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라고 알려져 있는 여치
여치 呂雉 악녀인가 ?
우희가 “중국 4대 미인”이라면
한고조 유방의 정비였던 여치(呂雉)는 측천무후, 서태후와 더불어 “중국 3대 악녀”로 꼽힌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3대 악녀”는
곧 “3대 여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치는 산양의 단보, 오늘날 산둥성의 단현에 해당하는 곳에서 지방 호족인 여씨 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후(娥姁)라는 별명 또는 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아후를 유난히 예뻐하여 반드시 제일 가는 신랑을 얻어주겠다고 별렀는데,
아버지 여공이 패현에 들렀을 때 그의 눈에 들고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가지고 한 번 뵙기를 청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액수인 일만 전을 내겠다고
한 사람을 만나 보니 일만은커녕 일전도 내기 힘든 백수건달인 유방이었다.
그러나 관상에 일가견이 있던 여공은 한눈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았고,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치를 그의 부인으로, 또한 여치의 동생은 유방의 친구이자 개백정으로 살아가던 번쾌의 부인으로 주었다고 한다.
유방은 여치와 혼인하기 전에 얻었던 여자에게서 비(肥)라는 아들을 얻어 키우고 있었고,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던 유방의 입장상
갓 시집온 여치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황소처럼 밤낮으로 일해야 했다. 여기에 의붓아들까지 길러야 하고, 그녀 스스로 한 아들(盈)과 딸을 낳아 길렀으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방은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듯 매일 술타령에 계집질을 일삼으며 한참이나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이 결국 반군의 우두머리가 되더니 관중에 입성하고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한왕의 자리에 이르자, 자연히 왕비가 된 그녀도 이제는
오랜 고생의 보답을 받는가 싶었다.
하지만 초-한 전쟁은 그녀에게 또다른 아픔을 안겨주었다. BC 205년에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해 달아나자, 성에 머물러 있던 그녀는 식구들과 함께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그녀는 그로부터 2년여를 포로의 몸이 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초한지]에 따르면 항우는 한 번은 그녀를 성벽 위로 끌어내서 유방에게 “이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항복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방은 천연덕스레 “그러든지 말든지”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녀의 마음에 대못이 박혔으리라.
또한 항우를 쓰러트리고 황제가 된 다음에도
유방은 그녀에게 정식 황후라는 지위는 주었으되 남편으로서의 사랑은 주지 않았고,
척희를 비롯한 여러 후궁들과만 좋아 지냈으므로 그녀의 마음은 갈수록 모질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왕조의 수도였던 장안.
여후 집권기에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여자로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로서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유방의 “공신 죽이기” 계획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다.
죄를 짓고 유배 중이던 팽월을 유인해서 유방에게 데려가서는 죽이게 한 것도 그녀고,
초-한 전쟁 최대의 공로자였던 한신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체포해 죽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한신의 경우 유방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그 일족을 몰살해 버렸고, 팽월은 살을 저며 젓갈로 만들고는 그것을 여러 제후들에게 돌려 본보기를 보이도록 했다.
한으로 얼어붙은 여자의 마음은 한껏 잔혹해져 있었다. 유방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공신 죽이기를 그녀가 앞장서서 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고,
“쓸모가 있는 이상 내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하여 그녀를 폐하고 척희를 대신 황후로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은 일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쇠해져 가던 유방이 죽는다면 그 다음은?
여후(呂后)의 아들 유영이 적장자로서 태자에 봉해져 있었으나,
유방은 척희의 아들 여의(如意)를 아끼는 것이 누가 봐도 분명했다. 애가 탄 여후는 염치 불고하고 장량을 찾아가 그의 지혜를 빌려달라고 애걸했다.
난처해 하던 장량이 결국
“폐하께서 부르셨지만 오지 않던 ‘상산사호’라는 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초빙하여 태자님의 사부로 삼는다면 폐하께서도 태자를 존중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라고 하자 그대로 실천하여
태자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BC 195년에 한고조 유방이 죽자,
이제는 여후의 세상이었다.
