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유도원도는 왜 명작일까?
한국의 국보 1호는 숭례문이지만 만약에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당연히 국보 1호가 되었을 법한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그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시대 초기에 그려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는 그림입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속에 본 이상적인 자연을 화가 안견(安堅)을 시켜 그리게 한 작품이지요.'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쓴 건 <몽유도원도>가 아쉽게도 한국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임진왜란 무렵에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에 있었던 만큼 유명해진 것도 일본에서 먼저였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학자들은 한국의 그림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그림 앞에서만큼은 달랐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천하의 명품'이라고 감탄을 했거든요.
도대체 어떤 그림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꿈을 꾼 안평대군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어요.
또 글씨도 아주 잘 썼고, 그림도 좋아해서 중국과 조선의 그림을 다양하게 즐겨 감상하곤 했어요.
꿈을 꾼 것은 1447년. 그가 30세 때의 일인데, 꿈에서 그는 좋아하는 신하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도원(桃源)'이라는 신선 세계를 구경했습니다.
도원은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란 뜻입니다.
복숭아꽃이 핀 마을이 어째서 신선의 고향이냐고요?
이 배경에는 중국 진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있어요.
<도화원기>의 작품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전에 중국의 한 어부가 고기잡이를 갔다가 계곡에서 길을 잃게 되었어요.
한참 뒤에 복숭아꽃이 만발한 평화로운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어부에게 친절하고 극진히 대접을 해 주었지요.
마을 사람들은 진(晉)나라 때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고 있다며 어부에게 "바깥 세상의 전쟁이 끝났소이까?"라고 물었어요.
그 말을 들은 어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晉)나라는 어부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 수 백 년이나 앞선 시대의 나라였거든요. 마을 사람들이 몇 백 년 동안 외부와 교류하지 않고 그곳에 살았다는 뜻이랍니다.
무척 놀랐지만 어찌되었든 어부는 융슝한 대접을 받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그곳에 다시 가려고 했지만 길을 잃었던 계곡 어디를 가 보아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선이 사는 이상적인 곳을 '도원(桃源)' 또는 '도화원'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몽유도원(夢遊桃源)'이란 '꿈속에서 도원을 거닐다.'라는 뜻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다고 한 경치가 마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펼쳐져 있어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속에서 도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림에서 따라가 볼까요?
우선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계곡을 건너면 높은 산봉우리를 마주하게 되고, 높은 산들의 아래쪽을 돌아서 산길을 다시 올라가면 동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동굴을 빠져나와서는 더 높은 산길을 가는데 그 후로는 산과 구름에 가렸는지 길이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폭포가 있는 곳쯤에서 다시 길이 보이는데 이 길로 내려와 폭포 아래의 개울을 건너고, 바위 뒤쪽으로 빠져나가면 거기에 바로 복숭아꽃이 핀 마을이 펼쳐져 있어요.
마을에는 복숭아 꽃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초가집도 보이고, 냇가에 띄운 조각배도 보입니다.
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조춘도>를 그린 곽희의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는것이 특징입니다.
산을 웅장하고 복잡하게 그린 점, 바위의 먹색을 짙게 또는 옅게 칠해서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 점 등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아래쪽에 바위산을 쭉 그려 놓은 점이야말로 안견(安堅)의 탁월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바위산들이 있어서 마을은 오른쪽에 보이는 높은 산과 절벽들과 함께 아늑하게 감싸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위틈을 지나면 갑자기 별천지가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지요.
실로 놀라운 상상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색채를 사용하는 감각도 아주 특별합니다.
이 그림은 비단의 뒷면에 황갈색 물감을 칠했어요. 그래서 그림 전체가 매우 부드러운 황색으로 일관되어 보입니다. 현실 세계와는 다른 꿈속 세계의 색채를 표현하려고 이러한 기법을 쓴 것이랍니다. 이와 같은 뛰어난 솜씨 때문에 안견(安堅)은 조선시대의 3대 화가로 손꼽히고 있어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단지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놀라운 점입니다.
안평대군의 발문과 찬시, 스물 한 명의 화평, 그것들이 모두 모인 그림과 시문의 종합체이기 때문이죠.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같은 집현전 학사 외에도 음악가 박연, 천문학자 김담, 승려 만우의 찬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향의 공간을 그리고 있는 그림에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니 이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요? 그래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단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잠시 간송 전형필(全鎣弼)의 이야기에 아쉬움을 남겨봅니다.
1931년, 동경 우에노 미술관의 전람회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출품되었습니다.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吳世昌)의 집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전형필 선생은 당시 3만원에 이 그림을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3만원이면, 서울에 있는 기와집 30채 값이었다고 하는데, 간송(澗松)은 일단 계약금을 걸어두고 이 그림을 사려고 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 전형필 선생은 상중(喪中) 이었다고 합니다.
탈상 때까지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말고, 유산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때문에 전형필(全鎣弼) 선생은 그만 그림을 놓치고 말았다고 해요.
이 사건은 간송에게 상처가 되어 이후<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일본의 덴리대학에서 국보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10여년 전, 우리나라에서 잠시 특별전을 열었던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한 사람당 30초씩 관람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다시는 전시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간송 전형필(全鎣弼) 선생이 이 작품을 구입하지 않았던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