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
역사 속 숨은 인물도 흐른다. 4
ㅡ 독톡한 신념으로 조선 역사를 바꾼 '진안대군 이방우'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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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고있는 '역사 속 숨은 인물 찾기'는 앞으로 다음과 같이 써 볼까 합니다.
첫 째, 그 인물이 살았던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 해, 현재 일반인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당시 사상이나 행적이 진취적이고 앞서 나갔던 숨어있는 인물들을 찾아 되새겨 보자는 것입니다.
둘 째, 역사 속에 이름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잘못 알려진 것이나 감추어진 사안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셋 째, 우리 역사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뿐만 아니라 아주 부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진 인물에 대해서도 그 진실에 대해 면밀히 알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이 인물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역사 속에 이름 석자나 어느 정도 기록이 있기에 이 글들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의미있는 일을 했음에도 아예 이름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수 많은 숨은 인물도 많을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들풀되어 쓰러져 간 의병들, 독립군들, 군인들 등 수없는 이름없는 의인들!
그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 하고 우리 삼천리 강산에 피빛 들꽃으로만 남아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 온 거의 모든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 합니다. 그들이 살았었다는 존재조차 백 년도 못 되어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조용필 노래가사,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혹은 아래 속담처럼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 하고 흔적조차 남기지 못 한 인생은 실패한 인생일까요?
사실, 나도 내가 태어난지 백년 정도 지나면 내 직계후손들도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 할 것입니다.
저 또한 제 할아버지 이름정도는 알지만 증조대부터는 모릅니다. 그래도 족보를 보면 대략이나 알겠지만 관심도 없습니다.
이러한 걸 생각하면 사는 게 너무나 허망해 집니다.
아직 이 인생이란 거,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그러나 역사 속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흔적조차 없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해도 실패한 인생만은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앞뒤없이 조금 이상하게 샜습니다.^^
그래도 역사 글을 써 온 사람으로서 숨견진 인물이나 잘못 알려진 인물들 진실을 정리해 낸 다는 거,
나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새벽 덜 떠진 눈을 비비며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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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대군 이방우'
이방우,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 다섯명은 조선 태조 첫번째 부인 한씨 소생 아들들이다.
이 아들 중 이방원이야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후에 정종이 되는 이방과나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간은 들어는 봤을 것이다.
요즘와서야 티브드라마를 통해 이방우에 대해서도 조금 알려지고 있다.
세째 이방의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항상 이방원 편에 서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이방우는 1354년(공민왕 3)에 태어나 1393년(태조 2)에 사망했다.
고려 말 과거급제(음서로 진출했다는 말도 있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였다.
이방우는 이성계 큰 아들답게 형제들 중 최고 능력자로 알려져 있다. 이방우는 문신이었다. 학식도 뛰어 났다. 그런데 무예에도 뛰어 났다.
방과, 방의, 방간이 무인적인 면모, 방원이 학식적인 면모가 많이 드러났다면 이방우는 문무 둘 다 조화를 이루었다.
이방우는 이방원에게는 13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 같은 장형이었다. 실지로도 이방원은 큰형 이방우를 아주 어려워했다.
이방우가 아버지 이성계 뜻에 반하지만 않았다면 세자 책봉 때 적장자 위치인데다 정몽주 죽음과도 얽힌 것도 없었으니 세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와 신료들이 세자 책봉에 관해서 말할 때 윤소종이 적장자로 이방우를 언급했지만 이성계는 "이 나라 개국에 반대해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았다.
만약 이방우가 아버지 이성계 뜻에 반하지 않고 세자가되어 이성계 뒤를 이었다면 조선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정도전 죽음도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왕들 족보도 완전 바껴졌을 것이다.
세종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에게 한 글도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방우는 왜 조선개국에 반대하여 세자가 되지 못 했을 까?
여러가지 설이 있긴하다.
이방우가 조선건국에 부정적이지 않았다라는 사람들 의견도 있다. 그랬다면 위에 써진 이성계 말은 어긋난다.
지금까지 정설로 내려온 것이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방우는 고려를 향한 충심이 너무 깊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여 먼저 최영 등 중앙 정부를 지키던 남은 병사들을 제압한 후, 이 때 둘째 방과가 "우왕을 폐위하거나 죽여야 되지 않냐?"고 말하자 분노해 동생 방과 멱살을 잡으며 우리가 거사를 일으킨 건 어디까지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지 결코 반역을 꾸민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육룡이 나르샤'라는 TV드라마에서도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자 이방우가 이방원에 쫒아가 이방원 뺨을 때리고 멱살을 잡으면서 이방원을 크게 질책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일화들은 이방우가 이방원이나 이방과와 성격이나 그 시대상황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방우는 고려에 대한 충심에 있어 지나치게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고지식한 이방우는 할아버지인 이자춘과 그 이전 선조들이 고려인으로서 원 신하였던 것을 많이 부끄러워 했다.
