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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과 대동법 2

작성자추월|작성시간23.11.05|조회수14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
역사 속 숨은 인물도 흐른다. 3

ㅡ 김육과 대동법 2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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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에 관해서는 여러 주제로 여러 번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이번 글도 지금까지 올린 글들을 정리한 글이고 반복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대동법'은 우리나라 역사 상 최고 개혁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조반정이 겉으로는 폐모살제, 친명배금 등을 명분으로 걸었지만 속으로는 대동법에 의한 양반사대부들 재산침훼가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대동법은 반정을 유발할 만큼 기득권층에게는 독약같은 것 이었습니다.

대동법을 보면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줍니다.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이 순간에도 여러 개혁조치에 기득권층 저항이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의대정원 확대가 의사협회에서 강력한 반대로 항상 무산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게 진행중 입니다.

물론 개혁 세력들 개혁 추진이 미진하고 실수한 부분도 꽤 있습니다. 개혁을 지지했던 국민들도 개혁을 미진하게 추진하고 실수하는 것을 보고 개혁피로감에 빠져 일부는 기득권층 교묘한 술수에 넘어 가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국민 힘을 믿고 진행하던 개혁은 동력을 잃고
지지부진 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반개혁, 반혁명 등 반동이 몰아쳐 옵니다.

위와 같은 장면 우리 역사 속에서 정말 많이 나옵니다.

가장 큰 예가 인조반정과 정조 사후입니다.

광해는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로 전쟁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여러 개혁조치로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 가려 했습니다.

광해 중립외교를 반정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서인정권은 중립외교를 등안시 해 정묘, 병자호란을 야기 시켰습니다.

정조가 죽고나서 정권을 잡은 노론은 정조 개혁조치를 다 되돌려 놓습니다. 그러다 노론에서 변형된 안동김씨 세도가에 의해 세도정치 시대를 열게하며 조선을 패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요즘 검찰개혁이 위와 같은 상황을 또 다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동법 이야기이니 현실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광해시대에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대동법이 경기도 쪽에서 부분 실시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아주 중요합니다.

아랫 글은 김영란법이 막 제정되었을 때 광주전남 일간지에 제가 기고한 칼럼입니다. 김육과 대동법에 대해 자세히 써 져 있어 그대로 올립니다.

김영란법은 지금 상황과 다른 내용도 조금 있으니 감안해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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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김영란법과 김육의 대동법 ㅡ

김영란법에 대한 헌재 합헌 결정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김영란법은 우리나라 고질적인 부정부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누구나 다 그 점은 받아 들인다.

하지만 여러가지 폐해를 지적하는 분들도 있다.

솔직히 나 또한 농촌출신 지방의원으로서 명절 선물등을 5만원으로 상한가 제한 한 것은 농축수산업에 종사하는 그 분들 어려움에는 함께하고 있다.

우리 전남도의회에서도 그러한 점은 현실에 맞게 개정해 주라는 성명서도 발표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한 법해석이 나오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우리 의정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 본다.

어쨌든 김영란법 실시는 늦은 감이 있고 반드시 실시 되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한다.

그런데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도 김영란법처럼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 법이 있었다.

대동법이다.

조선시대 때 100년 동안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논란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법이다.

대동법하면 '김육'이라는 분이 같이 떠 오른다. 그러나 김육이 대동법을 처음 제창하신 분은 아니다. 그래서 '김영란법'처럼 대동법에 '김육법'이라는 이름을 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육은 대동법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사대부정신에 쩔은 조선시대 관리로서는 정말 보기 드문 분이셨다.

아마 역사 공부를 깊게 하신 분들은 김육이라는 분을 대동법과 함께 들어본 이름이겠지만 일반인 대부분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김육의 역사적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분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경이롭다.

대동법!

단어 그대로 의미는 누구나 다 공평하게 세금을 내야한다는 소리이다.

조선시대에는 3가지 종류에 세금제도가 있었다.

중국 당(唐)왕조 때 정착한 것인데, 이후 동양의 근대 이전까지 세금 제도 기반이 됐다.

'조용조(租庸調)'라는 것이었다.

조(租)는 경작지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세금이다.

용(庸)은 국가에서 하는 대규모 공사에 차출되는 것이나 군에 복무하는 것을 말한다.

조(調)는 지방의 특산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금제도를 우리는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그 뜻은 정확히 모르는 체 그저 외우게만 했다.

먼저 알기쉽게 간략하게 설명부터 하겠다.

조(租) 는 지금으로 말하면 토지세이다.

용(庸) (군역,요역- 군에가거나 나라공사에 몸으로 떼우는 일)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남자들의 국방의무를 말한다. 요즈음은 없어졌지만 당시는 궁궐을 짓거나 국가적 대행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일을 시켰다

조(調)는 나라에서 지정하는 지역 특산품을 바치는 일이다. 지금은 없어진 세금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지방세 정도로 알아 두자.

그런데 여기서 조선시대에는 가장 큰 문제는 조(調) 즉 다른 말로는 공납이라고 불리었다.

