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병권 그리고 군사제도
붓의 나라 조선!
칼의 나라 일본!
선비와 사무라이!
지난 오백년 역사 동안 조선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이처럼 조선은 숭문천무(崇文賤武)의 나라로 인식이 되어 왔다. 조선 초기를 제외하고는 조선의 정치는 武에 바탕을 두기 보다는 崇文으로 인한 단지 성리학의 해석 차이로 당쟁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것이 지금까지 일반적 시각이었다.
특히 왕위를 둘러 싼 당쟁과 권력 향배는 누가 유교적 명분론을 얼마나 잘 내세우느냐에 걸려 있었다고 보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올바른 역사적 관점은 아니다. 조선의 역사를 좀 더 깊숙히 살펴보면 붓의 나라인 조선에서 권력과 병권은 일반적인 인식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 조선정치사의 기본축인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 중 그 균형추는 병권을 장악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왕 본인이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친위세력 병권을 장악하는 경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선초기 태종, 세종, 세조시절까지는 그랬고 조선후기 정조도 그러했다.
그러나 성종이후 군사지휘권이 사대부들에게 넘어가면서 부터 왕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상황에 따라서 신하들이 왕 친위대까지 장악하여 왕을 실질적으로 감시하는 일까지 벌어 졌다.
조선 초기의 군왕들은 병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놓지 않으려 했다. 태종 이방원은 사병을 길렀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제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사실 제 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핑계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왕족 대표 격으로 이방원이 나서서 정도전을 제거한 것이다.
태종 본인의 이러한 실질적 경험으로 사병이 왕권을 언제든지 위협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마자 한 일이 사병을 혁파하고 관군으로 배속시켜 병권을 확실히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 태종은 성공했다. 그랬기 때문에 세종 때 왕권이 안정되었고 조선의 오백년 역사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도 병권은 놓지 않았다. 세종 1년에 이루어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도 태종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다.
세종 또한 태종이 튼튼하게 물려 준 당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김종서등을 시켜 4군6진을 개척하고 현재 우리나라 지도를 완성 할 수 있었다.
수양의 경우는 독특하다. 당시 병권은 김종서등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실질적인 병권까지 신하들이 가져 간 것은 아니었고 병권 총사령관 지위 정도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수양의 빈약한 사병으로도 기습쿠데타가 가능 했을 것이다.
수양의 기습쿠데타에 허무하게 당한 김종서의 경우는 이방원에게 당한 정도전과 너무 비슷하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 김종서의 병권장악도 제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경우와 비슷하게 실질적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병권에 어느 정도 명분있는 왕자 출신들인 이방원이나 수양의 기습쿠데타로 당시 병권을 명목상 가지고 있던 정도전, 김종서등을 제압할 수 있었다
수양 또한 왕위에 오른 후 태종처럼 병권을 장악하려 했고 적어도 왕실의 영향력 아래 붙잡아 두려 했다.
그러나 유교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들은 성종 때 조선의 권력시스템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고 조선의 헌법이라는 경국대전도 편찬되면서 병권은 왕으로 부터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러다 정조가 재위하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병권을 온전히 손에 넣은 적이 없었다. 이방원이나 수양처럼 왕자들에 의해 기습쿠데타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단지 ‘반정’이라는 병권을 가진 신하들의 파행적인 쿠데타에 의해서 추대로 왕위에 오른 군왕들에 있어서는 병권을 가진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반정으로 전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보위에 올린 세력들은 왕에게 권력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존의 군사체계를 장악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거사를 위하여 모병한 사병들을 정규군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병권을 손에 넣었다.
반정세력이 거사를 위하여 유교적인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정권을 운용하는데 있어 병권이라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군사의 수도 늘어나고 군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지만 이 두 전쟁으로 인해 병권은 왕과는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
특히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반정공신들인 서인들은 관병을 공식적인 자기 당파 친위세력으로 만들어 병권에 대한 장악력은 높혀만 갔다.
이제 병권은 완연히 신하들이 장악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영조는 자신이 왕이 되기 힘든 미천한
신분 출신이라는 열등의식 때문에 왕이 되기 위해 서인 노론과 협약을 한다. 영조 자신은 병권을 포기하고 노론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밀약을 체결하고 왕위에 오른다.
영조시대가 왕권이 강해 영조가 신하들을 막 주무른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조시대는 초기 몇 년 소론이 집권한 경우를 빼고 완전히 노론의 시대였다.
영조의 유명한 탕평책도 그저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다.
