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국가의 첫 번째 (종묘의궤)
왕조 국가에서 나라를 건국하면 제일 먼저 한 일이 종묘를 설치했다.
(김문식 ᆞ신병주 ᆞ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중 종묘 글)
사람들은 조상으로 부터 태어나 만물의 근원을 하늘에 두고 땅이 길러준 음식을 먹으면서 생명을 여위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늘과 땅 ,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자신의 근본에 대한 보답하고 시로로 돌아간다는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의미를 지닌다.
禮學의 정치를 펼쳤던 조선시대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오례 五禮가 있었다.
오례 중에서 국가의 제사는 길례 (吉禮)에 속했으며, 사직과 종묘는 길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제사 즉 대사 (大祀)였다. 사직과 종묘의 제사는, 조선이 농업을 주신으로 하고 전주 이씨를 왕실로 한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행사였다.
조선의 국왕들이 "종묘사직"이라고 말하면 이는 바로 국가와 왕실을 말하는것이었다. 국왕은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하는 경우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는 반드시 모시고 가서 제사가 끊여지지 않도록 했다. 왜나 하면 제사가 끊어졌다는것은 바로 국가가 멸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묘의 연혁
종묘는 조선의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현재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해 있다. 종묘의 건물은 본묘인 정전과 별묘인 영녕전으로 구분한다.
종묘 정전은 현 국왕으로부터 4대까지의 가까운 조상과 국가를 창업하거나 중흥시킨 공적이 있는 국왕들의 신주를 모셨고 , 영녕전은 본묘에서 옮겨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에 종묘가 처음 세워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신라에서는 남해 차차웅이 서기 6년에 시조묘를 세웠고 유리 이사금이 여기에 제사를 올렸다고 하며, 고구려에는 동명왕묘, 백제에서는 동명왕과 국모의 묘를 세웠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종묘제도를 완비하고 5묘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은 건국초기에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에 조선의 종묘를 세웠다가, 1309년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기면서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건설하였다.
영녕전은 세종3년(1421)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때 지은 별묘이다. 가운데 4칸의 본전에는 추존왕 4명과 왕비들의 신주를모셨고 나머지 협실에는 정전에 계속 모실수 없는 신주들을 옮겨 와 모셨다.
태조가 서울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종묘와 사직을 궁궐과 함께 제일 먼저 건설한 사실은 종묘와 사직이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국장을 치르고 국장이 끝나면 우주 즉 가신주를 만들어 호전에 모셨다. 1년이 지나면 가신주를 묻고 새신주를 만들어 혼전에 모시며, 삼년상이 끝나면 길일을 골라 혼전에 모신 새 신주를 꺼내 종묘에 모신다.
이를 부묘(祔廟) 라고 한다. 종묘의 신주는 4대가 내려갈 때까지 모시며 , 4대가 가 지나 천진(제사를 받드는 대수가 다 된것이다)영녕전으로 옮긴다.
이와같이 정전에 있는 신주를 꺼내서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을 조천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전에 국가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국왕은 불천위(不遷位 )라고 하여 그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 그대로 두었다.
예기에 따르면 제후국인 조선은 5묘조를 둘 수 있다.
태조와 그 4대조인 목조 (穆祖), 익조(翼祖), 도조(都祖), 환조(桓祖) 합치면 5대조가 된다.
조선초 태조가 사망한 후 종묘에는 별모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후대 왕들의 신주가 계속 추가 되면서 별묘가 필요해졌다. 세종은 태종이 사망하자 별묘를 건설하여 태조의 선대 4대를 모셨고, 본묘에는 태조를 제일 서쪽의 1실에 모시고 그 오른쪽으로 차례에 따라 신위를 모셨다.
이후 종묘에는 후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가 계속 추가되었고 , 이에 따라 본묘와 별묘의 건물도 계속 증축 되었다. 왜냐하면 본묘에는 4대가 지나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는 불천위가 늘어났고 별묘에는 본묘에서 나온 신주들이 계속 추가 되었기 때문이다 . 이로 인해 현재 종묘에 있는 건물은 모두 옆으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