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전설로 기록된 4가지 명검의 실체
1.신라 황금 장식보검 (경주 계림로 보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등 흑해 문화권 지역에서 5세기 쯤 제작되어 신라로 넘어오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국적인 모양의 황금단검으로, 현재 보물 제 635호 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73년 경주 시가지 중심 미추왕릉 인근에 위치한 계림로 14호분에서 정화작업 도중 우연히 출토되었으며, 36cm 의 길이를 가졌습니다.
이 검이 정확히 누가 어디서 만든 것인지는 현재까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집트에서 발생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전파된 세공방식인 누금기법 을 사용한 대표적인 유물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금기법은, 금속공예품 등에 주로 사용되는 세공법으로 가는 금속줄이나 금알등을 늘여붙여 가공하는 방법입니다.
칼날과 칼집은 목재와 철로 제작되어 세월이 지나며 훼손이 심각해졌지만, 그 위에 황금바탕에 석류석과 마노를 붙인 장식부는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동로마의 누금 장식기법과 고대 트라키아인들 즉 오늘날의 주로 불가리아가 된 지역의 황금유물의 기법과 한반도의 소용돌이 문양이 어우러진 자태는 그 당시에도 신라가 서역(중국의 서쪽)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중인 거의 비슷한 5세기에 제작되어 모양과 형식도 유사한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출토검 , 그리고 중국 키질석굴에도 이와 유사한 검을 찬 인물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 되었습니다.
이 검이 제작된 5세기(추정) 당시에는 훈족의 아틸라제국이 성행했고 이 훈족을 중간 거점으로 신라에서 8000km 떨어진 동유럽의 금검이 신라의 왕가에게 선물로 보내졌다는 말도 있고 다양한 설이 난무하지만, 현재까지 정확히 어디서 누가 만들어 어떻게 전파 되었는지는 완벽히 정론화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 그 만큼 신라와 머나먼 이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유물이며,이 외에도 로만글라스와 신라 뿔잔같은 유물 역시 이때 교역을 통해 들어왔거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유물입니다.
2.백제 칠지도
백제왕이 왜에 하사했다고 알려진 백제시대 제작된 의례용 검으로써, 이 부분이 특히나 양국 학자들에게 많은 논란이 오가지만, 그나마 양측 학자들의 의견을 생각해서 중립적으로 서술하자면, 일단 헌상품같은 조공의 개념은 절대 아니고 단지 양국 외교적 관계를 높여주기 위한 교류용 선물 즉 서비스에 가깝다는 해석입니다.
단철로 제작되어 총 길이는 약 74.9cm 이고 마치 선인장처럼 좌우에 3개씩 칼날이 가지모양으로 뻗어있는 특이한 모양세를 가졌습니다. 이름의 칠지도 의 뜻 역시 중앙의 촉부분과 측면 가지를 포함해 7개의 가지가 있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에 현재까지도 소장하며 전해져 내려오는 상태로, 1953년에 일본 국보 고고자료 제15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본래 이보다 훨씬전에는 육차모 라는 이름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여섯 갈래 창" 이라는 뜻으로 불렸다가 1873년 이 신궁의 대궁사인
간 마사토모가 칼날에 쓰여진 문자를 발견하여 현재의 칠지도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쓰인 명문은 한반도의 금상감기법 으로 제작되었는데, 총 62개의 황금문자를 파서 세기고 그 사이에 금줄을 하나하나 박아넣은 당대로써는 뛰어난 장인의 실력이 필요한 기법입니다.
위 명문을 한글로 해석하자면,
앞면- 태O사년십O월십육일병오정양조백련구칠지도벽백병의공공후왕OOOO작
뒷면- 선세이내미유차도백제O세O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OOO세 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백제시대 특정날짜에 제작돼 왜왕에게 주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중간중간 훼손되어 해석이 불가능한 글씨들이 있어서 양국 학계에서 상당히 가설과 논란이 오가는 중인데, 위에 써진 태O사년을 중국 서진의 태시 연호 4년 으로 해석한 간 마사토모는 이게 268년경 제작되었다고 한 반면, 중국 동진 태화 4년으로 해석한 일본 학자들은 이게 369년경 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우리나라 학자들의 경우 당대 삼국기록에 중국 연호를 사용한 적이 거의 없고 이 칠지도의 목적이 목적이다보니 그럴 가능성도 더더욱 낮아서 중국 연호를 통해 주장을 하는걸 비판하고 있습니다.
위 연호를 중국으로 해석한 경우에는 한발 더 나가서 아예 중국에서 만들어 일본에 하사한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존재하는데, 연호외엔 그렇다할 증거도 없고 중국측에 관련된 기록은 커녕 금상감기법을 사용하는 칠지도 같은 양식 자체가 없어 근거없는 소리입니다.
한자 하나하나 해석이 달라져도 문장 자체가 달라지고 안 그래도 훼손이 되어 제대로 해석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양국의 주장으로 왜곡된 경우가 생겨 어찌됐건 백제에서 제작되어 왜왕에게 주었다는 대목은 사실이지만, 정확히 언제 제작되어 어떤 의도로 전해진 것 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아무튼, 약간 뜬금없는 소리지만 분류에 충실한 일부 학자들은 모양세를 볼때 이건 도가 아닌 투겁창 (모) 에 해당되기 때문에 칠지도는 잘못된 이름이라고 주장하지만,아시다시피 애초부터 칠지도가 정식명칭이고 싸움용이 아닌 단순현재의 고급 손목시계와 같은 거의 의례용 혹은 장식용인 물건이라 창이냐 칼이냐를 따지는 것 역시 그다지 의미는 없습니다.