영조 31년에 일어난 소론 출신들의 나주벽서사건으로 노론은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벽서사건에 소론편을 들고, 대리청정 당시 영조와는 달리 병권에도 관심을 보였던 사도세자까지 죽음으로 몰아갔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할 때 11살이었다. 충분히 세상 돌아가는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런 현실 속에 즉위한 정조의 국정 제1목표는 강력한 절대왕권의 확립이었다.
노론에 의해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던 정조였다. 당시 노론의 권세는 왕보다도 훨씬 높았다. 돈과 인맥, 명분, 더구나 왕실의 안방, 게다가 병권까지 사실상 조선의 모든 것을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조선은 이씨 왕조의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은 ‘노론의 나라’가 되었다.
정조는 이런 조선의 현실을 다시 이씨 왕조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런 왕권의 불안함은 병권이 왕에게 있지 않고 신하들인 노론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조선을 노론으로 부터 떨쳐 버리고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기 위하여 정조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은 병권이었다.
정조에게 최대의 위기가 기회로 찾아왔다.
정조 재위 1년만에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의 침실인 존현각에 자객이 들어 닥친 것이다. 이 사건은 현빈이 정조역을 한 '역린'으로 영화화 되었다. 정조는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그리고 정조는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간다.
정조는 존혁각 사태를 핑계로 왕의 경호를 전문적으로 맡는 부대 '장용영'이라는 왕의 친위경호부대를 창설한다. 정조는 이런 장용영을 점 점 키워 간다. 얼마 안 가 정조의 장용영은 중앙군인 5군영 군세를 압도하게 만들어 놓는다.
정조의 개혁은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조 초기에는 노론들도 정조를 우습게 안다. 그런 모습이 영화 '역린'에서도 나온다. 그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당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구선복이라는 인물이다.
이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있을 때 당시 포도대장으로서 뒤주 옆을 지키면서 고통에 시달리는 사도세자를 조롱하는 노론벽파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어린 정조는 나이가 들어 왕이 되었어도 구선복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 씹어 먹어도 시원찮겠다는 거친 표현도 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듯이 정조 초기에는 정조는 구선복을 전혀 손 대지 못하고 타협을 한다. 구선복과 노론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재위 십 년이 지나고 정조 친위경호부대 장용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정조는 그때서야 구선복을 역모로 몰아 능지처참으로 잔인하게 죽인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깊은 한을 재위 십 년이 지나서야 풀었다.
여기서 보듯이 병권은 이렇게 중요하다. 병권을 장악하지 못한 왕은 왕으로서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조선을 붓의 나라라고 부르며 이기일원론, 이원론 등으로 성리학 철학으로 사색당쟁만 한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병권에 의해 권력의 향배가 좌우 되었던 것이다.
사실 정조 평생 숙원사업이었던 화성건설도 병권과 관련이 깊다.
우리는 정조가 지금 세종시처럼 제 2수도로 화성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알고있지만 정조의 속 뜻은 따로 있었다. 정조는 혹이나 신하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자기를 공격하여도 물리쳐 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이 필요했고 그 성을 짓는 것이 더 큰 목표였다.
정조는 화성이 완공되면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지난 날 태종처럼 상왕으로 남아 병권을 장악한 채 화성에 머물며 그가 꿈꾸는 절대왕권의 이상세계를 만들어 가려했다.
정약용의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화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답이 나온다.하지만 정조의 느닷없는 급사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조선은 정조이전 보다 더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병권은 이제 노론이지만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수중에 떨어지고 왕권은 단지 허수아비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조금이나마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씨 왕족 세력들은 세도가문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된다.
흥선이 대원군에 오르기 전까지 세도가문들로 부터 살아 남기위해 '상갓집의 개' 노릇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붓의 나라로 알려 진 조선도 병권의 향방에 따라 권력이 결정이 되어졌던 것이다.
조선역사에서 병권이 아니면 정권을 뒤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쯤에서 조선의 군사제도에 대해서도 알아 보자.
조선시대에는 16세가 넘어 성인이 된 모든 양인 장정은 60세가 될 때까지 군역을 부담했었다. 양인 모두에게 군역이 부과되는 '양인개병제'가 원칙이었다. 농사짓는 양인들이 직접 현역 군인인 정군이 되었으며 농민이 교대로 군사 훈련을 받고 군복무를 하는 농병일치가 시작된 것이다. 농민과 병사가 같다는 뜻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군복무를 물질적으로 돕는 보인이 되기도 했다. 이것을 군역이라 했는데 조선후기로 갈수록 삼정문란의 주범이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의 군역은 자유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양인인 농민의 권리이자 의무였었다. 양인들의 이런 의무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양인들도 과거시험에 응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점차 양반들 자기들만의 잔치가 되고 말았다.
