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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누설

야누스의 두 얼굴

작성자오비최이락|작성시간18.03.19|조회수1,580 목록 댓글 0

야누스 – 욕망의 두얼굴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門)의 수호신으로 그리스신화에는 없는 유일한 로마신화의 신이다. 2개의 방 사이에 있는 문은 어느 쪽에서 여느냐에 따라 앞뒤가 바뀐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에 앞뒤가 없다고 생각하여 얼굴이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미술 작품에서는 4개의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쟁이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잔혹한 얼굴로 180도 다른 이미지가 드러나는 신이다. 영어에서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 (January)는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라틴어 야누아리우스 (Januari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야누스는 집이나 도시의 출입구 등 주로 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는데, 문은 시작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고 문의 방향이 두 개이므로 얼굴도 양면을 바라보는 신으로 묘사된다.

January는 지난 해와 새해를 드나드는 문인 셈이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야누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도 많이 쓰인다. 끝과 시작, 성공과 실패, 과거와 미래 등의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문학에서는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뜻하는 단어로까지 확장됐다. 특히 시작과 출발의 신이 되면서 로마인들은 ‘시작이 좋으면 1년이 좋으리라’는 생각에 야누스를 1월의 달력에 모시게 된 것이다.

야누스라는 사람이 이탈리아 라티움이라는 곳을 다스릴 때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많은 기술을 가르치고, 야만적 생활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래서 큰 존경을 받았고 죽은 뒤에는 신으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도 로마를 지켰다. 사비니족의 침공으로 로마가 위기에 빠졌을 때, 뜨거운 온천수를 분출시켜 적들을 물리쳤다.

이 기적을 기려 로마인들은 야누스 신전에 문을 세우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즉 문을 열면 전쟁을 치러야 하니 신께서 나와 도와 주시라는 뜻이고, 문을 닫으면 평화로우니 쉬시라는 의미였다. 여기에서 ‘열린 문’은 전쟁을, ‘닫힌 문’은 평화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울 때부터 숭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모든 종교의식에서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제물을 받았다. 로마 중심부에 있던 신전의 문은 평화로울 때는 닫혀 있고 전쟁중에는 열려 있었는데, 누마와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릴 때에는 단 한 번만 닫혀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에게 여자들을 빼앗긴 사비니인들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 야누스가 뜨거운 샘물을 뿜어 이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두 얼굴을 지닌 모습에 빗대어 이중적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토성의 여섯번째 위성의 명칭으로도 쓰인다.

로마 신화속 야누스는 배의 사용법도 고안하고, 화폐를 널리 통용시킨 능력 있는 통치자였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겐 한없이 자애로웠지만 침입자에겐 가혹할 만큼 엄하고 무서웠다. 한쪽만의 얼굴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지탱할 수 없다. 부드러움도 있어야 하고 강인함도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전혀 상반되게 그려질 때 우리들은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라는 표현을 일상에서 사용을 하기도 한다. 원래의 이미지는 중립적인 모습이었는데 야누스의 얼굴은 마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에게 주로 쓰이며 어떤 작가가 문학에서 '야누스의 두 얼굴'을 위선의 상징(?)으로 표현되면서 그때부터 야누스는 이중성의 상징이 되었다.

' 야누스의 두얼굴 ' 이라는 말과 같이 이중적. 위선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 야누스'란 원래 시작과 변화를 담당하는 로마의 토속신 이었다. 로마 동전에 새겨진 야누스의 얼굴을 보면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야누스의 본질은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운명이 있다고 믿고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야누스가 두 얼굴을 가진 까닭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중립적 의미였던 야누스가 부정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된 것은 변화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의 심연속에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시대에 불평등의 간극은 더욱 심화되고 있고 기존의 낡은 사유방식이 무너지고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인식이 그것을 대체하고 있는 시대 상황속에서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방황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사회가 되는 오늘날, 강자에서 약자, 노동에서 소비의 급격한 변화에 적합한 새로운 윤리는 제대로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권한의 목청은 높아지지만 책임의 윤리의식은 없다. 허약한 윤리, 무력한 주체, 집단화되고 방황하는 객체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표상이다.

‘논어, 양화陽貨’ 편에 공자께서 이런 말을 한 게 나온다.

‘ 色厲而內荏 색려이내임, 譬諸小人 비제소임, 其猶穿窬之盜也與 기유천유지도야여, 惡紫之奪朱也 오자지탈주야, 惡利口之覆邦家者 오리구지복방가자 ‘

‘ 얼굴빛이 위엄이 있으면서 마음이 유약한 것을 소인에 비유하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말쌈만 니근이들이 말잘하는 입으로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행위, 이 둘다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의 행위로서 마땅히 미워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 말은 안색을 꾸미고 위선과 가식으로 타자의 허점을 발견하여 훔치 듯 위엄을 세우는 자와 인의와 대도, 정의를 올바르게 세우지 않고 비속하면서 천하고 속된 대중의 틈새에 끼어서 인기와 평판을 얻어가는 꾸며진 좋은 인간이란 것들이 사실은 진정한 덕을 헤치는 도둑과 같은 자들이란 것이다.

편당과 편향의 교묘한 논리로 정의를 흐리는 사람들이 있다. 야누스의 두얼굴로 우중에 영합하고 비루한 속평에 만족하는 사람치고 얼치기 아닌 자가 없다. 진정한 이상과 포부가 올바르게 정립하는 사람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인의와 대도를 향해 정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의 딜레마들 속에서 ‘피로사회와 타자의 추방’의 작가인 한병철의 말을 인용해 본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삶의 형식이다. 그것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며 어떤 폭력과 배제의 형태를 띠지 않으면서 구속성과 연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시스템이 일으킨 손상만을 손보는 치유의 형식으로의 비교秘敎를 넘어서 영성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어야 하며, 셰어링sharing을 넘어서 진정한 증여와 공유가 가능한 삶의 형식이어야 한다.”

지젝의 어떤 글에 대한 반론의 목적으로 쓰여진, 워낙 짧은 글에서의 선문답 같은 말이라 한병철의 처방전은 원론적으로 함축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야누스의 세계를 살아감에 있어 공존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말이다.

지금 우리도 옛 로마인들과 같은 소원이 있다. 일본의 약탈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기적처럼 일구어낸 경제적 풍요와 민주주의를 굳게 지키길 원한다. 전쟁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야누스의 문'을 굳게 닫고 누릴 평화를 희망하며 야누스의 지혜를 찾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일구어낸 오늘날의 윤택함을 지속 가능하게 하려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온갖 문제, 예컨대 환경오염과 한반도 비핵화, 정치·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제거할 지혜와도 통한다. 그 지혜는 가식과 위선, 이율배반과 자기기만의 정의를 교묘히 감추는 일그러진 야누스의 얼굴이 아니라, 진짜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명사적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들만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깨끗하다는 내로남불의 선민의식, 표리부동하고 비루한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이중성과 꼴통적 사고에서 발현되는 뒤퉁의 한수에 쪄들어 있는 이분법적 궤변과 꼼수, 불통의 이기주의와 도식주의 음모론, 각본과 각본의 맞부딪히는 정치공학의 세계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면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치창출의 비젼은 공허한 목탁소리이며 궤변과 꼼수가 부딪치는 무당춤판에 국민들은 야누스 가면무대의 관객으로 전락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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