사마천은 이때부터 여후가 죽는 BC 180년까지를 [여후본기]로 서술하여, 이 시대 천하의 진정한 지배자는 여후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녀는 곧바로 유영을 즉위시키고(한혜제),
척희를 유폐하며, 조왕에 봉해져 있던 여의를
소환해 독살했다.
아들의 죽음을 알고 몸부림치는 척희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지져버리고, 독약으로 말도 못하게 한 채 변소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사람돼지(人彘) 구경이나 해 보시라”
며 아들 혜제를 불러왔다. 중국에서는 돼지를 변소에 두고 길렀기 때문에 척희의 몰골을 돼지에 빗댄 것이었다. 혜제는 이를 보고 넋이 나가서 말했다.
“이건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소자는 당신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년 남짓 정무를 폐하고 술만 마시다가 죽어버렸다.
장례식에서 여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속내를 내다본 진평은 여씨 일족을 왕후에 봉해 여씨의 집권을 든든히 하라고 건의했다.
득의양양한 여후는 여태, 여록, 여산 등을 각각 왕으로 봉하며 다른 일족들도 요직에 앉혔다. “백마의 맹세”를 통해 “유씨 외의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던 유방의 원칙을 보기 좋게 깨트린 것이다.
좌승상에는 예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정부라는
소문도 있던 심이기를 앉혔다.
여후는 혜제의 아들 공(恭)을 황제로 세웠으나
(한소제), 그녀의 어머니 또한 여후에게 살해되었다 하여 원망한다는 말을 듣고는 3년 만에 폐위, 살해했다.
그 밖에도 조왕 유우, 양왕 유회, 연왕 유건 등을 죽음으로 몰았으며 이들을 대신해서 여씨 일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또한 유씨 왕족들을 여씨 일족의 여자들과 강제 혼인시켜, 그녀들을 통해 유씨들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그녀의 생전 마지막 명령이 여통을 연왕에 봉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여씨 천하를 만들려는 그녀의 집념은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BC 180년이 되자
아마도 60이 넘었을 그녀는 급속히 쇠약해졌으며(전설에 따르면 조왕 유여의가 변한 푸른 개에게 물린 뒤 죽을 병이 들었다고 한다),
이 틈을 노려 진평과 주발이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그녀가 죽자 주발은 북군 진영으로 뛰어가서 “여씨를 따를 사람은 오른쪽 어깨를, 유씨를 따를 사람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외쳤으며,
이에 모든 병사가 왼쪽 어깨를 드러낸 채
무기를 잡으니 여씨 일족은 허망하게 일망타진되고, 대왕 유항이 황제로 옹립되었다(한문제).
유방은 죽음의 자리에서 여후에게
“유씨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주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사실이라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사람돼지”를 비롯한 여러 잔혹한 행동,
그리고 “감히” 여자가 남편의 왕업을 빼앗고 남자들 위에 군림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대표적인 악녀로 기록했다.
그러나 그녀가 엘리자베스 바토리 같은 그야말로 악녀라 불릴 만한 여성 권력자들과 달랐던 점은,
당대에 피해를 본 사람은 일부 권력층에 한정되고 대부분의 백성은 오랜 전란 끝의 평화를 누리며 번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보통 암살이나 감시 등에 의존함으로써, 걸핏하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던 남성 권력자들과는 달리 백성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았다.
북쪽의 최대 위협이었던 흉노도,
묵특선우가 여후에게 오만불손한 편지를 보냈음에도 분노를 삭이고 평화공존을 도모함에 따라 그녀의 집권기에는 전쟁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그녀야말로
“지친 백성을 쉬게 한다”는 한고조의 정책을 올바로 계승하여, 이후 한문제, 한경제 시대에 한왕조가 전성기에 이를 수 있도록 한 유능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자로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녀가 왜 그토록 “여씨 천하”를 만들기에 전념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자신의 권력을 든든하게 만든다는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생애 마지막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여씨 왕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모습이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여자의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내로서 외면받고 여자로서 모욕받은 그녀가,
남편이 세운 제국의 틀은 그대로 가져가되 그 상층부에서 남편의 혈족은 남김없이 배제함으로써,
남편의 성씨를 중국 땅에서 아예 말려버림으로써, 오뉴월의 된서리 이상의 한풀이를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