조선사회의 특이한 점은 노비나 천민은 군역을 질 수 없게 해 놨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역을 주지 않을 정도로 사람취급을 안했다. 다만 필요에 따라 노비가 특수군에 편제되는 일은 있었다.
조선에서 양반은 군역의 의무가 전혀 없었다.
'잡색군'이라는 명칭으로 군역을 지지 않는 잡다한 사람들을 조직한 군대는 있었다. 전직 관료 · 서리 · 향리 · 교생, 그리고 노비 등이 편성 대상이었다. 여기에 일부 양반들이 군대로 편성되었을 뿐이다.
이 잡색군들은 평상시에는 본래의 업무에 종사하다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군사 훈련을 받고 향토를 방위하는 일을 맡는 일종의 예비군 이었다. 그러나 명색 이름 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었고 사용 되지도 않았다.
조선군사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조직 되어 있었다. 중앙군은 5위라 하여 중위,전위,후위, 좌위,우위로 구성되어 5위 도총부가 지휘했다.
5위는 각 지방군도 나누어 통할했는데,
중위 : 서울 중부, 경기, 강원, 충청, 황해도
전위 : 서울 남부, 전라도
후위 : 서울 북부, 함경도
좌위 : 서울 동부, 경상도
우위 : 서울 서부,평안도의 지방군을 맡았다.
각 위는 다시 5부로 나뉘고 각 부는 각각 4통으로 나뉘었으며, 각 통은 다시 여,대,오,졸로 나뉘졌다.
지방군은 영,진군과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으로 구성된다.
영진군은 의무병이었지만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를 받을 수도 있으며, 주로 국방상의 요지인 영,진에서 복무하고, 일부는 교대로 수도에서 근무하였다.
지방군은 원래 '진관제'로 편성되었다.
진관제란 주진-거진-제진으로 구성되며, 지역 방어, 진지 방어 개념으로 요새에 상주병력을 배치해 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스스로 지키도록 하는 고수방어 체계였다.
하지만 징집제도의 문란으로 상주병력이 모자라고(아예 없던가...) 있더라도 병력이 소수라서 대군이 공격해 오면 각개격파되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제승방략이란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전후로 해서 임진왜란에 이르는 약 50년간 조선 전기 이래 시행되어온 진관 체제의 변형으로 나타난 독특한 방위 체제를 가리킨다. 전쟁 등이 일어나면 각 지방의 군사들이 미리 정해진 방어 지역으로 집결하도록 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되어 오는 지휘관들이 이들을 지휘해 그 지역을 방어하는 방어 체제를 말한다.
이 제승방략 체제는 상비군의 숫자가 진관제에 비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수영 병영과 같이 상비군이 집결해있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방에 병력이 조금씩 분산되어있고 또 군포를 납부하여 병역을 면제받는 것이 일상화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상비군의 수가 크게 부족했다.
조선군사 징집제도가 똑바로 가동되었다면 비상시에는 10만 정도는 가능할 걸로 예상된다. 실례로 세종때 조사한 호적등본을 보면 전국에서 30만 가까이 징집할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 농민과 군사의 차이가 없다고 볼때 이 인원이 비상시 그대로 병사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전라도에서만 징집한 근왕병이 4만이 되었고, 충청도와 경상도 병력 일부가 합류해서 5만의 병력을 모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군사제도는 세종의 4군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제대로 역할을 한 적이 없다. 내부적으로 쿠데타나 반정을 할 때 일부 사용되었을 뿐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정규병인 군사들은 별 힘을 못 썼고 의병들이 일어나서 나라를 지겼다.
조선 군사제도의 가장 큰 문젯점은 나라의 온 갖 혜택을 다 누린 양반들이 군역에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조 때 박문수가 호포법으로 양반들도 1년에 베 한 필정도 (농민들은 두 필을 내고 있었음)를 같이 내자고 하니 양반들이 당쟁을 떠나 개난리를 쳐서 박문수만 개 쪽팔리고 없던 일이 되고 만다. 이 호포법은 흥선 대원군 때 와서야 실시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런 조선 양반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
아랫 표를 보시라!
상류층이란 작자들 본인과 자녀들의 군대 면제율이 일반인과 수십배 차이가 난다.
어떤 생각이 든가?
우리나라 상류층이란 작자들은 훨씬 잘 먹고 잘사는데 왜 군대 갈 시기에만 그리 아프고 이름도 알기 힘든 병에 걸리는 일이 많은가?
그리고 군대 면제만 받고 나면 그 누구 보다도 건강하고 정열적으로 사회생활을 잘 하지 않던 가?
조선 오백년의 못 된 군역 유전자가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