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양반에 의해 지배되고 운영되는 국가였다. 소수의 양반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는 체제이다. 양반은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고려말 지방 호족들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의 최대 목표는 입신양명(立身揚名) 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것인데 그 방법이 관직에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시험에 그렇게 메달리게 된다.
조선초기에는 관직과 양반의 수가 어느정도 균형이 되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직의 수는 변함이 없는데 양반의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된다. 밥그릇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관직에 오르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된다. 급기야는 조선후기에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관직이 없어 품계만 주어지고 집에서 관직이 날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겨난다. 이것은 조정에 관직의 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아서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훈구파를 몰아내고 사림들이 권력을 쥐고 난 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 역시 권력을 위해 무리를 지은 것이다. 붕당정치의 시초이다. 동서인으로 나뉘는 이유야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권력(관직, 벼슬)을 얻기위해서는 혼자의 힘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무리를 지어 한 목소리를 내면 더욱 쉬워진다는 쉬운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세력이 나누고 형성하는 것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두고 논쟁을 펼치는 경우도 있었고, 왕실 상례의 기간이나 왕의상복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명분과 이념은 자가발전에 의하여 생성되고 꾸며졌지만 어쨌든 본질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물론 붕당의 정치가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생성의 본질은 부정할 수 없는 밥그릇 싸움이다.
우리가 역사물, 즉 사극을 보다보면 왕과 신하의 소통의 정치학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 지 보게된다. 잠시 사극을 통해서 근정전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의 소통의 정치학을 들여다 보자.
소통 1. 王이 "과인이 부덕한 소치로다"라고 하는 건, "내 주위엔 어째 너희 같은 놈들만 있냐?"라는 자조의 뜻이다. 이에 신하들이 입을 모아 "황공무지로소이다"라 대답하는 건, "네가 뽑아 놓고 그걸 왜 우리에게 묻냐, 놀랍네"라는 냉소의 뜻이다.
소통 2. 王이 "그럼 경만 믿겠소"라 하는 건, "나한테 똥물 튀기지 않게 잘 처리해라"라는 책임회피의 지고지순한 뜻이다. 이에 신하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 대답하는 건, "네가 암만 꼼수 부려도 세상 사람들은 네가 시킨 짓인 줄 다 알거다, 메롱"이란 썩소의 뜻이다.
소통 3. 신하들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 하는 건, "네 말만 하지 말고 남의 말 좀 들어라. 도대체 소통이 안되네"라는 독선과 유체이탈의 화법만 하지말라는 뜻이다. 이에 王이 "경의 충정은 잘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시오"라 하는 건, "괘씸한 놈, 두고 보자"라는 경고와 경질의 의미를 담은 뜻이다. 그러자 이에 다시 신하들이 "전하의 위엄이 날로 높아가고 있사옵니다"라 하는 건, "너 그렇게 밀어붙이다간 큰일 당한다"라는 말로는 아부하지만 탄핵과 역성혁명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관계는 이렇 듯 아무리 왕이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하더라도 신하들이 똘똘 뭉치면 왕도 어쩔수 없이 신하들의 뜻을 따라야 하는 구조였다. 겉모양은 신하가 왕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과 신하의 관계는 권력을 서로 나눠갖는 분권의 관계였다. 이런 신하들이 의견대립으로 두 패로 나뉘게 되면 왕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쪽의 의견이 선택되면 상대편은 권력에서 쫃겨나게 되고 심하면 역모로 몰리어 사약을 받고 3족이 멸족하는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한다. 좋은 말로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고, 문제의 사안이 깊은 것이면 역적으로 모함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조정에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관직들을 선택된 붕당에서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치와 권력의 속성이다. 이런 모습들이 있다고 해서 붕당정치를 조선이 망한 절대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붕당정치 자체가 탕평책등에 의하여 견제와 권력균형을 이룰 때 올바른 정치를 위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한 시기도 많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후기로 가면 갈수록 붕당정치가 백성을 외면하고 오로지 권력을 위한 정치를 하다보니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국제정세를 외면하여 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망하게 된 것이다.
