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천기누설

친일파 박영효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02.25|조회수1,923 목록 댓글 0

친일의 거두 박영효(1861~1939)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이후 쿠데타 주모자 5명 중 홍영식은 맞아 죽었고, 김옥균은 상해로 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의학공부를 했으며, 박영효(朴泳孝)는 친일파의 거물로 변신했다.박영효(朴泳孝)는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 후작의 작위를 받고 다음 해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1926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출세길이었다.

김옥균과 함께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그는 짧지 않은 인생의 부침(浮沈)을 통해 인간의 권력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욕적이고 패기에 찬 애국 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한 박영효!

개화사상에 매료되었던 왕실의 사위가 친일파의 거두(巨頭)로 자리잡게 된 씁쓸한 과정을 살펴보자.박영효(朴泳孝)는 조선 후기 누대에 걸쳐 명문가로 노론의 핵심계열이었던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으로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의 스승이 된 박규수(朴珪壽)를 비롯하여 개화의 뜻을 품었던 박정양(朴定陽) 등이 있다.

박영효(朴泳孝)는 1872년 12살 나이에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남편이 되었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간이었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된 박영효(朴泳孝)의 행운은 석달을 가지 못했다.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요절하여 박영효는 12살의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남자의 축첩에 대해 엄격하지 않은 조선 사회였지만 부마(駙馬)의 재혼에 대해서는 까다로왔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박영효(朴泳孝)는 12살의 나이에 영혜옹주(永惠翁主)와의 결혼으로 평생 정식 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고, 첩실만 거느릴 수 있어서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庶出)이 되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박영효를 측은하게 여긴 왕실과 고종(高宗)은 그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19세인 1879년에는 혜민서제조,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부마(駙馬)가 되어 얻은 일그러진 가정생활과 승승장구하는 관직 생활 속에서 박영효(朴泳孝)는 당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을 기르게 되었다.

박영효(朴泳孝)는 김옥균 등과 함께 유대치, 오경석 등에게서 선진 사상을 배우면서 급진개화파를 형성했다.
당시 개화파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모델로 하는 친청 경향의 김윤식, 어윤중 등이 이끄는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는 친일 경향의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이끄는 급진개화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진압되고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은 후 박영효는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때 김옥균도 동행했다.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으로 가면서 고종의 명으로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기를 제작하였고, 이때 만든 국기가 태극기의 바탕이 되었다.

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의 근대화 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애벌레로 있다가 나비로 변신하면서 드넓은 세계를 처음 접한 것과 같은 엄청난 발전상을 보고 그냥 한방에 뿅 가버린 것이었다.
그는 개국 후 단시간에 재무, 산업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일본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일본 근대 유명인사와 접촉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 근대화의 핵심인물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도 있었다.
이외에도 박영효(朴泳孝)는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 국제정세 등을 파악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은 개화(開化)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었다.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돌아온 박영효(朴泳孝)는 한성부 판윤이 되어 치도(도로정비), 경순(치안관련), 박문(출판 관련)의 3국을 설치했으나, 보수파들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광주부 유수겸 수어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신식군대를 신설하여 훈련을 시작했지만, 이마저 보수세력들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되기도 했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 박영효(朴泳孝)의 꿈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뜻이 보수세력에 의해 번번이 꺾이는 시련을 감당할 수 없었던 박영효(朴泳孝)는 한방에 보수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정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결국 친청파인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을 몰아내기 위해 박영효는 김옥균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가자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으로 망명해 이름도 야마자키로 개명하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자 박영효는 10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외교관계를 통해 저지하려 하였고, 그 활로(活路)로 손을 잡은 것이 러시아였다. 조선 정부내의 일본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박영효(朴泳孝)는 김홍집(金弘集)을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대신 서리가 되어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1895년 박영효(朴泳孝)는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각 방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명성황후의 암살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신응희, 우범선, 이규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조선이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자 박영효(朴泳孝)는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박제순(朴薺純)이 다리를 놓아주어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는 한일병합(강제병탄조약)이 이루어지자 박영효(朴泳孝)는 그야말로 친일파로의 완전한 변절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일병합(韓日倂合)의 논공행상으로 그는 후작(侯爵)의 작위와 매국공채 28만원을 받았다. 후작(侯爵)은 작위 중 공작 다음으로 높은 품계였고 상금도 아주 많은액수였는데, 당시 50만원 이상의 재산을 가졌으면 갑부에 속했으니, 28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겠다.일제로서는 개화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朴泳孝)가 가지는 상징성이 조선을 통치하는데 꽤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여러 친일단체의 회장을 맡은 박영효(朴泳孝)는 유민회, 동광회, 조선구락부, 민우회 등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20년에는 창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조선사 편수회 고문을 지냈으며, 1926년에는 이완용(李完用) 의 뒤를 이어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1939년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