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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답사

왕의 비자금 내탕금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07.15|조회수300 목록 댓글 0

內帑金 내탕금

조선왕조의 내탕금이 조성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고려 말 여러 차례 공신으로 추대되면서
하사받은 토지와 재물이 많았는데, 태조 서거 후 태종이 ‘내수소’라는 기구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 하였다.

임금들의 개인 재산 '내탕금'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왕도
개인 자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내탕금(內帑金)'이라는 이름으로 왕과 왕실의
개인 재산을 인정하고 국가 재정과 확실하게
구분을 지은 건 조선시대부터였다.

이성계는 오늘날 함경도 일대 땅 3분의 1정도를
가지고 있었고 집에 딸린 노비만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이 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자
신하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대한 재산을
국가 재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과 왕실의 재산은 국가 재정과
구별되는 개인 재산' 이라고 선포하면서 내탕금이 생겨났다. 이후 궁궐의 내시들로 이루어진 '내수사'라는 기관에서 내탕금을 관리하였다.

내탕금은 국가 재정과 달리 별도의 회계 감독을 받지 않았고, 따로 사용처를 밝히지도 않았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특수활동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재정이 아니라 왕의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내탕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고, 왕이 내탕금을 쓰는 것에 간섭할 수도 없었다.

내탕금은 어떻게 쓰였을까

조선시대 왕들은 내탕금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주로 공을 세운 신하에게 격려금을 내리거나 왕자. 공주의 결혼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효종과 영조는 흉년이 들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리는 백성이 늘어나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대신해 내탕금으로 구호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제사의 묘를 이장할 때
막대한 액수의 내탕금을 사용하기도 했다.

몇몇 왕은 내탕금으로 절을 짓기도 했다
조선은 유학을 따르고 불교를 멀리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국가 재정으로 절을 지으려고 하면 신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탕금으로 절을 세우면
신하들의 간섭과 반대를 피할 수 있었다.

조선 말 고종은 내탕금으로 경복궁 內에
따로 건청궁이라는 궁궐을 짓기도 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한 이후에는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승격시키고 국가 재정으로 관리하던 땅과 인삼 전매 사업, 철도 .광산 사업등을 내장원이 관리하도록 했다.

이렇게 국가 재정을 내탕금으로 끌어들이자
1년간 지출된 내탕금이 국가 재정 지출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고종은 이 내탕금으로 근대적 교육기관을 세우거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특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궁궐 개 .보수나 각종 황실 행사 등 황실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 내탕금을 낭바했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나타났다.


그 많던 내탕금은 어디로 갔을까?

막대한 내탕금을 갖고 있던 고종은
독일 공사관의 소개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독일계 은행 '덕화은행(오늘날 도이치뱅크)'에
오늘날 가치로 약 250억원에 달하는
51만마르크의 내탕금을 에금했다.

그런데 1909년 고종의 외교자문관이자
최측근 인사였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내탕금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는 이 돈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덕화은행은 "이미 다른 사람이 돈을 찾아갔다"는
말만 반복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야
1908년 일제 통감부가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가짜 서류를 만들어 덕화은행에서 고종의 내탕금을 인출해 간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학자들은 고종이 내탕금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이토 히로부미와 일제 통감부가 몰래 내탕금을 빼돌린 것으로 보고 있다.

왕실경비가 국가예산에서 책정되기는 했지만
사용처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 국가예산으로는
왕실의 전후사정을 밝히기 어려운 사적인 일에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왕실의 사적인 재산인 내탕고에서
꺼내 쓰게 되었는데, 내탕고가 고갈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세조는 내수소를 내수사로
확대개편하면서 소금과 홍삼의 전매사업을 관장하게 하여 내탕고의 재산을 불려나갔다.

왕실 재산이라고 내탕고에서 왕 개인이
사사로이 쓸 수 없도록 엄격히 규정을 두었다.
국가 위기관리를 위해 흉년이 계속되면 내탕금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
내탕금 1만냥을 내어 그 비용으로 썼다.
고종은 자신이 거처할 건청궁을 지으면서
이 내탕금을 사용했으며 일본으로 신사유람단을 보낼 때도 고종은 내탕금에서 지출하였다.

내수사의 자금조성문제가 국가재정의
조세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부작용이 커지자 고종은 내수사를 폐지 하지만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등의 외국기업이 주는 리베이트로 내탕금을 조성, 조선 왕실은 대단한 부자였다.

그 내탕금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던 민영익은
고종과 민비가 친러 쪽으로 기울자 그 사실을 원세개에게 알려 고종폐위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 건에 연루되어 홍콩으로 달아나면서도
내탕금의 관리와 홍삼전매권을 쥐고 있어서
망명지 홍콩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후에 친일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면서도 그의 손에는 내탕금과 홍삼전매권이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비자금이란 말로 내탕금이 변색된 것도 일본의 조선찬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특수활동비는 비리에 이루어지는 범죄 수사, 첩보, 그 외 여러 정부 활동에 사용되는 예산이다.
일반적인 정부 예산은 사용 내용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만, 특수 활동비는 비밀 업무에 사용되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따로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정부 업무 외 다른 용도로
잘못 사용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옛날 왕조 시대 임금들은 국가 재정을
자신의 돈처럼 썼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개인 재산과
국가 재정을 명확히 구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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