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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컨설팅

고려시대의 장례와 석관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01.21|조회수1,077 목록 댓글 0

석관 고려의 장례문화의 상징

정자나 대장경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문화를 상징하는 또 한나의 문화제가 석관이다. 석관은 1916년 개성시 개풍군에서 위치한 고려 문신 송자청이 (~1198년)의 분묘에서 처음 출도 되었다.

크기는 길이 90cm너비 46m 높이 45cm두께 3cm정도다. 석관의 크기로 보건대 망자의 시신을 담기위해 사람의 크기보다 크게만든 오늘날의 석관의 용도와 다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약 60여점의 고려 석관도 모두 송자청에 석관과 크기가 비슷하다. 전부 개성 일대에서 출도된 고려시대 문화재다. 석관의 양식도 한결같다. 천판 (덥개)와 지판(밑 부분)구성된 두 장의 판석에다 치판과 천판을 전후좌우에서 지댕하는 네 장의 판석으로 조립되어 있다 . 이 때문에 고려 석관은 조립식 석관으로 불린다.

오랜 기간의 제례. 망자의 대한 예의.
석관은 고려 장례문화와 관련된 유물
이다. 석관과 함께 출토된 송자청의 묘지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명종 4년 (1174)서경의 반역자 조위청이 공격을 하자 공 (송자청)은 100여명 군사를 이끌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화살을 을 맞으며 싸워 격파를 했다....공은 명종25년 (1195)3품의 벼슬로 은퇴를 했고 신종1년 (11980)1년 12월 20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갔다. 영*산 서쪽에 장례를 지냈다가 얼마 뒤 다시 무덤자리를 점쳐 유골을 안장했다.>

망자가 숨진 뒤 사흘간을 전후해 빈소에서 조문을 받은 뒤에 화장 혹은 매장을 하는 요즘의 장례 형식을 "단장"이라고 한다. 반면에 앞의 기록에서는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다시 무덤자리를 정해 유골을 안장 했다고 한다. 요즘 장례와 차이가 있다.

고려 중기 문인허재(1062~1144)
묘지명을 보면 당시 장례 형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있다.

<공 (허재 )향년 83세다 올해 (1144)
봄 2월 을미일에 (14일)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월에 정주 땅 동쪽 기슭에 화장했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정1품) 벼슬을 내렸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곳에 유골을 묻고 묘지명을 짓는다.>

허재의 장례는 숨진 뒤 26일 만에 화장하고, 그 뒤 5개월 만에 유골을 다시 매장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망 -유골- 수습과 안치-매장까지 약 6개월이 걸린 셈이다. 이런 고려의 장례를 '복장"이라고 한다. 여러 차례 장례를 치렀다는 뜻이다.

복장은 제 1.2.3차에 걸친 장 의식을 치른다. 사망 후 빈소를 차려 손님을 맞는 빈례에 이어 화장이나 매장을 통에 탈육 하는 과정을 거쳐 유골을 수습하는 단계가 제 1차의 장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사망 후 대체로 5일에서 29일 사이에 화장을 한다. 화장외 시신을 땅에 매장해 탈육하는 경우 약 8~20개월이 걸린다.

12세기 중반부터 불교의 영향으로 매장보다 화장이 더 보편화 되었다. 이어 유골을 수습한 뒤 사찰 등에 임시로 안치해 제사를 지내는 단계를 제 2차 장이라고 한다 .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이 4개월에서 6년 4개월까지 차이가 크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 조상의 장례를 치르면서 날을 오래 잡은것은 예로써 장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지금 사대부들은 관례적으로 삼일장을 치르는 것은 옛법에 전혀 맞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의 장례 풍습은 오랜 기간 제례를 올리는 것이 망자에 안식처이자 후손의 발복지인 길지를 택하고 분묘를 조성하며 석관과 묘지명을 및 부장품을 준비한다. 하지만 유골을 사찰에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요즈음 세상의 도가 쇠퇴해 풍속이 경박하다... 부모의 유골을 사찰에 임시로 모셔두고 수년 동안 매장하지 않는 자도 있다 관리들은 이를 조사해 죄를 줄것이며 ,만일 간난해 매장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관에서 그 비용을 지급하도록 해라.>

복장을 치르는 데 과다한 비용이 든 탓에 유골을 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국가가 경비를 지원해 장례를 마무리 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안치한 유골을 석관에 매장함으로써 장례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 된다. 이를 제 3차 장이라고 한다. 석관은 이러한 복장식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다.

송자청의 석관 크기(90×40×45CM)가 당시 표준이었던 것으로 보아, 석관은 화장으로 수습된 망자의 유골과 부장품을 담는 용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석관은 화장식 장례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장식 장례법은 통일 신라 문무왕 (재위661`~681)이 자신의 장례를 화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긴후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원래 화장은 불교와 관계없이 유럽일대에서 신석기 부터 시작되어 청동기 .철기시대까지 성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행해진 화장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삼국. 통일 신라를 거쳐 불고가 번성한 고려때 성행했다. 고려때 화장은 승려뿐만 아니라 왕족. 귀족과 민간의 일부 계층에 까지 확산 되었다.석관은 이러한 과정에서 부각된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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