3.태조 이성계의 전어도
여말선초 시기 태조 이성계가 사용했다고 전해진 전설의 명검으로써 총 길이는 147cm에 이르는 장검입니다.
이걸 세분화하면 도신은 92cm , 자루는 55cm , 칼집도 103cm 를 이루고 있고 칼 끝부분이 양날로 된 의사도 이기에 장검의 무게와 길이로 인해 파지하여 잘 공격하면 찌르기에서 가장 살상률이 극대화되는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이 의사도 형태는 현대에는 주로 총검에 사용됩니다.
자루에는 상어가죽을 씌우고 마구리는 용의 머리를 조각해 채색하여 붉은색 매듭끈을 달아놓아 아주 뛰어나며 한반도 도검양식의 멋을 끌어올린 거의 예술작품 수준의 검입니다.
물론, 위에 나온 검들과 동일하게 현대기준에서 봐도 멋있고 예쁘게 장식해 만든 무기들이 으레 그렇듯 실전에서 사용하기 보다는 이 역시 왕의 검이라는 권위를 상징하거나 지휘용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으며, 러시아 체르냐찌노 5 고분군 에서 출토된 발해칼 과의 형태가 유사해 학자들이 둘의 연관성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원래 왕의 검에는 항상 전설 한 두개쯤 딸려오는 경우가 많기에, 이 전어도에도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연있는 검...
이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대사가 함흥을 지날때 쯤
한 묏자리를 보고선 왕이 날 자리라고 하였다.
마침 이성계의 종이 그 말을 듣고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에게 고했는데, 이자춘은 이를들고 나옹대사에게 찾아가 재차 물었으나 나옹대사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동자승이던 무학이 이를 슬며시 알려주었고 이자춘은 즉시 그 묏자리에 가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곧 검 한자루가 나왔는데, 찬란하고 아름다운 금빛에 용두가 장식된 검의 칼자루 끝은 예사롭지 않았고, 이자춘은 크게 기뻐하면서 임금이 될 자의 칼이라며 아들 이성계에게 건내주었다.
즉 용의 기운을 가진 왕의 검이라는 뜻이고 이 뒤에 또 다른 야사가 있지만, 원래 왕의 사연이 담겨진 전설같은 것은 일반인과 차별을 두어 자신의 왕권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아주 전통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야사라 기록자체는 안되어 있습니다. 지금 전해져오는 전어도는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위해 제작한 일종의 모조품이라고 합니다.
4.사인검
호랑이의 기운을 가진 명검으로써 가장 제작을 위한 조건이 어렵고 가치가 뛰어난 검 입니다. 사인검의 뜻은 아시다시피 사는 숫자 4를 뜻하고 인은 십이지지 의인(호랑이) 을 상징하기 때문에,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즉 사인에 제작되어 호랑이기운을 받아낸다는 주술적인 의미입니다.
사인검을 제작할 때는 위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하고, 12년에 한번 오는 인해 인월에는 인일이 3일정도 포함되기에 그 시간동안 인시를 지켜 하루 두시간 총 12년에 6시간을 또 지켜야해서, 결국 막상 제작을 하면, 시간이 너무 촉박해 장인이 평생 한 자루 밖에 못 만드는 칼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60년에 한번 돌아오는 백호해에 제작한 사인검은 그 의미와 희귀성이 따따블로 뛰기 때문에 아주 존귀한 물건입니다. 그 사이에 사인검과는 별도로 인시만 빼고 인년 인월 인일을 지켜만드는 검도 있는데 이건 약간 부족한 삼인검 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인검은 천자사상에 따라 하늘의 아들인 왕에게 거역하는 즉 왕권에 대항하는 자 또 쉽게 말하면 반란군과 적을 징벌하려고 왕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들에게 병권을 이양하며 부월이라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끼를 주었는데, 부월을 받은 장수가 그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들고다니는게 바로 인검이고, 여기에 위에 설명한 4개의 인을 지켜 제작한 사인검은 인검 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인검의 칼몸체 (검신) 를 보면 위에 한쪽면에는 금상감기법 으로 수 놓은 27자의 한자가 세겨져 있고 다른 한면에는 온 하늘을 뜻하는 이십팔수의 별자리를 세겨넣어 엄청난 기술력과 장인정신으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이르러 평화가 지속되자 왕권과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고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적인 검으로 바뀌었기에,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명령으로 국가적인 사업에 따라 제작되었지만 사인검이 최초로 등장하고 가장 유명한 것은 김유신의 사인검 입니다.
사인검의 상징이 상징이다보니 그 종류나 전설이 워낙 많고 아예 사인검을 주제로한 시에 창작까지 나온터라 전설들을 보다보면 사악한 잡것들을 사인검이 혼자 날아가서 무찔렀다든지 칼을 한번 휘두르면 하늘이 베인다든지 하는 것도 많습니다. 제작과정과 형태때문에 누가봐도 의례용 검이라서, 전설에 나온 것을 빼면 실전에서는 뭔가를 베기에는 어려운 검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사에 등장하는 명검들에 대해 간단한 설화와 함께 소개 해드렸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명검들이 있지만, 실전용도로 사용되지 않고 의례/기념 혹은 장식용에 가깝게 제작된 검들은 대표적으로
위 4가지 검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