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정말 고려장(高麗葬)이 있었을까?
'고려장'이란 늙고 쇠약한 부모를 구덩이 속에 산 채로 버려두었다가 버려진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지내는 풍습을 말한다.
고려장 설화 1 - 기로전설(棄老傳說)
아주 먼 옛날에 가난한 농부가 70세를 넘긴 늙은 아버지를 버리기 위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는 아버지 옆에 약간의 음식과 지고 왔던 지게를 놓아둔채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 왔던 그의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지고 오기에 그는 아들에게 왜 지게를 가지고 오는가를 물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도 나이가 차면 이 지게에 지고 와서 버려야 하기 때문에 가져왔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농부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늙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산을 내려와 어려운 살림이지만 극진히 봉양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노인을 버리는 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고려장 설화 2 - 기로전설(棄老傳說)
고려장 풍습이 있던 고구려 때 박정승은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가 눈물로 절을 올리자 노모는, "네가 돌아갈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두었다."고 말했다.
박정승은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을 생각하는 노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몰래 국법을 어기고 노모를 모셔와 봉양을 하였다.
그 무렵에 중국의 수(隋)나라 사신이 똑 같이 생긴 말 두마리를 끌고 와 어느쪽이 어미이고, 어느 쪽이 새끼인지를 알아내라는 문제를 내었다.
문제를 맞히지 못하면 조공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박정승에게 노모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말을 굶긴 다음 여물을 주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란다."
고구려가 이 문제를 풀자, 중국은 또 다시 두 번째 문제를 내었는데, 그건 네모난 나무토막의 위 아래를 가려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노모는,
"나무란 물을 밑에서부터 빨아올린다. 그러므로 물에 뜨는 쪽이 위쪽이란다."
고구려가 기어이 이 문제를 풀자, 약이 오를대로 오른 수(隋)나라 사신은 또 어려운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건 재로 새끼를 한다발 꼬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라에서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는데, 박정승의 노모가 하는 말이, "얘야, 그것도 모르느냐? 새끼 한다발을 꼬아 불에 태우면 그게 재로 꼬아 만든 새끼가 아니냐?"
수(隋)나라에서는 모두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자, "동방의 지혜있는 민족이다."라며 다시는 깔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노모의 현명함이 세 번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왕을 감동시켜, 이후 고려장(高麗葬)이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장(高麗葬)설화는 가짜인데요..
고려장(高麗葬)은 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에다 버렸다고 하는 장례풍습으로, 효(孝)를 강조하는 일부 설화에서 위와 같은 고려장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설화들은 가짜이며, 역사적 사실이 절대 아니다. 고려(高麗)라는 명칭 때문에 우리는 흔히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장례풍습으로 알고 있지만,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나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고려사(高麗史)'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하지 않거나,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법으로 엄격히 처벌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장례 풍습은 불교식 의례를 근간으로 하였으나, 국가에서 상복 착용의 기간을 오복(五服)제도로 법제화할 정도로 고려는 유교적 의례도 중시하였다.
우리 민족의 전통 장례법은 화장과 매장이 일반적이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풍장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노부모를 산에 버렸다는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노부모를 제대로 공양하지 않아도 불효죄로 매우 엄격히 처벌했던 당시의 윤리의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고려시대 이전 국가들의 장례풍습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등의 기록에서도 그러한 풍습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자료들도 없다.
역사에도 없는 고려장의 풍습은 왜 와전되었을까?
그럼 왜 이런 '고려장(高麗葬)'이라는 풍습이 우리에게 있다고 알려졌을까?
그건 바로 1882년 구한말 일본에서 발견된 책 <은자의 나라 :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의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일본에 머무르며 쓴 책이다.
이 책에서 그리피스는 한국의 고대사회에서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고려장과 산신이나 해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제(人祭)가 성행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역사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로 일본 정부의 초빙으로 도쿄제국대학의 전신인 도쿄가이세이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일본이 주체가 되어 조선에서 미신과 전제왕권을 몰아내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일본인들은 왜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
일제는 우리나라가 무덤을 만들 때 귀중품도 함께 넣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도굴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우리의 무덤을 파헤칠 때 주로 조선인 인부에게 일을 시켰는데, 조선인 인부들은 우리의 미풍양속을 해칠 수 없다고 무덤 속의 귀중품을 꺼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간악한 일제는 '고려장(高麗葬)'이란 말로 "자기 부모를 버리고 매장한 불효자들의 무덤은 파헤쳐도 죄가 되지 않으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없이 마음대로 파헤쳐라"라고 조선인부들을 세뇌시켰던 것이다.
자식 때문에 깨달음을 얻어 늙은 아버지를 잘 봉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중국 당(唐)시대 이후에 전승된 <효자전>의 원곡(原穀) 이야기와 유사하고, 늙은 노모의 지혜로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인도의 <잡보장경>의 기로국(棄老國) 설화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기로(棄老)'가 '고려(高麗)' 내지는 '고구려'로 변화하여 자리를 잡으면서 고려장(高麗葬)이라는 명칭이 나타났고, 이러한 풍습이 실재했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곧 고려장(高麗葬)이라는 명칭은 '기로장(棄老葬)'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변화한 것으로 고려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장(高麗葬)이라는 명칭은 20세기 초까지 노부모를 유기하는 장례풍습 보다는 연고를 확인할 수 없는 '고분(古墳)'을 이르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고려총, 고려산, 고려곡, 고려분이라고도 하였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일본인의 도굴사건과 관련해 '고려장 굴총'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1916년~1917년에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조사한 <고적대장>에도 고려장(高麗葬)은 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기로설화들이 각종 설화집과 동화책 등에서 소개되면서 고려장(高麗葬)이라는 풍습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19년 미와 다마키가 펴낸 <전설의 조선>과 1924년과 1926년 조선총독부와 나카무라 료헤이가 펴낸 <조선 동화집> 등에서 이 설화들이 수록되었고, 이후 1948년에 발간된 이병도(李丙燾)의 <조선사대관>, 1963년에 발표된 김기영(金崎泳)의 <고려장>이라는 영화 등을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