현시대에서도 정치는 자신들의 신념이나 이익에 따라 무리를 지어 활동을 한다.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수많은 당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없어졌다 다시 모이고 연합했다가 다시 쪼개지기도 하였다. 다른 것 하나 없다. 단지 밥그릇,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다. 물론 명분은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 정치, 사회정의라고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은 모두 권력을 잡기 위한 것으로 때로는 상대방의 잘못을 들춰내서 폭로하기도 하고 없는 것을 만들어내어 정치공작을 하고 권언유착을 통해 언론을 철저한 선전수단의 나팔수로서 이용하기도 한다.또한 정적에게 사형을 내리기도 하고 연금과 구속의 정치적 박해도 가한다.
붕당 정치가 발생하게 된 구조적 요인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된 가장 큰 원인에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이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고 이에 덧붙여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이념 대립, 왕실 내척의 내분등에 의하여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붕당정치의 견제와 균형의 미학이 깨진 것이 조선 숙종때이다. 조선 19대 왕 숙종은 1674년부터 1720년까지 46년간 재위한 왕이다. 숙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주변의 여인들이 조명을 많이 받는다.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최씨 등등...
숙종의 여인들이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드라마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 시대 정치 권력의 향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 숙종의 선택을 받은 여인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 정권이 바뀌곤 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환국(換局)'이라고 표현한다.
'환국(換局)'은 '판을 바꾼다' 또는 '뒤짚어 엎는다'는 뜻이다. 숙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두 개의 세력 (남인과 서인)에게 권력을 주었다 뺏었다 하며 한 쪽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한 쪽 세력이 커진다 싶으면 판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불판을 수시로 뒤집었다.
그 첫 번째가 경신환국 (庚申換局)이다. 1680년 3월 숙종 즉위 6년째 되던 해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허적은 조부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을 자축하기 위한 잔치를 열었는데, 그날 비가 내린다. 빗속에 연회를 하려면 곤란할 것이니 기름칠한 천막을 허적의 집에 보내도록 하라..는 어명. 그러나 어명이 있기 전에 그 천막은 이미 허적의 집에 가 있는 상태였다. 허락도 없이 궁 안의 물건을 가져간 것에 분노한 숙종은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교체한다.
뭐, 숙종이 얼마나 쫀쫀하길래 이런 것 가지고 즉흥적으로 정권을 교체했을까 싶다. 실제로 이 내용은 야사에서 전하는 내용이라 약간은 소설에 가깝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인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과 종친 중 숙종의 신임을 받았던 복성군 이남의 역모가 발견되며 종친 세력은 물론 허견, 허적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다. 1680년 경신환국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이 복군의 역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비상시 군사업무의 총괄 지휘소였던 체부가 역모의 거점으로 밝혀지면서 체부의 설치를 주장했던 윤휴 등 관련된 남인들이 줄줄이 사사되고 몰락하여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두 번째는 기사환국 (己巳換局)이다. 1689년 기사환국은 숙종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훗날 경종)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한 것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비판한 계기로 벌어졌다. 송시열의 상소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숙종은 송시열뿐 아니라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축출했다.
여기서부터 숙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숙종은 첫번째 정비였던 인경왕후가 병으로 죽고, 서인 가문의 딸 (인현왕후)을 왕비로 맞는다. 그 사이에 숙종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여인네가 등장한다. 역관의 딸 장씨다. 그런데 장씨가 남인 쪽의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보니,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는 이를 경계하여 둘의 사랑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숙종과 장씨의 사랑은 명성왕후가 죽은 후 이뤄지는데, 이 때 인현왕후도 장씨를 후궁으로 들이는 것에 찬성 (또는 적극적인 권유)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씨는 소희가 되었고..중전에게 없는 아들도 낳으니 힘의 균형은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결국, 숙종은 장소의의 아들 균을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빈으로 책봉한다. 그녀는 장희빈이고, 그의 아들 균은 훗날 경종이 된다.
