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무릉도원을 노닐 던 꿈을 화가인 안견에게 말하자 안견이 단 3일만에 그려서 안평대군에게 바친 그림이다. 이에 안평대군이 직접 '몽유도원도'라는 제목과 함께 7언절구의 시를 쓰고, 안평대군과 함께 어울리던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 박팽년 등의 문사 20여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완성된 작품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찬시)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이 그림의 화풍은 꿈속 도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으로, 기암절벽 위에 복사꽃이 만발하고, 띠풀로 엮은 초막과 폭포수 아래 빈 배도 보이는 꿈속의 낙원을 표현한 안견(安堅)의 걸작이다.
당시 시와 글을 지은 이들이 모두 친필로 글을 적어 두어 예술적 가치 외에도 역사적인 가치도 상당한 작품이며, 이른바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이 어우러진 조선 전기의 보물급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몽유도원도> 찬시
세종의 셋째아들이 꾼 무릉도원에 대한 꿈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도연명의 《도화원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통의 두루마리 그림과는 다르게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왼편 하단부에는 현실세계, 나머지 오른쪽 부분은 꿈속 세계를 표현하였다. 복숭아 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절벽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대조적인 분위기이지만 통일감이 있고 조화롭게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 화풍인 이곽파 화풍을 이용해 그렸는데, 부감법을 이용해 그림 공간처리나 높이에 따른 대조, 운두준법, 세형침수, 조광효과의 표현 등에서 이곽파 화풍의 영향이 잘 나타난다.
그림 양쪽으로 안평대군의 제문(左)과 시문(右)이 적혀있고,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등의 당대 20여명의 찬문이 있는데 모두 친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는 물론 서예사로써 큰 가치가 있고, 한국 산수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이한점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찌 알수 있냐면, 안견의 싸인이 오른쪽에 있다. 짐작하겠지만, 그림을 다 그리고 맨 끝쪽에 싸인을 남기게 되는 습성에 따라 싸인이 있는 쪽이 회화의 흐름의 끝이다. (이는 현실과 꿈은 반대로 이루어져 있기에 당시의 표현 방식과 반대로 그려졌다고 한다)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安平大君의 「序詩」
世間何處夢桃源,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野服山冠尙宛然.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著畫看來定好事,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自多千載擬相傳.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 직하지 않은가.
後三年正月一夜,
삼년 뒤 정월 초하룻날 밤,
在致知亭因披閱有作.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이를 펼쳐 보고서 짓노라.
淸之청지(안평대군의 자)
또한 왼쪽에 쓰여진 안평대군의 발문을 요약하면,
내가 정묘년 4월20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인수와 함께 산 아래 이르러 높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하고, 복숭아가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야복 차림의 행객을 만나니 정중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인수와 함께 말을 몰아, 깍아 지른 절벽과 수풀을 헤쳐 그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마을이 나타났고 사방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가려진 사이로 복숭아 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비치었다.
또 대나무 사이로 초막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섬돌은 무너져 가축도 없으며 앞 냇가에 빈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흔들거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인기척에 뒤를 보니 정보. 범용도 동행 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는데,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바쁜데 어째서 그때 꾼 꿈이 도원에 이르렀는가?”
뒷날 이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말이 있으리라.
