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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과 명상

장자 이야기(펌글)

작성자온쇳대|작성시간15.11.21|조회수34 목록 댓글 0

『장자』와 장자 _ 비워야 가벼워진다.

“어느 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장자(莊子)』 하면 떠오르는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장주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닌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러다 잠에서 깬다. 그런데 또 모르겠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아, 삶이란 일장춘몽이구나. 맨 처음 나는 이 구절을 그렇게 읽었다. 한데 나이가 들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장자는 왜 하필 나비 꿈을 꾼 것일까? 유유자적 마음 가는 대로 날아다니는 나비라니! 그러고 보니 『장자』를 펼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소요유(逍遙遊)가 바로 자유롭게 노닌다는 뜻 아닌가.

『장자』는 노자의 『도덕경』과 함께 노장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책이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 면에서 두 책은 대조적이다. 『도덕경』은 처음부터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며 딱딱하고 근엄한 선언으로 시작하는 반면 『장자』는 수미일관 기발하고 통렬하고 재미있고 상징적인 우화와 비유들로 넘쳐난다. 빈 배(虛舟) 이야기를 보자.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떠내려오다가 부딪쳤다. 사공은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그 배가 빈 것을 알고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떠내려온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나라고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까닭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하겠는가?”

그렇다. 비우면 가벼워진다. 인생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비워야 할 것은 재물 욕심과 권력욕 같은 탐욕뿐 아니라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도 해당된다.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리던 날 자상(子桑)은 먹을 것을 갖고 찾아온 친구 자여(子輿)에게 힘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이 어찌 내가 이토록 가난하길 바랐겠는가? 하늘은 사심 없이 모두를 다 같이 덮어주고, 땅은 사심 없이 모두를 다 같이 떠받아 주고 있으니 어찌 하늘과 땅이 사사롭게 나만을 가난하게 하였겠는가? 도대체 누구일까 알아보는데 알 길이 없네. 그런데도 내가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니, 운명일 따름이겠지.”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모르파티(네 운명을 사랑하라)”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그저 숙명으로 알고 손을 놓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되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어리석게 무엇을 탓하며 마음 상하지 말고 한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장자』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운명론이 아니라 안명론(安命論)이다.

『장자』에는 죽음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장자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싶다고 하자 오히려 묻는다. “내게는 하늘과 땅이 안팎 널이요, 해와 달이 한 쌍 옥이요, 별과 별자리가 둥근 구슬이다. 내 장례를 위해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거늘 무엇을 더한다는 말인가?” 그래도 제자들이 고집하자 일갈한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려 하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걸 깨닫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간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는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작은 재주를 뽐내다 명을 재촉하기도 한다. “오나라 왕이 원숭이 산에 올라갔다. 많은 원숭이가 무서워하며 달아났지만 한 원숭이는 까불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재주를 자랑했다. 왕이 활을 쏘았더니 그 원숭이는 재빠르게 화살을 잡았다. 왕이 시종들에게 서둘러 활을 쏘아 보라고 했다. 원숭이는 한 손에 화살을 쥔 채 죽었다.”

마지막으로 득어망전 득토망제(得魚忘筌 得兎忘蹄)의 출전을 보자.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니, 물고기를 잡은 뒤에 통발은 잊어야 한다. 덫은 토끼를 잡는 수단이니, 토끼를 잡은 뒤에 덫은 버리는 게 마땅하다.” 『장자』의 가르침은 이론이 아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쳐다봐서는 안 된다. 이제 말은 잊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장자』의 진짜 매력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호접몽 이야기의 끝 부분이 그랬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터,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어,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문득 눈이 뜨였다. 내 옆에 누워 있는 아들이 나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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