서인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반대 상소를 올리나, 숙종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을 보낸 후 사약을 내린다. 어느 선대왕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서인의 영수를 한방에 보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서인들은 파직되거나 유배를 간다. 그 빈 자리는 남인이 차지하게 된다. 장희빈은 중전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기사환국 (己巳換局)이다.
세 번째 라운딩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게 된다. 남인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계기로 서인의 잔여세력까지 제거하려고 하자 숙종이 개입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장희빈은 점점 방자해져 갔고, 숙종의 마음은 멀어져간다. 이 즈음 무수리 출신의 여인이 숙종의 승은을 받고 아들까지 낳으면서 숙빈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그 아들은 연잉군이고 훗날 영조 임금이다. 드라마 '동이'의 주요 스토리이기도 하다.
숙빈은 폐비 인현왕후의 복위를 돕는다. 장희빈의 방자함에 지쳐가던 숙종 역시 인현왕후를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 그 와중에 남인쪽에서 폐비 복위운동을 엄히 다스리라는 상소가 올라오게 된다.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나 당시 임금의 의중이 그 반대였던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권력의 속성을 모르고 달려든 것이다.
숙종은 상소를 올린 민암을 제거하며 다시 한번 정권 교체가 이뤄어 진다. 중전이던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나중에 사사되었고 인현왕후가 다시 한번 중전으로 복귀한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숙종의 극단적 리더십이 보여주는 환국정치는 붕당 말살하고 공존없는 정치로 혼란만 불러오게 된다. 허적, 윤휴, 송시열, 김수항. 이 네 사람은 조선 숙종 때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영수들로 환국에 휩쓸려 왕의 사약을 받아 죽었다. 이들의 죽음은 조선왕조실록에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3번의 환국으로 기록되게 된다. 환국은 한 붕당에서 다른 붕당으로 조정의 주도 세력이 전면적으로 바뀌는 것으로, 조선 왕조에서 숙종이 처음 시도한 정치 방식이다. 세 번의 환국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특히 숙종이 당파 간 갈등을 다룬 리더십의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숙종이 통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붕당은 갈등하고 대립했을지언정 서로를 죽이고 상대방을 괴멸시키려는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효종 대에는 서인 재상 김육이 남인 대신 허적과 협력해 대동법을 추진했다. 현종 대에 남인 허목이 서인 송시열과 예송 논쟁을 벌였으나 이론 경쟁만 이어졌다.
하지만 숙종이 조정을 한 붕당 일색으로 채우는 환국정치를 단행하면서 공존이 깨져버렸다. 숙종은 환국 때마다 지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죽이고 실각한 붕당을 과도하게 탄압했다. 환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집권세력을 적폐, 불충한 신하, 역심을 품은 신하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 착오나 잘못도 모두 상대 당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이런 숙종의 태도가 붕당들로 하여금 임금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붕당들은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는 데 집착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데 매달렸다.
서인과 남인이 원수가 된 1차적 책임은 숙종의 리더십에 있다. 서인과 남인은 학문적, 이념적 차이를 지닌 집단으로 국정과 민생의 주요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대안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만약 숙종이 정책이나 선명성 경쟁을 통해 누가 더 나은지 겨루도록 하며 붕당의 공존을 이끌었다면 조선 후기 정국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숙종의 환국정치는 인조에서 현종 대에 구현됐던 붕당 정치 발전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렸다.
오늘날 우리의 국가사회 조직에서도 구성원들의 출신과 성향, 이념이 다양해지면서 사소한 갈등이 조직 문화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위험이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갈등이 그 자체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서로의 관점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인지적 갈등’은 사고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대안을 도출해 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갈등을 아예 없애는 것보다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해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는 예술이다.견제와 균형이 무너진 정치가 어떤 정치적 역사적 교훈을 주는지, 이것이 숙종의 리더십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