는 마지막이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재차 물으니

사형수는 "내가 말해보았자 무슨 소용있냐? 내가 하는 말 적지도 않으면서" 라고 말했다.

소장이 교도관에게 "빨리 적을 준비해!" 하니까

사형수는 그때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적는 것을 걱정하는 인간의 심리는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또 다시 착잡해져 왔다.

사형수는 차분히 말했다.

"우선 자기가 그 동안 교도소에서 모은 돈이 50만원 남았는 데, 그중 10 만원은 자기에게 면회를 와준 작은 엄마에게 드리고 또10만원 씩은 두 동생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20만원은 불우 이웃돕기에 쓰고,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안 생기기를 바란다." 면서 말을 마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생애 마지막 말로는 생각지도 못한 말들 이었다.

소장이 "말이 끝났냐" 물으니 사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이 목사차림에게 눈 짓을 하니 목사님이 나와서 사형수에게 마지막 예배를 보자고 했다.

또 다시 사형수는 처음엔 거부했다.

목사가 사형수에게 다가가 재차 부탁하니 "목사님이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헛걸음 하실 필요 없으니 하고 싶은 데로 하시라."고 했다.

이게 사형수가 생전에 한 마지막 말이 되었다.

작은 판자 위(도르레로 연결 되어 있음)앉아 있는 그를 아까와는 다른 교도관 둘이 나와 흑두건을 씌우고 온몸을 다시 한번 누에가 번데기 치듯이 꽁꽁 묶는다.

그리고 사형수는 검은 장막 속으로 작은 판자에 달린 도르레와 함께 사라졌다.

거기서 목에다 올가미 맺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어디선가 교도관이 "됐어?" 하는 말이 들려 왔다.

검은 장막 속에서 들려오는 "오우케이" 하는 대답

그리고 "덜커덩 ~ " 소리....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제 금방까지 숨을 쉬며 내 눈 앞에서 이야기 하던 사람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를 죽인 천하 나쁜 놈 되어 10년을 살아있어도 사는 것 같이 살지 않다가....

급기야....

도대체 저 사람은 이 세상에 왜 나왔을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가 살다간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의문을 내게 남겼다.

그 날 저녁, 나는 사형집행을 지켜 본 교도관들과 함께 교도소 앞 허름한 식당에서 아무 말 없이 막걸리만 들이켰다.

사형을 직접집행 한 교도관들은 어디서 우리 보다 훨씬 아픈 마음으로 질펀한 술 잔을 넘기고 있으리라.

현재 우리나라는 20년 이상 사형 집행을 하지않아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되었다.

아마 사람들마다 사형제도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각자 생각이 다를 것이다.

나도 끔찍하고 악마같은 범죄를 보면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사형제도 문제는 철학적으로 깊이 고민 해 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단지 인간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끔찍한 강력범죄가 일어 났을 때만 분노해소 차원에서 사형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형제도가 정말 강력범죄 예방에 효과는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 사회 필요악일까?

아님 법률로 허가 받은 또 다른 살인인 죄악일까?

사실 나는 역사 글 쓰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죄없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합법이라는 명목아래 사형을 당했다.

왕조시대에는 당쟁이나 권력투쟁에서 지면 역적으로 몰리고, 사상이 조금이라도 성리학에서 벗어나면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힘없고 빽없는 백성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제시대는 독립운동 했다고,

현대에 들어 와 악독한 군사정권 때는 민주주의 운동했다고 빨갱이로 몰아 사형집행 했다.

이번에 무죄로 밝혀진 동백림사건 피해자들도 이런 식으로 사라져 갔다.

아무 죄도 없이, 아니 남들 보다 조금 앞선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남들 보다 국가와 민족을 아니면 어떤 이념을 그리고 인간들을 더 사랑했다는 죄로 형장이슬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아무 죄 없이 이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들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났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과 작별 했을까?

만약 내가 10분 후에 죽는다. 거기서 빠져 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난 내가 본 사형수같이 담담하게 죽어 갈수 있을까?

물론 체념했고 누가 보아도 죽어도 싼 죄를 지었고 오랫동안 사형수로 살아와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교도관 고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생에 더 집착하고 마지막 발악을 더 크게 한다고 한다.

난 그들이 더 인간적으로 충분히 다가 온다.

그게 바로 연약한 인간 본 모습 아닐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나도 그러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 혼자 억지로 죽어간다면 내가 어떤 죽을 죄를 지었다 해도 모든 악담을 퍼붓고 저주를 내리고 갈 것 같다.

그러한 것도 생에 대한 집착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그럴 것이다.

모르겠다. 완전 체념하면 그저 한 번 히죽 웃고 갈 까?

어쨌든 사형집행을 본 기억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죄가 밉다 해도 사형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이 사형 제도에 가장 반대 한다고 한다.

사형집행을 직접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형제도에 반대 할 것이다.

오늘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맡은바 일에 충실하고 있는 교도관들에게 마음 속이나마 깊은 애정을 보내며 이글을 마친다.

ㅡ 초롱박철홍 ㅡ

************

아래 사진은 유영철

"웃으며 가겠습니다" 마지막 말에 형집행 교도관 눈물 쏟아
http://v.media.daum.net/v/20171226030158591?f=m&rcmd=rn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