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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누설

양녕대군의 기행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05.20|조회수202 목록 댓글 0

천하의 태종도 풀지 못한 숙제 -골칫덩이 양녕대군

양녕에 관한 이야기중, 동생 충녕이 자신보다 뛰어난 왕재임을 알아본 양녕이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거짓 미친척을 하고 기행을 일삼았다는 스토리가 있으나 이것은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야사에는 세자인 양녕이 빗나가기 시작한 이유를
아버지가 형제들을 죽인 사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충녕의 비범함을 보고 태종에게 일부러 밉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진짜 양녕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1404년 태종은 열 한살된 큰 아들인 양녕대군 '이제'를 세자로 책봉했으나 그는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고 부친인 왕을 공경하지도 않았다.

양녕대군은 머리는 잘 돌아갔으나 공부를 엄청 싫어했으며, 사냥과 여색을 좋아하고 술을 사랑하는 한량에 가까웠다.그는 광대들과 소인배들, 기생들을 몰래 데려다 밤새 궁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것이 일이어서 궁궐에 난 작은 개구멍이 반질반질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녕에 대한 일화중에 스승이 처음 오는날, 양녕이 개 짖는 시늉을 하고 동궁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이에만 열중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양녕은 애시당초 공부와는 담을 쌓았었다

세자인 양녕은 청년이 되어가면서 태종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양녕이 일으킨 대부분의 문제는 여자 문제였다. 큰 아버지 정종의 여자였던 기생 초궁장과도 놀아나 당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양녕이 결정적으로 태종의 미움을 산 것은 조정 관원의 첩을 빼앗아 데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태종 17년 양녕이 중추부 곽선의 첩 '어리'라는 계집을 강간한 뒤 궁중에 불러들인 사건이 일어났다

'어리'는 기생이 아니라 엄연히 사대부의 첩이었으므로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어리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자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하니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물의를 일으키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어리를 소개한 자부터 관련자 여러 명을 죽이고 귀양을 보냈으나 자색이 뛰어났던 어리에 대한 양녕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어리사건으로 며칠간 연금을 당했다가 풀려난 양녕은 아버지 태종에게 수서를 올려서 항의를 했다
아버지는 여자를 지천으로 데리고 살면서 자신의 몇 안되는 첩을 왜 내쫓느냐는 것이었다. 엎드려 반성을 해야 할 처지에 태종에게 기어오른 것이었다.

태종은 양녕의 수서를 보고 격노했다. 결국 '어리'의 일로 양녕대군은 태종과 신하의 미움을 사서 25세에 폐세자가 되었으나, 양녕은 폐세자가 된 이후에도 계속 어리를 데리고 살았다.양녕은 폐세자가 된 후에도 계속 비행을 저질러 세종의 속을 썩였으나
동생 세종은 그런 형을 이해하여 양녕이 아무 불편없이 생애를 보낼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양녕은 명이 길어 세종의 죽음과 문종, 단종의 죽음까지 지켜보고 세조8년 1462년 6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세종이 즉위한후 태종의 둘째 아들 효녕대군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91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태종은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고 싶은 뜻이 확고했던 왕인데, 아무리 첫째가 망나니 짓을 했어도
셋째를 왕위에 올린 그 배후에는 "봐라! 결국 똑똑한 놈이 왕이 된다." 즉 5남임에도 왕이 되었던 태종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도는 없었을까?

적장자가 왕이 되기 어려웠던 조선 왕조
조선에서 장남은 왕이 되기 힘들었다.
조선 27대 왕 중 맏아들로 왕이 된 인물은 일곱이 전부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뿐이다.

이들 중 장수한 인물은 숙종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조리 요절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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