그래서 이방우는 고려의 더 충직한 신하가 되고자 했다.
고지식한 이방우 이런 점 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지 않았다면 칭송받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해서 새나라를 건국하려고 한는 데 큰아들 이방우는 아주 내놓고 딴죽을 건다.
이때부터 이방우 이해하기 힘든 언행들이 더 벌어지기 시작 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직후, 장자인 이방우를 세자로 세우려하자 이방우는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만약 자기를 세자로 세우면 왕이 되자 마자 왕위를 다시 고려 왕씨에게 반환하겠다고 까지 극언을 한다.
이방우는 고려신하로서 고려왕조에 불충된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세자로 세우는데 격렬하게 반대하던 이방우는 느닷없이 황해도 해주라는 지방으로 내려 가 버린다.
이에 이성계는 한숨을 쉬며 이방우를 세자로 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이방우에게 자기 고향인 함흥에 정착하도록 해준다.
이방우는 함흥에서 자기 선조들이 고려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당시 몽고에서 전해져 온 새로운 술인 '소주'를 날마다 마시고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다 함흥에 온지 1년 만에 죽고 만다.
조선실록에도 아래와 같이 쓰여져 있다.
“원체 술을 좋아한 진안대군 이방우는 날마다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
ㅡ태조실록 1393년 12월13일ㅡ
이방우가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랬으니 후에 다시 세자를 논 할 때 이성계가 위에처럼 말 할만 했다.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조선실록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이성계 최측근이었던 이지란의 <청해백집>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을 사실로 생각했을 때
지금 글을 쓰는 나로서도 이방우 당시 처신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건국이 우리 역사 진행에서 더 발전하고 더 나은 일이었는가?'
이에 대한 의문은 우선 제껴두고 생각 해보자!
모든 나라에는 흥망성쇄가 있다. 오백년 된 고려 또한 마찬가지로 흥망성쇄를 보였다. 당시 오백년 된 고려말기는 한 나라가 패망의 길로 가는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개혁적인 신진사대부와 무인세력 이성계에 의해 토지개혁, 노비해방, 권문세가 타도등 대부분 일반 백성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개혁적인 정책으로 새로운 나라 건국을 진행하고 있었다.
조선건국 직전과 건국초기는 분명하게 백성들이 바라는 개혁적인 정책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아버지인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이방우 자신 또한 세자가 되어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였다.
이방우가 진정 백성들을 생각했다면 자신이 왕이되어 백성들을 위해 더 개혁적인 정책으로 풀어가면 된다.
그런데 이방우는 백성에 대한 도리 보다 다 쓰러져가는 고려에 대한 충정만을 우겼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방우는 당시 시세를 전혀 읽지 못했다. 한 왕조에 대한 충정보다 더 큰 의리나 백성들을 위한 충정을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이방우는 시야가 좁고 지나치게 고지식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방우가 고지식하고 고려에 충심이 강했지만 왕이 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우도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은 있었지만 고려 신하로서 엄청 갈등은 한 것으로 보인다.
이방우가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은 그가 이제까지 지녔던 신념과 완전히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신적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스스로 이 갈등때문에 광기에 휩쓸릴 뻔 했다며 방원에게 고통을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고지식한 이방원 성격을 이용한 것이 이성계 두번째 부인 강씨였다.
계비 강씨 신덕왕후가 자기 어린 아들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한 계략으로 이방우가 소주만 마시다 알콜중독이 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 계략의 구체적인 것은 내가 기록을 아직 찾지는 못했다.
또 한 가지는 이성계가 아예 이방우를 처음부터 세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려왕족을 수없이 학살하고 왕이 된 이성계가 고려신하였고, 고려 권문세족 딸과 혼인했으며, 고려왕실과도 연관이 있는 이방우를 후계자로 지명하기를 꺼렸을 거라는 추측이다. 이런 추측은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와 아무런 연관이 없던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웠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방우는 자기하기에 따라 굴러오게 되어있는 세자자리를 스스로 발로 차 버린 꼴이 되었다.
(이성계가 이방우를 세자로 안 세우려 했다할지라도 이방원 예를 보듯이 얼마든지 스스로 세자가 될 수도 있었다. 이방원보다 훨씬 더 명분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역사도 크게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이방우는 역사 속에서 아예 사라지고 만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방우의 이런 지나치게 고지식함은 우리 역사 발전에 긍적적으로 작용했을까?
부정적으로 작용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