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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산화, 그 이후 1】
1975년 4월 30일 오후부터 사이공 시내에는 북베트남군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겁에 질린 채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창문을 통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북베트남군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일부 동조 시민들과 지하활동 요원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북베트남군 병사들도 어리둥절하였다. 미제의 압제하에 있었던 남반부를 해방시켰는데 환영하는 열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시민들의 눈초리는 경계의 빛이 역력하고 차가왔다.
남베트남의 항복방송이 나오자 사이공과는 대조적으로 하노이에서는 열광이었다.
수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환성을 지르고 노래 부르며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울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사이공 전선 사령부에서는 5월 1일 승리를 자축하고 노동절을 기념하는 경축연이 벌어졌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위 반동분자들의 처치와 사회체제를 공산사회로 전환시키는 부의 재분배, 국유화, 집단화였다.
모든 반동분자들에 대하여는 일정기간 재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죄과를 씻게 하고 새로운 공산사회 건설에 참여시킨다는 지령이 내려졌다.
대상자별 교육기간과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 교육기간 및 대상자
• 3일 : 병사와 하급공무원
• 10일 : 하급 장교, 정부기관, 정당의 중견 간부
• 30일 : 고급 장교, 경찰 간부, 정부 고관, 각 정당 지도자
○ 교육 내용
• 각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
• 미국 측이 저지른 범죄
• 공산 혁명 영웅의 전기 학습
• 혁명 정부의 시책
• 노동의 존엄성 인식
재교육 장소는 각 지역 별로 전에 베트콩들이 기지로 이용했던 지역이었다. 사이공 지역의 재교육 수용소는 타이닌(Tay Ninh) 省으로 지난 날 자기네들의 본거지였다.
재교육 해당 인원은 각자 식량을 지참하고 신고하도록 하였고 재교육 인원은 전투 간에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 후 즉각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약 30여 만명으로 집계되었다.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고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재교육의 실상은 정말 가혹한 것이었다.
• 주거시설은 전에 자기들이 사용하던 움막같은 곳에 50여명 단위로 집어넣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 1일 식량은 1인당 200그램 정도이고 국은 소금 국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영양부족에 의한 각기병 같은 것이 만연하였다.
• 피복은 6개월 만에 검은 파자마 1벌이 지급되었고 물은 일주일에 한 초롱 정도가 보급되었다.
• 엄격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행하여 졌고 태도가 불손하거나 비타협적인 인사를 고문하고 현장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 2개월에 한번씩 가족과 간단한 편지를 교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편지의 형식과 내용은 사전에 규정되어 그대로 쓰지 않으면 보내지도 않았다.
• 작업은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위험한 일을 시켰다. 변소 치우는 작업은 벌로 행해졌고 각 지역에 수없이 매설된 지뢰 제거작업은 주로 이들을 이용하였다. 지뢰 제거요령에 대한 교육이나 제거장비도 지급하지 않고 그대로 작업을 강행시켜 희생자가 많았다. 노동의 신성함을 인식시키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 사이공 근처의 경찰관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로 거동이 불가능한 자들을 생매장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자체조사에서 밝혀졌다.
• 재교육 시작 1년이 되는 1976년 6월에 북베트남이 비공식적으로 인정한 바에 따르면 재교육 수용소에 남아 있는 약 20여 만명을 12개 부류로 성분을 분류하여 재재교육 단계로 들어갔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시켜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 그 인원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 출신의 경우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인원이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정신개조수용소에 관한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g5AFMNHnThQ&sns=em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 탈출을 시도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 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 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베트남 난민이다.
다음은 사회체제의 전환이었다.
1975년 6월부터 전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4개월 후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1인당 균등하게 미화 40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바꾸도록 하였다.
도시 인구를 그들이 통제 가능한 범위로 줄이기 위하여 1차로 사이공의 20여 만명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50만 명을 그들의 신 경제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들은 1980년까지 총 500만 명을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노동자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각 직장, 공장들은 상위 직위자와 하위 직위자들이 서로 교체하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모든 신문이 사라지고 내용이 비슷한 2개의 당 기관지만 발간되었다. 모든 서적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금서 목록이 작성되었다.
서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소장한 모든 서적들도 몰수되어 역사, 종교 서적을 불문하고 소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