꿈을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완성되었고, 비해당(匪懈堂)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라고 되어있다. 비해당은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하사받은 당호(집)이며, 매죽헌은 인왕산 아래 누상동 수성계곡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정자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덴리 대학 부속 덴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어떤 경로로, 어떻게 반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제4진으로 조선에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도 고양현에 있는 절 대자암(大慈庵)에서 이 그림을 약탈해 일본의 손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추정만 할 뿐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몽유도원도를 소장했던 일본소장가 중에서 도진구징(島津久徵)의 생애나 활동을 미루어 볼 때,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에 있었다는 사실이 추정되고 있으며, 1955년경부터 덴리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학계에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이 작품의 가치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사실상 약탈당한 문화재라고 추정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증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著) 내용 보기
1592년 4월 13일 왜구가 부산으로 쳐 들어와 5월 1일 서울에 입성한 후, 남별궁에 주둔한 총대장 평수가(平秀家)가 이 절에 보관하던 안평대군의 유품 중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장서(藏書)와 금불(金佛)까지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일본에 반출하게 되는데, 사기(史記)에는 없어도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때가 틀림없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듬 해인 1593년 4월 13일 왜적이 선릉과 정릉의 재궁(梓宮)까지 파헤쳐 진기한 수장품을 찾는데 혈안 이였고, 특히 궁중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올리기위해 왕족들이 찾은 절을 집중적으로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이 때 왜장 평수가의 조력자는 전 공조 참의 성세녕(成世寧, 3품)인데 그의 아우 성세강(成世康)과 난을 피하여 양주(楊州)의 산중에 있었고, 그가 기생을 첩으로 삼아 태어난 양녀(養女)가 있었는데, 왜장 평수가(平秀家)의 총애를 받았다. 그 양녀를 인연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전처럼 거처하였으며 왜인들이 그를 존대하였으니, 문관(文官)으로서 적에게 붙은 자는 성세녕 뿐 도연명의 <도화원기>
<몽유도원도>는 세종 29년 1447년 4월에 안견이 그린 그림으로, 가로 106.5cm 세로 38.7cm 의 대작입니다.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에게서 꿈에서 본 도원 이야기를 들은 안견이 사흘 만에 그린 작품으로, 거의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 회화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안견의 작품 중 진위가 가장 확실하게 밝혀진 그림입니다. 현재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작품에는 진품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없는데,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과 찬시 그리고 신숙주, 박팽년 등 당대의 명현 21명이 찬시가 붙어 있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몽유도원도>는 크게 세부분으로나눌 수 있습니다. 왼편에서 부터보면 현실세계의 일상마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가운데는 깎아지른 절벽과 무릉도원으로 가는 동굴등 험난한 길이 이어집니다.그리고 오른쪽에 복숭아 나무가 많은 마을인 무릉도원이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이전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의견입니다... <몽유도원도>를 1893년 이전에 '수입'했다는 '물표'가 소장경위의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튼 <몽유도원도>는 일본에서 여러 사람을 거친 다음, 1950년대 초반에 덴리대가 구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몽유도원도>를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몽유도원도>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전신 된 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에서 다시 한번 전시되었고, 이번이 3번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국보급 작품을 일본에서 빌려와 전시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파손이나 훼손되지 않고 잘 보전되어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화원기>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 (376~396)에 무릉(武陵)에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살았다. 어느날 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복사꽃 숲을 만나게 되었다. 냇물 양편 기슭은 수백 보에 걸쳐 복숭아나무 이외에는 잡나무가 일체 없고, 향기로운 풀들만이 산뜻하고 아름다우며 떨어지는 꽃잎들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어부가 매우 이상히 여겨 복사꽃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 보았다.
그 산에는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그 뒤에서 빛이 비치는 듯 하였다. 곧 배를 버리고 굴을 따라 들어가는데 처음은 아주 좁아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으나 수십 보를 가니 확 뚫리며 밝아졌다.
땅은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이 뚜렷하고, 좋은 밭과 예쁜 연못, 줄지은 뽕나무와 대나무 등이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 있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왔다갔다하며 씨 뿌리고 농사짓는 남녀의 옷 모양새는 모두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는데 노인이나 아이나 모두 기쁘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부를 보고 놀라며 어디서 왔는가를 묻자 어부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집으로 데려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대접하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옛 조상들이 진나라 때의 난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와서는 다시 나가지 않았소. 그래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영영 멀어진 것입니다."하면서 요즘은 어떤 세상이오?" 하고 물었다. 한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니 위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일일이 들은 바를 말하니 모두들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 후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집으로 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이렇게 며칠을 머물렀다 떠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시오"하였다. 그러나 어부는 밖으로 나와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다.
군에 이르러 태수를 뵙고 이 같은 사실을 말하였다. 태수는 사람들을 보내 표시를 찾도록 했지만 끝내 그 길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남양에 사는 유자기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다. 이 얘기를 듣고 기꺼이 도원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그 뒤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