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공과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광수라는 인물을 대하면 으레 그러하듯, 그의 역사적 과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아예 읽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우리 근대 문학의 효시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심정으로 그의 소설을 펴보았다.
이광수의 <무정>, (애플북스, 2014).
1917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6개월간 연재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한글 장편 소설.
불과 25세의 청년이 <학비를 벌려고> 쓴 글이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는 그 소설. 그래, 어떤 선입견도 배제하고 작품 자체만 한 번 읽어 보자.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지난 백 년의 세월. 그 세월의 간극이 이리도 크단 말인가!
한국 근대사가 겪어야 했던 그 백 년의 세월. 그 세월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한국인의 삶의 근본을 바꾸어버렸던 백 년이었다. 엄청난 역사적 격변들이 지난 백 년 세월, '근대화'라는 이름하에 압축적으로 몰아치면서 형성하고 변화시킨 것들.
불과 나의 할아버지 세대가 목격하였던 그 시대와 지금 우리 현대 한국인은 모든 면에서 얼마나 다른가!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언어였다.
백 년 전 조선말은 어찌 이리 고울 수가 있단 말인가!
백 년 후 내가 쓰는 한국말은 어찌 이리 거칠단 말인가!
"이 어른이 내가 매양 말하던 이형식 씨요. 젊으시지마는 학식이 도저하고 또 문필도 유명한 어른이오. 이번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솝사 하고 내가 청하였더니, 분주하심도 헤아리지 아니시고 이처럼 허락하여 주셨소. 이제부터 매일 오실 터이니까 내가 출입하고 없더라도 마누라가 잘 접대를 하여야 하겠소."
"제 자식을 위하여 수고를 하신다니 감사하올시다. 젊으신 이가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참 은혜 많이 받으셨삽네다."
"천만엣말삼이올시다." (21)
최초의 한글 장편소설에서 드러나는 백 년 전 우리 할아버지들의 말투. 그것은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다.
나의 언어의 뿌리를 알게해 주는 감동. 백 년 세월이 얼마나 격변이었길래 현대 한국어는 이렇게 거칠어졌을까, 탄식이 일었다.
첫 장을 읽는 순간, 나는 누구나 이광수의 이 소설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떠나 제 언어의 뿌리와 풍속의 시세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렇게 바뀐 언어와 풍속만큼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바뀌었다.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여전히 봉건적 유습에 깊이 지배당하고 있다.
소설 전반부는 주인공 이형식의 은인인 박진사의 딸 영채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구한 인생유전의 스토리가 펼쳐진다.
신교육에 뜻을 품고 전재산을 풀어 학교를 세운 박진사 덕분에 신교육의 세례를 받은 형식. 박진사는 딸 영채의 사윗감으로 명민한 그를 점찍어 둔다.
그러나 교육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모함에 걸려 옥살이를 하게 된 박진사. 이에 몰락한 집안의 간난신고 끝에 아버지를 구하고자 기어코 기생이 된 우리의 이뿐 언니 가련한 박영채!
세월이 흘러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경성학교 교사가 된 형식이는 장안의 내로라하는 부잣집 김장로의 딸 선형이의 미국 유학 준비를 위한 영어 개인교습을 맡게 된다. 그는 선형의 고운 자태를 보고 첫눈에 반하며 온갖 상상에 빠져든다.
이때 7년 만에 그를 수소문하여 찾아온 영채. 아버지 박진사가 점지한 뜻을 좇고자 오로지 형식만이 지아비될 사람이라 생각하며 오매불망 기생 생활을 하면서도 정절을 지켜온 거디었던 거디었던 우리의 영채!
그 영채가 눈물을 하염없이 떨구며 형식의 앞에 나타난 거디었던 거디었으니, 아~ 슬프도다!
형식은 박진사에게 입은 은혜와 영채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떠올리면서 갈등에 빠진다. 그리고 영채의 미모에 반하여 자신의 의무를 지켜서 영채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서 형식은 자신의 유교적 여성관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에게는 오직 여성의 순결만이 관심이다.자신이 사랑하고자 하는 이의 절박했던 고난의 상황을 동정하면서도 오로지 여자 몸의 순결이 사랑의 기준이다.
대체 영채는 지금까지 처녀였을까 하였다. 칠팔 년을 기생으로 지내면서 처녀로 있을 수가 있을까 하였다. 또 매음하지 아니하고 기생 노릇을 할 수가 있을까 하였다. 그렇다! 영채는 도저히 처녀 될 리가 만무하다 하고 형식은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왔다 갔다 하였다. (169~170)
형식과 7년 만의 해후. 그러나 영채는 단골 손님에게 강간당한 후 비탄에 빠지고 만다.
형식에게 '버린 몸'으로는 이젠 갈 수 없으니 정절을 버린 죄로 자결을 결심하고 형식에게 편지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은 속으로 영채의 이번 행위는 마땅하다 하였다. 정조가 여자의 생명이니 정조가 깨어지면 몸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200)
지금 현대인의 관념으로는 피해자가 도리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이해불가능하지만, 백년 전 사람들의 사고는 이러했다. 언어의 급격한 변화만큼이나 우리의 사고방식도 가파르게 바뀌어 온 셈이랄까.
그러나 사실 우리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자의 혼전 순결은 매우 중요시된 관념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광수의 소설 속 형식이의 관념을 구석기 시대의 구태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스토리는 영채와 형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다 75장부터 급전환을 맞는다.
영채는 대동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알고 낙심하던 차에, 신식물이 든 부잣집 김장로가 형식에게 딸 선형과의 약혼과 함께 미국 유학을 제의한 것이다.
이 무슨 노다지요 로또란 말인가!
형식은 영채의 일은 단숨에 잊어버린다.