이 공납이 당시 백성들의 세금 60%를 차지할 만큼 가혹할 가렴주구가 행해졌다.

즉 각 지역 백성들에게 할당된 지역특산품을 조정에서 맘대로 정했다. 백성들이 자기 지역에 없는 특산품을 어렵게 구해서 지방관에 받치면 지방관에서는 여러 이유를 대며 잘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방관 수령들이 일부러 공납할 물품 받치는 것을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게 만들어 놔야 커다란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 이었다. 즉 지방수령과 결탁한 상인들에게만 공납할 물품을 구입해서 바치게 했다.

일반 백성들은 수 십 배 비싼 가격을 치루고 지방수령과 결탁한 상인들에게서 특산품을 사야만 지방관에서는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이것을 '방납의 폐'라 했다.

방납의 폐가 너무 심해 백성들 고통이 아주 심했기에 일부 뜻있는 관료들이 공납을 토지소유에 따라 일률적으로 쌀로 바치게 하고 이 쌀로 조정이 직접 지방특산품을 구입하자는 주장을 펼쳤는 데 바로 이게 '대동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토지소유에 따라>이다.

그동안 양반들은 공납제도에서 비껴 서 있었다. 전혀 과세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토지소유에 따라 쌀로 세금을 내게 하니 거의 대부분 토지를 소유한 양반들도 과세 대상이 된 것이었다.

대동법에 따르면 양반들 세금은 엄청 늘었고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5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

즉 대동법은 요즘 담배값 인상, 법인세 감소와 정반대로 부자증세 서민감세 전형적 세금정책이었다.

이러니 당시 양반 기득권층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래서 대동법이 처음 실시하고나서 전국적으로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이 훨씬 넘게 걸렸던 것이다.

이런 100년 동안의 대동법 논란 한 가운데는 김육이라는 분이 계셨다. 김육이라는 분이 계셔서 대동법 실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에서 보면 가짜 광해군이 당시 영의정 이원익이 제안한 대동법을 경기도 일부에서 실시한다. 하지만 양반들 거센 반대에 부딪혀 더 이상 확산 되지는 못한다.

실록에 보면 대동법을 실시해 놓고 광해군이 대동법 확산에 반대하는 구절도 나온다. 광해 왕권이 확실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만큼 조정대신들 반대가 심했던 것이다. 광해를 지지하고 있던 당인 '대북'도 반대를 했다. 왕인 광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육은 광해군 당시는 하위 관리였다.

광해군시절 계축옥사(영창대군 외할아버지 김제남 역모사건)에 회의를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잠곡'이라는 곳으로 낙향한다.

김육은 잠곡에서 토굴을 파서 살만큼 최빈곤 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백성들 어려움과 지방관 가렴추구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김육에게 대동법만이 백성들을 살리는 정책이라고 굳게 믿게 만든다.

김육은 호도 '잠곡'이라고 짓는다.

김육은 인조반정이후 다시 조정으로 불려 나온다. 관리로서 승승장구 한다. 김육은 효종때 이르러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면서 오로지 대동법 실시에 자기 모든 것을 건다.

아래 나온 사진에서처럼 김육이 관직에 나가는 첫 번째 조건이 '대동법 실시'였다.

김육은 대동법 실시에 모든 것을 걸었고 살아 생전 효종 때 이르러서는 호남만 제외하고는 조선 전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다.

김육이 죽기 직전 마지막 유언도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지 못한 아쉬움과 자기 죽고나서 대동법이 유야무야 될까 봐 두려워했다.

이에 비해 조선 유학자들인 양반 사대부들은 대동법 실시를 목숨걸다시피 막았다.

지금도 조선 최고 유학자로 칭송하는 산당(노론에서 분파된 당) 대표 송시열은 대동법 실시에 가장 극심한 반대자였다.

그들은 백성 안위보다는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왕이 죽고나서 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느냐 문제로 서로 정권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을 뿐이다. 물론 예송논쟁은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상복 속에 감춰진 엄청난 권력싸움이기는 했다. 그래도 권력다툼 소재가 너무 째째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학문이나 말뿐이 아닌 실제 정책으로 누가 백성을 진심으로 걱정했었는지는 당시 대동법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 가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부 역사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완전 핍폐된 조선에서 그나마 대동법이라도 실시되어 조선이 버틸 수 있었다 한다. 대동법이 실시되지 않았더라면 백성들 민란으로 조선은 버티지 못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겼을 거라고 한다.

조선 오백년 역사를 살펴보는 입장에서 이 점은 아쉽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이 직접 세운 새로운 나라가 우리나라에 존재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대동법은 또한 미약했던 조선 상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특산품이 아닌 쌀로 거두어 조정에서 공납할 물품을 상인들을 통해 직접 사들이니 상업이 발전하고 대상인들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직까지 대동법과 김육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드물게 현실 정치 속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김육이 왜 지금와서 까지도 역사적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

아직도 양반 기득권층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까?

김영란법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

나는 이러한 것들이 궁금하다.

ㅡ 전남도의원 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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