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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과 명상

보살주문

작성자오비최이락|작성시간18.05.11|조회수27 목록 댓글 0

제일 좋은 도경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옛날 한 스님이 길을 떠나 산을 넘게 되었는데 산중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게 되었다.

스님은 산길에서 멀지 않는 곳에 오막살이 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밖에서 보니 집안에는 불이 켜져 있고 사람의 소리도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등은 없고 늙으신 할아버지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인제 고공(高功)선생을 만났구나 하면서 “선생께서는 어떤 공을 익히고 계십니까?”

할아버지께서는 “나는 아무 공도 연습하지 않네 다만 보살주문(萻薩呪文)을 읽을 뿐이네” 하였으며 스님은 기뻐서 마음속으로 ‘집을 떠난지 40년이 족히 되도록 보살축문을 못들어 보았는데 오늘 어찌 이 좋은 기회를 놓치랴.’ 하고 서둘러 절을 하고 마음속으로 가르침을 바랐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60년을 이 축문을 읽었지만 당신이 성심껏 말하니 알려드리지. 사실은 6개 글자이다.”스님이 들으니 너무 기뻐서 또 큰절 세 번을 올렸다. 스님이 이쪽에서 절을 하고 끝나지도 않았는데 노인은 여섯개 자를 다 읽고 말한다.

스님이 들어보니 원래 그 자는 마(嘛), 니(呢), 팔(叭), 미(咪)여서, 히죽 웃고 노인에게 여쭈었다.“노인께서는 읽은 것은 보살주문이 아니라 여섯자의 대음주문이라고 최후의 한 개 자는 소우(牛)가 아닙니다. 잘못 읽었습니다.” 하니 노인은 스님에게 감사하면서 내가 60년동안 (牛)자를 잘못 읽은 것을 몰랐는데 오늘 다행히 어린 선생을 만났으니 감사합니다.

이튿날 중은 가고 노인은 스님이 가르친대로 우(牛)로 읽지 않았는데 어쩐지 잘 읽어지지 않았다. 석달 후 스님이 노인을 뵙게 되었는데 마음속으로 ‘노인장께서 공부(功夫)가 꼭 더 높아졌으리라’ 여겼는데 생각밖으로 집앞에 이르니 집안에는 빛도 사람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노인이 읽는 대신주문(大神呪文)소리밖에 없으며 최후의 명(明)은 좀처럼 잘 읽지 못하였다.

스님은 마음속으로 의혹이 갔는데 왜 우(牛)로 읽으면 몸에 빛이 나고 달리 읽으면 빛이 없는가? 말해보라 무엇때문인가?

스님은 의혹을 품고 방장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방장이 말하기를 “당신이 집을 떠난지 40년이 되는데 아직 그 도리를 모르는가?

축문을 읽는 것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고 마음이 온정되면 신체의 삼미(三味)가 불로 되면 빛이 나느니라. 노인은 자기의 법대로 60년을 읽었으므로 읽을 때마다 마음이 드놀지 않았으니 삼미(三味)가 불로 변해 빛을 냈느니라 그런데 당신이 달리 읽으라니 마음이 흩어지고 삼미가 의화(意火)로 되지 않으니 어찌 빛이 나겠는가?”

누가 밝혀보라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서 방장께서는 축문의 의의를 말했는데 관건은 마음의 안정이다.

그가 소(牛)로 읽든 말(馬)로 읽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축문의 효응(效應)을 말하는데 그 무슨 신의 작용도 아니다. 우리가 알건대 익지공을 배운 사람도 좋고 이부공을 배운 사람도 좋고 염력팔절(念力八絶)을 아는 사람도 좋고 그 도리를 잘 알아야 한다.

더욱 잘 알 것은 이 옛말이 아래의 몇 가지 도리를 말한다.

세상엔 본래 법이란 없다.

법은 정한 법이 없으며 도법은 자연스럽다.

불시에 깨달으면 법이 시작되며 모두 「육자대신주」란 글자를 알았는데 원래 소(牛)자는 없었다. 즉 ‘우’자를 누구든 만들어 넣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늙은 할아버지는 그 무슨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란 것도 몰랐으며 그저 보살주문이란 없고 다만‘우(牛)’만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진심으로 60년을 읽었는데 그의 차원은 높아졌다.

그럼 이 우자로 편집한 보살주문이 원래 있었는가? 없었다. 이로 보건대 세상에는 본래 법이란 것이 없으며 동시에 보살주문의 원래 주문보다 이 할아버지한테 와서 틀리게 ‘우’자로 된 축을 읽은 것이 공의 효과가 특별히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법은 정한 법이 없다는 것이다. 늙은 스님은 그 속의 오묘를 알게 찍어 말(点破) 했는데 곧 “도법은 자연스럽다”고 하고 스스로 법을 만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소림사의 세수경은 고치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스승에게 와서 몇마디 말에 의하여 세수법으로 되었는데 이것이 곧 불시에 깨달은 경오(傾悟)라는 것이 곧 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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