이 소설에서 형식이란 사람의 의식은 지금 우리의 잣대로 잴 수는 없다.
박진사의 은혜를 입고 일찌기 교육에 눈을 뜨고 그 딸 영채를 맞이하리라는 언약도 지켜야 하지만, 영채는 이미 대동강물에 빠져 죽었고, 새로운 황금의 기회 앞에 선 그의 선택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이 소설은 세 사람의 삼각 관계를 다루고 있고, 각자가 처한 심리가 세밀히 묘사되고 있다.
문제는 영채나 형식이나 선형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하나의 주체적 근대적 '개인'으로서 자기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한다. 타율적으로 주어진 결정에 그저 의무감으로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형식은 선형과의 약혼 제의를 받고도 스스로는 이를 결정하지를 못하고, 신우선이라는 친구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마음을 굳힌다. (77장)
선형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아버지 김장로가 배필을 정해준 대로 따르고 만다. (301)
영채 또한 평양으로 자살하러 가는 기찻간에서 만난 한 유학생 병옥과 대화하는 중에, 스스로 형식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래야 한다'는 봉건적 의무감으로 형식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89장)
이들의 의식은 전통적 사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사조 속에서 변화하려고 몸부림치고 갈등하는 그런 존재들이다.
90장은 이광수의 신사상, 봉건 의식의 비판이 표출되는 장. 자살하러 평양에 가는 영채를 우연히 만난 당찬 일본 유학생 병옥이는 영채를 동정하면서 그의 낡은 봉건적 생각을 비판한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허하였다가 그 사람에게 몸을 바치기 전에 몸을 더렵혔으니 죽어버리는 것이 의리가 아닐까요?"
"그러면 몇 가지를 물어보겠습니다. 첫째, 이 씨에게 마음을 허하신 것이 영채 씨오니이까. 다시 말하면 영채 씨가 당신의 생각으로 마음을 허한 것입니까, 또는 부친의 말삼 한 마디가 허한 것입니까?"
"그게야, 무론 아버지께서 허하신 게지요."
"그러면, 부친의 말삼 한 마디로 영채 씨의 일생을 작정한 것이오그려."
"그렇지요. 그것이 삼종지도가 아닙니까."
"... 다른 사람의 뜻을 위하여 제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저를 죽임이외다. ... 영채 씨도 이러한 낡은 사상에 종이 되어서 지금껏 속절없는 괴로움을 맛보셨습니다. 그 속박을 끊읍시오. 그 꿈을 깨시오. 저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시오. 자유를 얻읍시오!" (331~332)
<무정>의 제목은 왜 무정인가?
서로에 대한 의무감만으로 서로 엮였던 그들은 서로에게 자연스런 사랑의 정이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형식은 영채를 찾으러 평양에 갔다가도 동행한 기생에게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다가 아, 나는 왜 이리 무정한 놈인가! 자탄을 한다.
작가는 낡은 결혼제도의 폐해를 격렬히 비난한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다.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 조선서는 천지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 조선의 흉악한 혼인 제도는 수백 년래 사람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 (401~402)
주인공 형식과 영채, 선영은 모두 구습에 얽매여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왔을 뿐이다.
이들 세 사람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대 상황이요 과제이다. 그들에게는 새롭게 눈떠야 할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 내용 자체는, '아! 그리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좋더란 말이더냐!'와 같은 류의 신파에 가까운 연애소설이다.
아~ 눈물 없인 들을 수 없구나! 박영채의 기구한 삶이여! 이런 변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늘 눈물을 줄줄 흘린다.
아마 그 시대의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의 기구한 삶에 울고, 신문명과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형식의 웅변에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어찌 됐든 이 소설은 무엇보다 스토리가 자미있다.
소설가 김동인은 <춘원연구>, (춘조사, 1956)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무정>의 스토리와 함께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춘원은 <무정>의 대부분을 도쿄의 조선 유학생 기숙사에서 썼다고 한다. 쓴 동기도 문학적 창작욕도 있었지만, "약소한 고료로나마 학비를 좀 벌어보겠다는 욕망"에서였다고 한다. (26)
김동인의 무정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신랄한 비판 일색이다.
주인공 이형식이란 인물의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하는 줏대없음과 신사조를 고취한다면서 오히려 영채와 같은 봉건적 사고를 가진 인물을 '지고지순한 인물'로 미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김동인의 이런 비판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내가 볼 때는 이형식이 두 여인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고 왔다갔다 하고, 때로는 무정하게 돌아서는 그 성격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현실감 있는 나약한 지식인 캐릭터라고 여겨진다.
스토리의 비합리성에 대하여 대부분 욕을 하면서도 김동인은 <무정>이 "조선 사회에 던진 파동은 특필할 만한 것"이었으며, "조선 신문학이라 하는 대건물의 가장 긴한 주춧돌"(52)이라고 그 의미를 평가한다.
김윤식/김현 공저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0)에서는 이광수의 문학론을 매우 자세히 언급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는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너무 빨리 태어난 풍속세태 비판가(moraliste)이다. 영정조 시대에 태어났든지, 45년 이후에 태어났다면, 그는 그야말로 <최고의 최대의>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128)
책을 덮으면서 주인공 이형식은 이광수의 아바타였을 것이라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구시대의 유습이 몸에 배어 있으면서도 신문물과 신사고를 습득하려고 몸부림치면서,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 약한 인물.
거대한 신문명의 위력 앞에서 미약한 한 개인으로서는 이를 어찌할 수 없다는 은밀한 체념감, 신문명의 수원지로서 식민지 제국의 은택과 감화를 동일시함으로써, 구태에 절어 망한 조국의 운명에 대한 체념, 그것이 이미 이 소설 속에서도 짙게 어른거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소설이 비록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는 매우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