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경복궁
삼정(三政)의 문란을 바로 잡고, 서원을 철폐해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치세중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경복궁 중건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간 선조에 대해 분노를 드러낸 백성들이 불태워 버린후 300년이 다 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잡초가 우거지고 송충이가 우글거렸을 뿐 아니라 밤이면 살쾡이들이 돌아다니고 호랑이, 여우도 놀았다고 한다.
게다가 담장에는 판잡짓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조선 정궁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이 타버린 바람에 왕들은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런 경복궁의 기가 막힌 꼴을 볼 때마다 역대 왕들 거의 대부분이 경복궁(景福宮)의 중건을 생각했다. 그러나 중건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차일피일 이를 미루어왔었다.
경복궁(景福宮)을 보면서 맨날 한탄만 하던 대원군은 드디어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 중건을 결심하고 공사를 맡아 진행할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했다.
중건의 명분은 중흥대업(中興大業)이었다,
명분은 백 번 옳았으나, 당시 형편으로 경복궁 중건은 재정상 너무 무리한 일이었다.
조정에는 공사를 진행할 만한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공사는 순전히 기부금에 의하거나 편법을 동원해야 했는데, 공사비가 자그마치 800만 냥(쌀 250만 석)이나 드는 대공사였으니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영건도감(營建都監)의 도제조는 영의정 조두수가 맡고 이돈영이 재정을 맡았으며, 이경하가 공사감독을 맡았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제법 협조가 들어와 공사가 잘 진행되었으나 해를 넘기면서 부터 마(魔)가 끼기 시작했다. 공사장에서 두 번이나 불이 나서 가건물 800여 칸과 쌓아놓은 목재들이 싸그리 타버린 것이다.
전각을 지을 수 있는 많은 목재들이 재가 되어버리자, 대원군은 이를 채워넣기 위해 원납전(願納錢)징수를 강행하고 당백전을 발행해 사족들과 백성들 양쪽 모두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1867년 11월 경복궁(景福宮)은 중건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6개월만에 완성되었다.
중건 낙성과 더불어 도성 정비사업도 같이 시행하여 궁궐 주변의 민가를 헐어내고, 광화문통의 주점들도 철거했으며, 낡은 문루와 함께 하수도도 정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