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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답사

정순왕후와 천주교 박해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8.12.31|조회수334 목록 댓글 0

수렴청정에 휘둘린 허수아비 임금, 순조(純祖)

🌹 조선의 숨통을 막아버린 정순왕후

1800년 정조(正祖)가 재위 24년만에 49세로 죽자 정조의 둘째아들인 11세 꼬마 이공이 순조(純祖)로 즉위했다.

순조는 1790년 6월18일에 창경궁에서 정조와 후궁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조의 유일한 아들이던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요절했기 때문에 당시 순조(純祖)의 탄생은 왕실의 큰 경사였다.

이후 순조(純祖)는 11세가 되는 1800년 1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년도 되지 않은 6월에 아버지 정조(正祖)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정조가 승하하자 죽기를(?) 기다리고 있던 순조의 증조할머니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재깍 수렴청정(垂簾廳政)을 시작했고, 노론 벽파가 당당하게 앞에 나서게 되었다.

순조(純祖)의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살아 있었으나, 정식 왕비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垂簾廳政)을 할 수 없었다.
정순왕후는 3년 반 동안 수렴청정(垂簾廳政)을 하면서 정조가 시도했던 모든 개혁을 몽땅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규장각엔 먼지만 쌓였고, 재정이 끊긴 장용영은 없어졌으며, 화성(華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갔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시도했던 사도세자의 신원회복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고, 서학(西學)을 공부한 선비들은 국가 반역집단이 되어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남인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 등은 처형되었고,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정약용(丁若鏞)까지 유배되었다.

생전에 정조가 그렇게 살리려고 애썼던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裀)과 이인의 처, 며느리까지 모조리 사사(賜死)되었다.
좌우간 정조(正祖)와 관계있는 인물들은 모조리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싹쓸이를 당한 것이다.

도대체 그녀는 왜 시파(時派) 신하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벽파(僻派)의 신하들을 대거 등용한 것일까?

그건 바로....그녀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낸 벽파 쪽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자국왕(女君)을 칭하고,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다고 하니, 인물은 인물이다.

보통 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廳政)을 하게 되면 정치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승이나 승지의 자문을 받아 행하였기 때문에 여자들의 수렴청정(垂簾廳政)은 그 권력이 제한적으로 수행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은 달랐다.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와 정순왕후는
제 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조(正祖)의 성과가 물거품이 된 것은
곧 조선의 꿈이 사라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국가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의 붕당만을 위한 정치를 한 정순왕후!
그녀에 대한 평가는 결코 긍정적일 수가 없다. 그저 그녀의 정치적인 행보가 안타까울 뿐이다.


🌹 천주교를 박해하다, 신유박해

조선후기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학문인 서학(西學)이 유입되었는데, 그중에는 천주교가 있었다.
천주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정신을 강조했으며,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 등이 교리의 특징이었다.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거니와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매우 중용한 예(禮)로 생각한 조선에서는 당연히 천주교를 오랑캐 종교라 치부했으나,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나랏일을 하는 신하들도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를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는데, 정조(正祖)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대대적인 탄압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조(正祖)가 죽고, 순조 즉위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廳政)을 시작하자마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1801년에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정순왕후는 사교(邪敎)를 근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인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당하고, 주문모를 비롯한 천주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辛酉迫害)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면서, 노론 등의 집권 보수세력이 정조 시절 성장했던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과 진보적 사상가를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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